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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만 시간 동안 노력과 경험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93년 미국 콜로라도 대학의 심리학자 앤더슨 에릭슨이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와 아마추어 연주자 사이의 실력차이는 연주 연습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데 그게 약 1만 시간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처음 소개되었다.
이를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비틀즈를 꼽았다. 1964년 한 장의 앨범을 내면서 단박에 역사에 길인 남을 밴드가 되었지만 사실은 그 전에 하루 12시간씩 공연을 하던 수련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런 훌륭한 음악과 팀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틀즈는 데뷔 전에 1960년부터 독일 함부르크의 클럽에서 오랫 동안 연주 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성실하고 목표 지향적이었기 때문에 이 수련의 1만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 시간을 흘러가게 한 힘은 ‘술’이었다. 당시 손님들은 연주자들에게 무대위로 응원을 하는 마음으로 술을 보내주는 관례가 있었다고 한다. 비틀즈 멤버들은 올라오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고, 덕분에 언제나 취한 상태로 연주를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들은 하루에 적게는 8시간, 길게는 10시간에서 12시간씩 쉬는 날도 없이 몇 년간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대해서 존 레논은 “연주하고 술 마시고, 아가씨들과 놀고, 잠을 잘 시간이 있었겠어요?”라고 회고했다. 1만 시간의 긴 터널을 지나와 세계적 뮤지션이 되는데 술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세계적 뮤지션들과 술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술은 긴장을 풀어주고, 논리에서 해방을 시켜주며, 자유를 주는 기능을 갖는다. 뮤지션들은 술과 함께 자유를 타고 어떤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 일반인은 만들어 낼 수 없는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한다. 그러니 어떤 뮤지션이 어느 종류의 술을 좋아했고, 그에 얽힌 음악 뒷얘기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좋아하는 그 음악과 연관된 딱 어울리는 술이 있다면 멋질 것 같고 술과 음악의 조화가 새로운 이미지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궁금증을 풀어줄 재미있는 책이 한 권 등장했다. 조승원의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이다. 조승원은 현재 MBC 기자이며 국가공인 주류 자격증인 조주 기능사를 취득한 자칭 미주가(美酒家)다. 여기에 팝과 락 음악을 깊이 들어온 음악애호가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해외 팝스타들의 음악과 그들이 사랑한 술 이야기를 버무려서 책을 펴낸 것이다.
일단 현직 기자가 쓴 책이라 그런지 저널리즘적 자료 수집을 통해 펼쳐내는 정보의 양이 압도적이다. 국내의 다른 책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정보가 많은데, 저자는 1년을 꼬박 바쳐서 해외 서적을 구매하고, 잡지와 신문을 뒤져서 자료를 조사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전의 책들에서는 본 적 없는 새로운 뒷얘기들이 많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뮤지션으로 영국의 오아시스를 소개한다. 오아시스는 노엘과 리암 갤러거 두 명의 형제가 이끌었는데, 두 사람 모두 소문난 주당에 한 번 취하면 끝을 봐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둘은 각자 사고를 치기도 하고, 또 둘이 함께 마시고 싸우다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2000년 월드 투어 중에 바르셀로나에서 공연 당일 드러머가 손을 다쳐 공연 취소가 되었고, 대기실에서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한 술은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동생 리암이 문득 형에게 “내 조카 아나이스 있잖아, 형 친딸 맞아?”라며 전 부인의 외도를 의심하는 말을 던졌고, 이는 곧 난투극으로 발전했다. 이는 노엘의 ‘투어 중단’선언과 함께 팀을 두 달간 떠나게 만들었다. 이렇게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이 내놓은
27살에 요절한 재니스 조플린도 항상 술에 취한 채 살았다. 50도나 되는 독주 서던 컴포트를 사랑했는데 언제나 그 술병을 들고 다니고, 공연을 할 때마다 마셔서 대중들도 서던 컴포트하면 재니스 조플린을 연상할 정도였다. 걸어다니는 광고판과 같은 역할을 하다 보니 술 제조사에서 그녀에게 값비싼 모피코트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하기는 했지만 워낙 항상 술에 취해있어서 사람들은 그녀가 마약을 하고 있는 걸 알아차리기 힘들었다고 까지 한다.
그녀가 부른 노래 중에도 술과 관련된 것이 여럿 있는데 ‘What Good Can Drinkin’ Do?’라는 곡을 한 번 살펴 보자.
술 마시면 좋은 게 대체 뭐야?
밤새 술 마셨는데도 다음 날이 오니 여전히 우울한 걸
탁자에는 술잔이 있어, 사람들은 이걸 마시면 내 고통이
좀 줄어들 것이라고 했지
하지만 다 마셔봐도 다음 날이 되면 난 그냥 똑같아
위스키를 주렴, 버번을 주렴, 진을 주렴
술을 그렇게 마셨지만 공허한 마음은 달랠 길이 없고, 술이 깨고 나면 밀려오는 우울한 감정은 다시 술에 손이 가게 하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은 골을 경험한 재니스 조플린은 그 마음의 깊이를 음악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일반인에게 과도한 음주는 몸과 마음을 좀먹고 황폐화시키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들 뮤지션들에게는 치명적 유혹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이 책에는 이들 외에도 밥 딜런, 이글스, 미카, 오지 오스본, 제이지, 레이디 가가등이 등장한다. 스팅이 와인을 사랑하다 못해 결국 와이너리를 소유하는 수준까지 되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이런 술과 얽힌 뮤지션들의 삶과 소소하고 재미있는 뒷얘기뿐 아니라, 관련된 술에 대한 역사와 정보도 이 책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밀주 위스키와 관련한 곡을 쓴 밥 딜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밀주를 ‘문샤이너(moonshiner)’라고 하는데 유래는 이렇다. 18세기 후반 스코틀랜드에서 술에 과한 세금을 매기자 농부와 증류업자들은 산골짜기로 숨어들어가 몰래 술을 만들었는데, 랜턴도 없던 시절이라 오로지 달빛(moonshine)에 의지해서 밤에 증류 작업을 했다. 그래서 문샤인은 밀주위스키를, 문샤이너는 위스키 생산업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언뜻 이름은 낭만적인 듯 하나 사실은 국가의 세금과 이를 피하려는 사람들의 대응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술과 음악이 이렇게 좋은 궁합일 줄은 몰랐다. 저렇게 극한까지 가는 술독에 빠져야 세계적 뮤지션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사양하고 싶지만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색다른 창작물이 나오려면 달라도 확실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평소 팝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술 한 잔 마시면서 빨리 취하기만을 바라기보다 술의 유래와 정보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권으로 두 개의 목적을 모두 달성할 수 있는 효율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을 읽을 때와 달리 많이 바빴다. 유튜브를 검색해서 소개된 곡을 찾아 듣고, 마시고 싶은 칵테일과 위스키가 있으면 잊지 말고 다음에 술집에 가면 주문해 마시기 위해서 휴대폰에 메모를 하면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집어 든 독자들도 이런 우아한 탐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