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초록빛 물이 보이는 ‘그 연못가’에 접어들자 마키노는 엇나가는 마음과 불안 때문에 기타 케이스를 잡은 손을 몇 번이나 움켜쥐었다. 주위를 두루 살펴보며 걸어갔다. 연못을 따라 완만하게 굽어든 보도를 빠져나왔을 때 시선 끝 나무 그늘에 벤치 하나가 보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오후의 햇살이 시간을 때우려는 것처럼 연못 수면에서 장난치는 것을 눈부신 듯 바라보던 한 여자가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마티네의 끝에서』, 484쪽)
지난 5월 23일, 김연수 작가와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의 북콘서트가 열렸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마티네의 끝에서』와 『쇼팽을 즐기다』 출간을 기념한 이날 행사에는 김연수 작가가 대담자로, 문학평론가 허희가 진행을, 기타리스트 지욱이 축하공연을 하며 비 내리는 봄밤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상을 수상한 『마티네의 끝에서』는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일본에서 15만 부가 넘게 팔리며 작품성과 문학성을 모두 획득했다. 천재 클래식 기타리스트 마키노와 저널리스트 요코, 두 ‘어른’의 사랑 이야기로 음악에 관한 섬세한 이야기 또한 즐길거리. 첫 무대를 꾸민 기타리스트 지욱의 연주 역시 이런 소설 내용과 잘 어울리는 구성이었다.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는 먼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 독자들에게 반가운 선물을 주었다. 이어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운 추억이 되었으면 합니다.”라며 소박한 인사를 건넸다.
때가 되어야 보이는 것들
허희: 두 분의 인연이 꽤 깊다고 들었습니다. 김연수 작가님은 오늘 북콘서트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김연수: 인연이 꽤 깊어요. 예전에 제가 행사 사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팬들이 사인을 받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웃음) 지켜본 적이 있었죠. 그때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요. 그 후로 기회가 되면 쭉 만나고 있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 한국에서 책을 출판하면서 종종 서울에 오게 되는데요. 그때 관계자 분들이 항상 하셨던 말씀이 대담을 한다면 한국에는 김연수 작가뿐이다, 반드시 김연수 작가와 대담을 해야 한다, 였습니다. 김연수 작가님을 만나기 전부터 수수께끼 같은 이분과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실제로 만나니 이야기도 잘 통하고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에 김연수 작가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와 『원더보이』가 번역 출판되어 읽어봤어요. 책을 읽기 전에도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더 감동스러웠습니다.
허희: 『마티네의 끝에서』가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김연수 작가님이 완독하셨다고 해요.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김연수: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님의 책이 굉장히 많습니다. 『일식』부터 이번 『마티네의 끝에서』까지 읽어보면 아주 긴 여정 같은 느낌이 납니다. 『마티네의 끝에서』는 어제 받았는데요. 사실 당황했어요. 두꺼워서요.(웃음) 하루 만에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요. 걱정과 달리 금방 다 읽어버렸습니다. 굉장히 몰입해서 읽었어요. 아스라한 사랑이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드실 거예요. 저도 그랬어요.
히라노 게이치로: 데뷔 때부터 쭉 돌이켜보면 작품이 굉장히 많이 변했습니다. 십 년, 이십 년에 걸쳐 생각을 하면 그제야 보이는 문제들이 있고, 그때가 돼야 알게 되는 해결책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렇게까지 오래 활동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굉장히 기쁜 일이고요. 김연수 작가님과 젊은 시절부터 알아온 관계인 만큼 김연수 작가님 또한 이렇게 오래 활동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제게 굉장한 위로가 됩니다.
허희: 이 작품이 사랑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들의 직업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클래식 기타리스트 마키노가 주인공인 만큼 음악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많이 나오고요. 세계 각국의 치열한 현장을 뛰어다니는 저널리스트 요코의 입을 통해 이천 년 대 여러 세계사적 사건들을 보게 돼요.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사랑과 일이 비등한 균형점을 잡고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히라노 게이치로: 현대를 무대로 한 음악 테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악기를 다룰지 고민했는데요.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악기를 다루려면 오케스트라가 등장해야 하고, 그러면 제가 쓰려는 이야기를 못 다룰 것 같았어요. 그러던 차에 후쿠다 신이치라는 클래식 기타리스트의 CD를 듣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감동을 받았고 클래식 기타를 등장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허희: 김연수 작가님도 음악에 관련된 탐구 등을 생각해보셨을 것 같은데요.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님이 천착하는 음악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김연수: 저도 이런 식의 아티스트를 등장시키는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은 있는데요. 아직까지 쓰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와 다른 부분에 접근하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어서요. 그러나 음악은 저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도 음악을 찾아 듣고, 소설에 나온 사람들을 검색해봤어요. 후쿠다 신이치도 나오거든요. 그분의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 좀 더 실감이 나실 것 같고요. 음악가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오는데요. 뭐랄까, 아는 사람에 대해 쓰는 건가 생각할 정도로 너무나 실감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워낙 음악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요. 역시 본인의 관심사를 잘 살려서 좋은 소설을 쓰신 것 같습니다.
허희: 『마티네의 끝에서』의 사랑에 대한 김연수 작가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김연수: 책을 읽기 전에는 ‘지금 옆에 있는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님이 왜 했을까 싶었어요. 의문은 책을 읽으며 많이 해소가 되었죠. 일하는 사람들의 사랑에 답이 있어요. 오해가 아니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되게 많잖아요. 20대에는 그게 납득이 안 되는데요. 30대, 40대가 되면 정말 선의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어긋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선의와 선의가 부딪치게 되면 누군가의 선의는 무시당할 수 있잖아요. 이 작품을 처음에는 순애보인 줄 알고 읽었는데 결국 인간의 어떤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마키노는 이 대화를 계속하고 싶었다.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음악이 바로 그런 것이죠. 처음에 제시되는 주제의 행방을 마지막까지 지켜봤을 때, 되돌아본 그곳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가. 베토벤의 일기에는 ‘지난밤의 모든 것을 끝까지 지켜볼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한 문장이 있죠.(중략)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마티네의 끝에서』, 35-36쪽)
허희: 『마티네의 끝에서』는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님의 다른 사랑에 관한 소설과 어떤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나요?
히라노 게이치로: 먼저 김연수 작가님의 소설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거든요. 일본에서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있어요. 특히 「달로 간 코미디언」이라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굉장히 섬세하셔서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쓰시면 정말 잘 쓰실 것 같아요. 인물들이 무척 매력이 있거든요. 등장인물이 정말 매력적이지 않으면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 갖기 힘들죠. 『마티네의 끝에서』의 주인공은 40대 남녀입니다. 어른이 된 그들의 매력을 생각해보면 연애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각자가 종사하고 있는 일을 잘 해나가는 면이 정말 매력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 사정에 의해 어긋남이 발생하지만 그것을 극복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세계관까지 표현하고자 했고, 그것을 많은 독자 분들이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허희: 『쇼팽을 즐기다』 소개도 부탁드립니다.
히라노 게이치로: 『장송』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2010년은 쇼팽 탄생 150년이 되는 해였어요. 그것을 기념한 다양한 이벤트가 일본에서 많이 열렸는데요. 한 잡지에서 연재 제안을 주셨어요. 사실 『장송』을 쓰기 위해 많은 취재를 했었고, 취재 노트도 남아 있고, 많은 자료가 있었습니다. 소설에 다 담지 못한 것들을 써보자는 생각에 일 년에 걸쳐 연재를 했죠.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이 책을 들고 파리를 가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허희: 김연수 작가님도 혹시 소설 창작노트를 바탕으로 에세이를 써보겠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김연수: 지금까지는 없었는데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 때문에 취재한 것이 많아요. 과거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것을 가지고 다른 책을 내볼까 생각 중이에요. 아마 나가사키 관광 안내서가 될 가능성이 많은데요.(웃음) 나가사키 지역을 취재한 내용들은 소설에 직접 쓸 수는 없는 것들이어서 말이죠. 지인이 제게 나가사키 홍보대사를 해도 좋겠다고 할 정도로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허희: 프롤로그에 나오는 ‘나’는 누구일까 궁금해집니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그들 삶의 궤적에는 화려함과 적막함이 번갈아 나타난다. 환희와 비애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영혼의 호응에는 요즘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그러면서도 요즘과는 다른 시대에서는 결코 찾지 못할, 이렇게 말해도 무방하다면,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딱하게 여겼고 때로는 약간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한편으로는 동경심을 품었다.(『마티네의 끝에서』, 8-9쪽)
히라노 게이치로: 소설가의 일은 허구 세계를 만드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독자의 일은 해석의 자유를 갖는 일이고요. 많은 분들이 여기 등장하는 ‘나’라는 사람이 작가인 저 자신이라고 생각하시기도 해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죠. 어쨌든 저는 독해의 가능성에 한정을 두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고 싶습니다.
독자가 묻고, 작가가 답하다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님은 현대 사회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꾸준히 성찰하고, 써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소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 한 명의 독자인 제게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면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십 대 때에는 토마스 만, 미시마 유키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했는데요. 만약 이들의 작품이 없었다면 어떻게 십 대를 보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소설이 아니면 해소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몇몇 등장인물은 실제로 현실에서 만난 사람보다 훨씬 더 공감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거든요.
소설가가 된 이후에는 살아간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가를 파악하고 그것을 독자와 공유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아름다운 연애 이야기를 쓸 때에도 지금 이 세계,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독자분들과 공감해야 해요. 그러지 못하면 제대로 된 이야기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거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대립과 분단이 항상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가 싶어요.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소설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서로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서 소설로 다뤄보고 싶은 사건들이 있으신가요?
김연수: 써보고 싶은 것은 지진 체험 같은 거예요. 몇 번 느껴보기는 했지만 지진을 본격적으로 느껴보진 못했단 말이죠. 그런데 재작년에 잠시 있다가 온 곳이 지진피해를 입었어요. 정말 좋은 곳이었거든요. 평화롭고요. 들판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지진은 상상만 했던 감각인데,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지역이 바뀌어버리는 거죠.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고요. 그 감각을 그때 어렴풋하게나마 느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회가 닿으면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조금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잖아요.
히라노 게이치로: 지금은 전 세계 각국을 봐도 굉장한 내셔널리즘이 만연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정치와 관련해 비판하는 글을 많이 쓰고 있는데요. 동아시아 역사, 근대 이후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면 일본의 한국 침략을 비롯해 아주 어두운 역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어두운 면을 좀 더 써야하지 않을까 하고요. 한편 역사를 더 거슬러 한국과 중국, 일본이 아름다운 시기를 보냈던 시기도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일본에는 한국이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아름다운 건물이나 찻잔 등이 많잖아요. 근현대의 역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시기와 그 관계를 그리는 것도 소설가의 일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소설이 만들어지는지 두 작가님께 직접 듣고 싶습니다.
김연수: 소설은 자기의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게 많습니다. 그때 저의 기본적인 태도는 제가 이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예요. 특히 주인공의 경우 사실상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서 하나씩 만들어가요. 눈을 그리고, 코를 그리고, 지웠다가 다시 그리는 식이죠. 그렇게 해서 진짜 없던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고요. 없던 사람이 모습을 갖추고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희열이 굉장히 큽니다. 취재했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모아 만든 것이겠지만 현재에는 완전히 없는 사람이죠. 이 사람을 독자가 읽고 나름대로 상상한 모습에 대해 듣는 것도 굉장히 좋고요. 소설에 여러 정의가 있지만 저는 소설이란 한마디로 정의하면 ‘어떤 사람에 대해서 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 소설을 읽을 때 독자의 자세는 소설의 세계에 어느 정도 빠져드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소설가가 등장인물을 너무 자세히 설명하면 독자는 그것만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독자가 될 거예요. 그러나 적당하게 공백을 둔다면, 채워야 할 구멍을 만들어둔다면 독자는 자신들의 경험을 반영해 읽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한 권의 책을 모두 읽었을 때 독자에 따라 각기 다른 추억이 섞여 각자에 맞는, 모두 다른 소설이 또다시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이 영화화되었을 때 별로 만족하지 못하시는 이유도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는 독자가 완벽히 제 소설에 빠져들길 바랐는데 요즘은 독자의 생각과 제 작품이 적당히 섞여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