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잘 들어와야 해
‘집안의 어른’은 단지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되지 않는다. 여성은 어른이 아니다. 특히 결혼 안 한 여자는 어른 취급을 못 받는다. 가장 어른으로 대접받는 여성은 바로 ‘아들의 엄마’다. ‘시어머니 되기’는 그렇게 발생한다.
글ㆍ사진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201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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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근, <상례소대상>, 1894년 이전

 

 

“남자애들은 늘 우리 여자애들보다 미래에 대해 더 자신만만해하죠. 그들은 자기들이 인생에서 되고자 하는 게 뭔지 아는 것 같았어요. 그에 반해 우리 여자애들에게는 미래가 애매해 보였어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결국 부엌과 침실로 귀착될 거라는 걸 아는 것만 같았어요. “

- 응구기 와 시옹오, 『피의 꽃잎들』 , 82쪽


김지하의 ‘오적’을 감명 깊게 읽고 그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았으며, 2016년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케냐의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 식민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그는 고국인 케냐에 돌아가지 못한 채 미국에 망명 중인 상태다. 그의 문학에서 지배와 착취의 구조는 섬세하게 드러난다. 식민주의에 저항했지만 해방 후 자신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 다시 낮은 계급을 착취하는 케냐인, 하느님을 팔아 민중의 저항을 잠재우고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성직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땅과 문화, 인간관계까지 빼앗기는 시골 사람들 등의 모습이 서로 얽혀있다.

 

『피의 꽃잎들』 의 주요 인물들 중 완자라는 젊은 여성은 특히 이 착취 구조의 한복판에 있다. 케냐의 흑인 여성으로 백인 유럽 남자부터 자국의 남성들에 이르기까지, 그는 식민주의와 성차별이 어떻게 자신을 복합적으로 ‘먹어치우는지’ 잘 안다. 그의 눈에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여성들은 ‘부엌과 침실’을 오가는 삶에 갇혀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은 “먹거나 먹히거나. 다른 사람을 먹고 살찌거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먹고 살찌거나.” (575쪽) 라는 결론을 내린다.


추석이 지났을 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아침부터 차례상 차리느라 옷도 제대로 못 갖춰입고 바빠 죽겠는데, 남자들은 느즈막하게 일어나 몸단장들 하더라.” 그는 어른들이 참 좋아하는, ‘요즘 저런 며느리가 어디 있냐’는 소리를 들으며 ‘효부’라는 칭찬을 듣는다. 결혼 초기에는 시집 밭에서 고구마 500개를 심은 적도 있다. 맏며느리의 도리를 잘 수행한다고 칭찬 듣지만 정작 그는 “이 세상에서 며느리는 시집 종이야!”를 외쳤다. 처음 인사온 ‘아들의 여자’가 일복을 가져와 갈아입고 부엌에 들어가 능숙하게 일하더라며 자신이 야무진 며느리를 ‘얻었다’고 자랑하던 여성이 생각났다. ‘딸의 남자’인 사위가 첫 인사를 오는 날 일복을 가져와 부엌에 들어가는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결혼 생활이 30년 이상 지난 여성들의 대화 속에는 가부장제의 복잡한 얼굴이 응축되어 있다. 이들은 때로 남편에 대한 환멸로 가득하여 ‘능력 있으면 혼자 살아’라는 말을 젊은 여성들에게 전하면서도, ‘아들의 여자’에게는 180도 다른 시선을 던진다. 되바라진 딸을 보며 내 딸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기 보다 저런 ‘요즘 여자들’ 때문에 순진하고 성실한 내 아들이 얼마나 뼛골 빠지게 고생할까 걱정한다. 이러한 모순은 가부장제 속에서 돌봄 노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가정의 대소사를 책임지며, 감정 노동으로 가족 구성원과 감정적으로 깊숙하게 얽히는 임무를 수행하는 여성들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 친족과 혈연관계 등 가까운 인간관계가 남성 중심으로 재배치 된다. 또한 물리적 장소도 남성 중심으로 이동한다. 인간관계와 물리적 장소가 이처럼 남성 위주로 배치되는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은 힘의 고리가 끊어진다. 나름의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집안이기에 이 집안에서의 각종 권력관계에 참여한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맏며느리는 손아래 동서들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집안일의 주도권을 여성에게 주는 척 하면서 남성들이 자행하는 책임 회피다. 이렇게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주로 악당의 역할을 맡긴다.


‘집안의 어른’은 단지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되지 않는다. 여성은 어른이 아니다. 특히 결혼 안 한 여자는 어른 취급을 못 받는다. 가장 어른으로 대접받는 여성은 바로 ‘아들의 엄마’다. ‘시어머니 되기’는 그렇게 발생한다. 가정에서의 위치와 별개로 자신의 일을 통해 사회적 위치를 가지는 남성들은 ‘시아버지 되기’에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둘 수 밖에 없다. 집안 문제를 여성들이 담당하니까 당연히 ‘갈등’의 당사자는 여성의 얼굴로 나타난다. 이를 두고 흔히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며 여성들에게 혀를 끌끌 찬다. ‘하여튼 여자들은’ 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고부갈등이라는 말은 매우 기만적이다. ‘자기들이 겪어놓고도 며느리에게 똑같이 한다’며 시어머니의 자리에 있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아들/남편의 목소리를 나는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 목소리를 던져서 자신은 아내의 고됨을 이해하는 좋은 남편이 될 지 모르지만, 결국은 며느리-시어머니 구도로 문제가 축소, 은폐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서 가장 멀찌감치 떨어진 인물은 주로 시아버지다. 아들은 제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속 끓이며 ‘등 터지는 새우’, 그야말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더불어 주인이 노예에게 내리는 포상처럼 명절 노동 후에 ‘따뜻한 말’이나 선물 등으로 좋은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어이가 없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은 증상만 드러내면서 그 증상을 유발하는 원인을 감추는 언어다. 한국의 명절은 휴식도 축제도 아니다. 남아선호악습과 가부장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이성애 중심주의가 농축된 고약한 이벤트다. 며느리 역할을 하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이혼한 사람, 나이 많은 독신, 아이 없는 기혼자, 때로는 아들 없는 기혼자들에게 예정된 피로가 규칙적으로 몰려오는 날이다. 이 ‘전통’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상태로 유지될 이유가 없다.


그래봐야 일년에 두 번 명절인데 그걸로 증후군이니 뭐니 한다며 ‘요즘 여자들’ 싸가지 없다고 한다. 게다가 일년에 두번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제사, 어버이날, 생일 및 각종 경조사 등 굵직굵직한 날만 꼽아도 며느리 역할을 요구받는 날이 일년에 두번은 아니다. 설사 일년에 두번이 아니라 평생에 두 번이라도 옳지 않은 일은 옳지 않은 일이다. 성차별을 기반으로 닦은 전통은 지켜야 하는 문화가 아니라 타파해야 할 폐습이다. 왜 여성을 이류 인간으로 취급하는 가부장제 이벤트에 참석해서 얼굴도 모르는 남성 중심의 조상을 위해 밥을 지어야 하나.


기대수명을 감안하면 약 50년의 결혼생활 중에 100번의 명절을 거친다. 결혼생활의 하반기는 ‘시어머니 되기’를 통해 집안에 새로 ‘들인 여자’에게 이 임무를 넘긴다. 엄마와 아내의 손이 움직이지 않으면 유지도 안 되는 가풍과 전통이 뭐 그리 자랑스러울까. 노동자를 ‘갈아넣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어도 여성의 노동을 갈아넣어 유지되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가부장제는 마치 고귀한 품위처럼 여긴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결혼 전과 후에 시차를 느낀다. 분명히 같은 시간대에 살지만 결혼과 함께 여성의 삶에 침투하는 시간대는 20년 전, 50년 전, 100년 전의 시간들이 다양하게 중첩된다. 이 시차를 공식적으로 느끼는 때가 바로 명절이다. 많은 여성들이 기름 냄새 자욱한 부엌에서 ‘시집의 종’임을 인식한다. 단지 허리가 아파서가 아니다. 명절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타임머신을 타고 온 세계 속에서 시차적응이 안 된다.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굴욕감을 주는 자리가 일년에 두 번씩이나 있다니!


 


 

 

피의 꽃잎들응구기 와 시옹오 저 | 민음사
자본주의와 부패한 권력자들에게 농락당하는 농민과 지식인의 처절한 삶을 기록하고, 식민 지배자였던 백인 세력과 야합하여 민중을 배신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기회주의자들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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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