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희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은 문학동네 카페에서 4 달 간 연재되었던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재는 책을 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감흥을 줄 것 같은데요. 연재하고 개고하면서 느끼셨던 소회가 궁금합니다.
소설 쓰기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 혼자 하는 작업입니다. 연재를 통해 소설을 좀더 객관화하는 기회를 가졌고 조금 더 거리를 두고 수정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균형을 잡는 것이 내 글을 위해 더 좋았는지는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전과 달리 독자들의 반응을 알아내고 만나고 책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즐겁습니다.
소설 속 공간 묘사가 눈에 띕니다. 주인공이 어렸을 적 살던 주택뿐 아니라 일본의 낯선 공간까지도요. 특별히 염두하고 쓰신 실제 장소가 있을까요?
소읍의 공간은 나의 고향이고 병원집은 그 질서 안에서 상상해낸 장소입니다. 들판집이 지어진 들판은 옛날엔 습지였던 땅이다. 그 곁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산 위엔 50기에 달하는 고대국가의 왕릉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최근에, 고향에서 일억 년 전 백악기의 거대 초식 공룡의 발바닥 화석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피부조직이 남아 있는 거대 화석은 세계 최초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고향의 넓은 들판에서 자랐는데 물의 기억을 가진 오래된 땅이어선지 언제나 자욱한 수증기에 감싸인 물렁한 몽환성과 환상성, 어떤 비현실적인 특성이 있었다던. 우리가 30억 년이나 된 오래된 땅에서 태어나 잠시의 현실에 섞여 들어 살고 죽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를 둘러싼 추상적인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의 공간은 2016년에 여행했던 일본의 동경과 우쓰노미야, 닛코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쓴 에치코유자와를 담았습니다.
작가님 소설 속 그녀들은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마녀 혹은 나쁜 여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요. 독자들도 실제로 그런 리뷰를 많이 남기는데요. 작가님은 ‘여자들’의 그런 ‘처지’를 의식하고 쓰시는 걸까요? 혹은 그것으로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으신지요?
당연히 의식하고 씁니다. 소설은 이야기라는 살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속에 묻혀 있지만, 고향에서 여자아이로서 밀쳐진 의식, 버림받은 의식, 내치워진 존재로서의 고아 의식이 이번 소설을 쓴 중심 동력입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여자아이는 다 자라기도 전에 태어난 집에서 내쳐져 일찌감치 다른 집 식구로 길들여지거나 행선지 없이 집을 떠나 눈 내리는 어두운 길을 걸으며 마녀로 불리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70년대 냉전 시대의 분단국가에서 행해진 이념 교육과 폭력적인 성장기도 도이와 상과 나애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히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도이가 사라진 자리에서 나애가 상실의 세계를 내면화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볼 때 비로소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구나 하며 깨닫는 존재와 기억들이 있습니다. 나애에게 도이와 상이 그랬던 것처럼요. 작가님이 고난을 겪을 때 힘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소개해주세요.
이 소설은 내 속의 불가사한 빛에 대한 사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거듭해서 또다시 나를 소생시키는 불굴의 빛의 근원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도이와 같은 존재는 나에게도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심연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순수한 빛과 아름다움,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를 매혹시킨 존재입니다.
최초의 타인인 도이를 통해서 나애가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느끼고 자신의 있음을 인식하며 다시 태어납니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도이를 잃은 뒤에도 자신의 등불을 들고 현실과 상실이 순환하는 사잇길로 빛을 따라 나아간다는 소설 라인은 나의 내면 구도에서 나온 겁니다. 내게 힘이 되어준 것은, 이 삶의 욕망과 상처를 아름다움과 슬픔으로 바꾸는 순환 구조와 빛을 따라가는 추구에 있다. 이것은 비전이지만 순환 구조로 볼 때, 동시에 기억이기도 합니다.
ⓒ이천희
작가님의 소설을 읽다 보면 가슴 아플 정도로 아릿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 슬픔을 안겨주시는 작가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소설은 혹독한 것입니다. 소설이란 세상에 상처를 입히는 작업입니다. 소설은 그 전체로 기존 세상을 찢고 나가는 칼날입니다. 소설은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소설을 쓰는 일은 아픕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이미 작가가 고통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무미건조할 정도로 감정과 감각의 바깥에 있어야 할 겁니다. 대체로 작가들은 이 두 극단에 있습니다. 내게 소설은 세상을 찢고 나가려는 힘과 현재를 보관하려는 강박입니다. 삶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헤밍웨이의 노인이 끌고 항구에 도착한 거대한 청새치 같은 앙상한 연대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연대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삶의 바다 속에서 녹아버리는 소금과 같은 감정, 감각, 생의 살점…… 내게는 간직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절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써온 겁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기억할 수 없다면, 단지 삶을 유지하는 신진대사만을 하는 존재라면 삶은 누구의 것인가요?
오랜 시간 작품활동을 하시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써오셨는 데요. 써보고 싶던 이야기 중 아직 못 쓰신 이야기가 있을까요?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는 것이어서 시간이 다가오고 내가 나아가는 사이에서 생겨날 겁니다. 이십삼 년 동안 스무 권의 단행본 책을 냈습니다. 그것이 소설이든 무엇이든, 이젠 나 자신이 글을 쓰는 구조를 내장한 존재라고 믿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산 시간이 문장으로 바뀝니다. 아직 못 쓴 소설은 아직 살지 못한 삶과 같은 말입니다. 막연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어떤 사건의 내면을 소설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올해 보셨던 책 중 가장 인상깊었던 책을 세 권 정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1. 『백일 년 동안의 여행』 (바버라 포스터/마이클 포스터, 엄우흠 옮김, 향연)
2. 『넛셸』 (이언 매큐언, 민승남 옮김, 문학동네)
3. 『플로베르의 앵무새』 (줄리언 반스, 신재실 옮김, 동연)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에서 작가가 문장을 뽑아낸다면 무엇일까요?
‘방과 몇 개의 사물에 기대어 살듯, 사람은 고독에 기대어 자신의 삶에 정착한다. 그렇게도 완전한 자신만의 질서가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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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전경린 저 | 문학동네
휘몰아치는 서사나 스펙터클한 사건 없이 한 인물의 유년과 성장, 그 반추를 함께하는 감정선을 따라가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나를 만들어가고 또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로이 깨달을 수 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gloomysun
2018.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