뮤지컬 <닥터 지바고> 가 개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동명의 장편소설은 러시아 혁명과 전쟁 속에서 피어난 사랑의 대서사시로, 1965년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뮤지컬로는 지난 2010년 호주에서 초연됐고, 국내에서는 2012년 첫선을 보였는데요. 6년 만의 재연인 데다 의사이면서 시인인 유리 지바고에는 류정한, 박은태,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라라 역에는 조정은, 전미도 씨가 캐스팅돼 개막 전부터 관객들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그래서 ‘어떤 배우를 만날까’ 고민도 깊었는데요. <닥터 지바고> 초연 때부터 참여했던 배우죠. 그리고 <베르테르> 의 롯데, <원스>의 Girl, <맨 오브 라만차> 의 알돈자, <스위니 토드> 의 러빗 부인, <어쩌면 해피엔딩>의 클레어로 그야말로 무대마다 변화를 거듭하는 전미도 씨를 연습실이 있는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직접 만나봤습니다.
“<닥터 지바고> 는 우선 음악의 힘이 커요. 선율이 굉장히 좋고, 드라마 라인과 멜로디가 잘 맞아떨어지거든요.”
6년 만의 재연인지라 작품을 접하지 못한 관객들이 많을 터. 배우로서 <닥터 지바고> 의 매력을 물었더니 전미도 씨는 일단 음악을 꼽았습니다. 드라마도 좀 더 간결해지고 명확해졌다고요.
“초연 때는 수행하기 급급했다면 이번에는 작품이 하고 싶은 이야기, 그 방향을 더 많이 찾았어요. 예전에는 러시아 혁명이나 그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 많은 것을 담고 있었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유리와 라라의 사랑에 좀 더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연극 <벚꽃동산>, <갈매기> 등도 하셨잖아요. 러시아 고전에 담긴 사랑은 지금 20~30대 관객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전미도 씨가 생각하는 러시아 문학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러시아 작품이 모두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뼈대만 보면 대단한 게 아니라 일상적인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안에서 각 인물이 자신의 성격에 맞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찾아내고 발견하는 과정들이 관객 각자의 상황에 맞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러시아 작품은 한 가지로 주제를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닥터 지바고> 도 마찬가지예요. 큰 뼈대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유리와 라라의 운명 같은 사랑 이야기지만, 그 사이사이 다른 인물을 통해 여러 군상을 보여주고 있어요.”
두 유리는 많이 다른가요? 박은태 씨와는 첫 작품으로 아는데요.
“네,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굉장히 젠틀하고 무척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류)정한 오빠는 다가가기 어렵고 까다로워 보일 수 있는데, 막상 말을 해보면 순수한 소년 같아요. 상대배우를 굉장히 편하게 해줘서 배우들이 다 좋아하고요. 두 사람이 유리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는 걸 연습실에서 보거든요. 인물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하니까 중심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디테일한 부분은 다르게 표현되겠지만요. 상대배우로서는 고맙죠. 누구를 만나도 같은 선에서 연기할 수 있으니까요.”
라라는 어떤 인물인가요?
“소설에서는 굉장히 상징적인 인물인데, 저희가 만들어가는 모습은 특수한 상황을 겪는, 굴곡진 인생을 사는 여자예요. 삶을 치열하고,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인물이죠. 아무래도 6년 전과 달리 인물들에 대해 좀 더 깊게 들여다봐지는 게 있어요. 예전에는 라라의 치명적인 과거에 대해 피해자니까 그 부분에 타당성을 찾아내려고 했다면 지금은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그게 더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대 위에서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맡아온 전미도 씨, 현실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요?
영상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죠!
실제 성격과는 비슷한가요? 전미도 씨를 처음에 <베르테르> 의 롯데로 봐서인지, 지금 봬도 여리여리해서 강인한 성격은 아닐 것 같은데, 워낙 무대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시니까 헷갈리기도 합니다.
“다른 캐릭터도 마찬가지지만 라라 역시 비슷한 면도 있고 아닌 것도 있죠. 라이선스 작품이나 고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 겹이 씌워지는데, 현대물은 아무래도 말도 더 자연스럽고, 캐릭터적으로도 제 성격이 더 나오는 것 같아요. 연극 <비 BEA>나 <흑흑흑 희희희>, <썸걸즈> 에서도 그런 편인데, 털털하고 강단 있는 성격이랄까. 그런데 저도 진짜 제 모습이 어떤 것일까 헷갈릴 때가 있어요. 사소한 일에는 무척 고민하는데, 큰일은 의외로 쉽게 선택하거든요. 고민을 굉장히 오래 하지만, 결국은 제가 생각한 것으로 선택하는 편이에요.”
작품 선택할 때도 고민을 많이 하시나요? 오디 작품만 봐도 대부분 타이틀 롤이 남자이고, 전체적으로 봐도 여배우가 설 수 있는 무대가 한정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전미도 씨는 좋은 작품에서 비중 있는 캐릭터를 많이 하셨어요.
“소모되는 역할은 싫어서 그런 부분은 까다롭게 고르는 편이에요. 그러지 못할 때도 있지만. 사실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지는 않는데, 저는 운 좋게도 여성 캐릭터가 드라마를 끌고 갈 수 있는 역할을 많이 한 편이에요. 다행히 요즘은 여성이 주체가 되는 이야기를 해보자는 시도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여자가 톱은 아니더라도 비중을 늘리거나. 특히 창작의 경우는 더 그렇죠. 창작자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는 게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대극장과 소극장 무대를 비슷한 빈도로 넘나드는 배우들도 많지 않은데, 전미도 씨는 대극장과 대학로 무대, 또 연극과 뮤지컬을 균형 있게 하시더라고요. 나름의 신념이 있나요?
“대학로에서 시작했고, 그리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소극장이든 대극장이든 상관없이 제가 하고 싶은 작품, 하고 싶은 인물이 있으면 선택하는 편이에요. 사실 대극장 공연을 하다 보면 대학로 작품은 기회가 없기도 한데, 저는 운 좋게 연락을 주셨고, 그때 주저하지 않고 참여해서 기회가 많지 않았나 싶고요.”
그래서인지 참 다양한 결의 캐릭터를 연기해 왔는데, 가장 힘들었던 인물은 누구인가요(웃음)?
“알돈자요(웃음).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라고 하면 <맨 오브 라만차> 와 <메피스토> 가 늘 떠올라요. 저와 안 맞는다고 하면 기존의 저에 대한 이미지가 있고, 또 이 역할에 대한 이미지가 있어서일 텐데, <맨 오브 라만차> 는 10년 넘게 공연되다 보니 알돈자의 이미지가 확고하게 각인돼 있어서 그걸 넘는다는 게 큰 도전이었죠. 그 이미지를 깨려는 게 아니라 내가 해석하고 보여주고 싶었던 알돈자를 충실히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로 인해 알돈자의 드라마를 이해하게 됐다’는 분도 있었지만, ‘안 맞는 것 같다, 보기 불편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어떤 역할을 맡아서 그런 부정적인 표현을 들은 건 알돈자가 처음이었어요. 그래도 가치는 있었다고 생각해요. 다시 도전하라고 하면 자신 없지만(웃음).”
반면 <스위니 토드> 의 러빗 부인은 의외로 너무 감칠맛 나게 연기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저에게 ‘아줌마스러움’이 있어요. 연극에서는 비슷한 캐릭터를 한 적도 있고. 그래서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도전하겠다고 선택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어요. 어떤 작품을 하든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히 있어요. 작품에서 원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것. 어떤 이야기에서 그 인물이 해내야 하는 몫을 찾아내서 표현하는 게 저의 임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작품 할 때마다 힘을 갖게 되는 건 있는 것 같아요.”
아직 해보고 싶은 작품, 캐릭터가 있나요?
“제가 안 해본 건 다 해보고 싶은데(웃음). 좀 편안한 걸 해보고 싶어요. 지금까지 했던 작품의 성향이 극으로 치닫고 갈등도 많은 편이라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지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배우들이 감정을 쏟아내고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여백이나 여운으로 다가오는 텍스트에 참여하면 좋겠네요.”
최근에 제2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여우주연상도 받았는데, 여배우가 아닌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요?
“상은 감사하죠. 그런데 <닥터 지바고> 이후로 뭔가 색다른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내적이든 외적이든. 사실 저는 작품적으로는 욕심이 많지만, 일상에서는 안정을 추구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심한 사람인데, 최근 몇 년간은 연기하기에 참 좋은 환경이었거든요. 이 안정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느껴야 할 것 같아요(웃음). 낯선 곳에 가고도 싶고, 아무튼 색다른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빼어난 가창력이나 외모로 승부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지는 수수하고 평범함. 여배우로서 무기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요소가 맞물며 전미도 씨는 여배우 가운데 가장 넓은 범위의 캐릭터를 소화하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연악해 보이지만 강단 있고, 참한 듯하지만 아줌마 같은 모습이 있고, 성실하면서도 때론 제멋대로인 모습이 매력적이고요. 그래서 6년 만에 다시 라라의 옷을 입는 전미도 씨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더욱 기대되는데요. 뮤지컬 <닥터 지바고> 는 2월 27일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합니다. 그런데 설마 <닥터 지바고> 이후에 전미도 씨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건 아니겠죠? 이 인터뷰가 마지막이 될까 살짝 걱정되는 건 왜일까요(웃음)?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