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가게에 가면 그곳을 꾸려 가는 사람이 보인다. 인기 가요 대신 보사노바나 월드 뮤직이 흘러나오고, 패션 잡지 대신 개인의 독서 취향이 드러나는 책들이 꽂혀 있는 미용실. 나는 그래서 장싸롱이 좋다. 주인의 취향과 애정이 살뜰히 담긴 작은 가게가 좋다.
내가 읽어 본 책만 파는 서점. 서점을 연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지키고 싶었다. 손님에게 직접 책의 재미를 전하려면 역시 내가 읽어 본 책이라야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월세를 최소화하기 위해 작은 규모의 공간을 구해야 한다는 제약이 생겼다.
“약국 같은 서점은 어때요?” 5-6평 정도의 작은 공간에서 내가 읽어 본 책만 파는 서점을 열고 싶다고 고민 상담을 했을 때 직장 상사이지만 마음이 잘 맞는 친구이기도 한 땡스북스 최혜영 점장님이 제안했다. 약국의 조제실과 접수처처럼 공간이 절반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창구 안쪽은 내가 읽은 책으로 둘러싸인 서가이고, 창구 바깥에서는 내가 권하고 싶은 책을 엄선해서 판매하는 방식이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일반 서점에서는 손님이 직접 책을 고르고 도움이 필요할 때 서점원을 찾는다. 반대로 약국형 서점은 방문하는 모든 손님이 서점원과 대화를 나누고 책을 구입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거다!’ 하는 생각으로 그날부터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던 와중에 행복 지수 1위 국가인 덴마크의 행복 비결을 취재한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읽고 주치의 제도를 알게 되었다. 덴마크 시민 모두에게는 담당 주치의가 정해져 있는데, 보통 주치의는 한 동네에 자리를 잡으면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오래 사귄 동네 친구나 다름없다고 한다. 건강과 인생을 보살피는 동네 주치의인 셈이다. ‘덴마크의 동네 주치의처럼 우리에게도 오래 사귄 독서 주치의가 있다면 어떨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베스트셀러나 유명 대학의 권장 도서 대신 나의 관심과 취향에 맞는 책을 처방하고 책으로 삶을 풍요롭게 꾸려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그런 독서 주치의가 있다면, 힘든 일을 겪었을 땐 마음을 토닥이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건네고, 어떤 작가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어서 읽어 보면 좋을 책을 권해 주는 그런 독서 주치의가 있다면 말이다. 약국형 서점에서 시작한 아이디어는 덴마크 주치의 제도에서 구체화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의 독서 차트를 관리하고 맞춤형 책을 처방하는 서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책을 처방하는 서점 ‘북파마씨’book pharmacy의 시작이었다.
서점원으로 일하는 것도 좋았지만, 직장에서 독립해서 내 일을 해 보자고 결심했던 건 ‘나답게’, ‘즐겁게’, ‘지속가능하게’ 일하고 싶어서였다. 예약제 운영 방식은 그 세 가지 기준을 충족시키는 가장 확실한 해답이었다.
책 처방 아이디어를 덴마크 주치의 제도에서 얻었다면, 예약제 방식에 대한 힌트는 내가 이용하는 1인 미용실 ‘장싸롱’에서 얻었다. 1인 미용실은 말 그대로 한 번에 한 명의 손님만 받는 미용실이다. 100퍼센트 예약제이기 때문에 미용사는 대기하는 다른 손님에게 신경 쓸 필요 없이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할 수 있고, 손님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자신이 원하는 머리 길이나 모양을 상담할 수 있다. 장싸롱 언니는 내가 머리 만지기 귀찮아하는 걸 알고 드라이나 왁스 없이도 자연스러운 머리 모양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잘라 준다. 여기에 최소한의 관리, 사소하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잊지 않는다. 나와 취향이 잘 맞아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나 영화, 얼마 전에 다녀온 여행, 고민거리를 편하게 나눌 수 있다는 것도 매달 장싸롱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장싸롱에 정착하기 전까지 나는 마음에 드는 미용실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생활을 해야 했다. 굉장히 사소해 보이지만 나를 따라다니던 고민거리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굉장히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잘 통하는 단골 가게를 갖고 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삶의 질을 높여 주는 일이었다.
나는 구식이다. 나는 반드시 주치의와 치과의사와 단골 미용사가 있어야 하고, 믿을 만한 서점도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나의 아름다운 책방』 중에서
한 사람만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1인 미용실처럼 1인 서점을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손님의 이야기에 충분히 귀 기울이고, 손님에게 맞는 책을 고르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오로지 한 명의 손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한 사람을 위한 서점’이라는 콘셉트가 완성됐다.
사실 예약제 방식을 선택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서점에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서점이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불특정한 사람들이 불특정한 시간에 불쑥 찾아온다는 건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큰일이었다. 때로는 책과 서점에 관심이 많은 손님이, 때로는 용무가 있어서 방문한 거래처 직원이, 때로는 친한 친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갖고 약속 없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밀린 업무를 보고 있건, 밥을 먹고 있건, 컨디션이 좋지 않건, 나는 언제나 밝은 얼굴로 그들을 맞이해야 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나도 서점에 근무한 지 만 3년이 되어갈 때쯤엔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났다. 손님이 무례하게 굴어도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웃으며 응대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나는데 겉으로는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이러다 내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혼란스러운 날도 있었다. 더욱더 예약제 서점을 고집하게 된 이유다. 사전에 약속한 사람만 만나면 되고, 다른 일이 생기거나 쉬고 싶을 땐 예약을 받지 않으면 되니까. 나의 일정과 컨디션에 맞춰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제 명실공히 공인이 되었다. 물론 면담 시간이나 집무 시간은 따로 없으며 미리 면담 신청을 할 필요도 없는 공인이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서점에 있으며 누구나 와서 내게 말을 할 수 있다. 심지어 점심시간도 상관없다. 다른 곳에 가 있더라도 서점 직원들은 내게 전화를 걸어 누군가가 찾는다고 전했다. 서점은 과거에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나 기쁨의 인사를 나누는 곳이기도 했다. 자기가 누구인지 내가 금방 알아채지 못하면 그들은 당황해했다. 학창 시절의 친구, 대학 때 다른 과 친구들, 헤어졌던 옛 연인, 이제는 사춘기가 지나버린 아들의 유치원 시절에 친하게 지낸 이들 등이 그들이다.
『어느 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 중에서
“어떻게 이런 방식의 서점을 열 생각을 했어요?” 서점을 열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서점’이라는 기본 틀에서 내가 가장 자신 있고 좋아하는 일을 더하고, 반대로 내가 하기 싫고 부담스러운 일을 빼서 만든 것이 사적인서점이다. 나 역시 사적인서점을 열기 전까지는 직업이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일자리라고 생각했다. 취직을 하든 창업을 하든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틀에 나를 넣는 일이라고 말이다. 사적인서점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직업은 내가 만들기 나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님과 대화를 나누며 책의 재미를 직접 전하는 일을 하고 싶었기에 일반 서점에 일대일 상담이라는 방식을 더했고, 열린 공간에서 다수의 사람을 만나는 일이 힘들었기에 서점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조건을 빼고 예약제 방식을 택했다. 사적인서점은 한 사람을 위한 맞춤 서점인 동시에 나를 위한 맞춤 직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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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오연호 저 | 오마이북
행복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적 가치인 6개의 키워드를 발견하고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다.
정지혜(사적인서점 대표)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동글
2017.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