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전을 하려고 은행에 갔을 때의 일이다. 원화를 10유로와 20유로짜리로 적당히 바꿔달라고 부탁했더니 창구 담당 직원이 계산기를 탁탁 두드리며 물었다. “유럽 여행 가시나 봐요.” (탁탁) “네.” (탁탁) “어디 가시는데요?” (탁탁) 이때까지만 해도 그분의 자세는 ‘당신이 어디에 가는지 딱히 궁금하다기보다 어디까지나 고객 응대 차원에서 묻는 겁니다’에 가까웠다. 물론 대놓고 그와 같은 업무 메뉴얼적 표정으로 물은 것은 아니지만 제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한편, 환전하러 오는 고객들마다 응당 이런 걸 물어봐주는 감정노동을 하려면 저분도 나름대로 귀찮겠구나 싶어서 나도 “프랑스요” 하고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녀는 “아, 프랑스, 좋죠” 하고 맞장구를 치더니 뜬금없이 “몽마르뜨 언덕에서 사진 꼭 찍으세요” 하며 웃었다. 나도 “네, 그럴게요” 하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쯤에서 그쳤어도 괜찮았을 법한데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프랑스만 가세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멀뚱멀뚱 쳐다보자 “비행기로 그렇게 멀리 가시면 다들 주변에 다른 나라도 둘러보고 오시던데”라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 거다. 나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잠시 망설였지만 그렇게까지 물어보는데 가만히 있으면 ‘비싼 비행기값 내고 고생고생 날아가 고작 프랑스만 덜렁 보고 돌아올 한심한 놈’ 취급을 받을 것 같아 “행사에 초대받아 가는 거라서요”라고 별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해 주었다.
몽마르뜨 언덕.
그랬더니 이제까지의 업무 메뉴얼적 표정과 달리 비로소 약간 궁금해졌다는 얼굴로 “무슨 행사요?” 하는 물음이 돌아왔다. 내가 “거기, 그, 도서전에요”라고 대답하자 “무슨 도서전이요?” 하고 아까보다 한층 더 궁금해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빠리 도서전이라고……”까지 얘기했을 때, 그녀는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던 마술사의 검은 모자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비둘기를 발견한 듯한 모습으로 그렇잖아도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계산을 위해 움직이던 손을 멈춤과 동시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상체도 약간 앞으로 내밀더니,
“에에? 작가세요?”
하고 (아마도) 진심으로 화알짝 웃으며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표현은 그분께 실례일 수 있지만 그 몸짓이 어찌나 귀여우시던지 하마터면 “에헴, 네, 실은 제가 작가……”라고 대답할 뻔했다. 마음속으로는 삼 초가량 ‘아아 그동안 열심히 써서 지금쯤 작가가 돼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도 어쩔 수 없이 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당신을 웃게 할 수 있다면 나도 작가할래’적 상황인데 왜 이런 얘기를 꺼냈냐면 오늘 소개할 남자가 바로 그와 같은 상황과 맞닥뜨리는 바람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버드와 캠브리지에서는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마이클 르윈은 아내가 건네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읽으며 탐정소설에 입문했고 그때 받은 영감을 토대로 순전히 어머니와 아내를 위해 작가가 됐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 아내와 엄마가 웃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그 단편은 마침내 첫 번째 앨버트 샘슨 시리즈인 『인디애나 블루스』로 완성되었다. 두 사람이 웃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딸 리즈는 분명 웃었다. 내가 앨버트를 낳았을 때 리즈는 두 살이었다.” 실제로 르윈은 자상하고 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가 낳은 탐정 앨버트 샘슨 또한 작가의 심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데 그 특징을 대충 살펴볼짝시면-,
1) 술을 즐기지 않는다
2) 술 맛보다는 커피 맛에 더 까다로움
3) 커피보다는 오렌지 주스를 더 좋아하고
4) 담배는 일절 피우지 않는다
5) 하물며 마약 따위야 더더욱 사절
6) 탐정 주제에 권총을 무서워한다
7) 대신이라고 할지 책을 엄청 좋아함
8) 시원한 백화점에서 책 읽는 걸 선호
9) <율리시즈>부터 <법률과 가사>까지 닥치는 대로 읽음
10) 시간만 났다 하면 읽음
11) 여성관은 순수할 정도로 올곧다
12) 미인에게 유혹받아도 깨끗하게 거절
13) 오직 한 사람(“내 여자”)만을 마음에 두고 있는 순정파
14) 여성에 대한 태도처럼 스포츠도 오직 농구만을 사랑하지만 모든 스포츠에 관해 박식하다
즉, 마이클 르윈과 앨버트 샘슨이라는 인간은 그야말로 성실함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바른생활 사나이들인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소설에는 ‘시체’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하드보일드 소설에서는 이례적인 일인데 왜냐면 “사립탐정이 사람을 찾다가 시체를 발견한 후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간다는 것이 상식적인 구성이기 때문”이다. 시체도 없는 마당에 그렇다면 대관절 샘슨은 뭘 하느냐. 혈액형에 관한 수수께끼를 쫓거나 도주한 남녀를 돕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거나, 병원에 입원한 면회 금지 환자의 사정을 조사하거나, 은행가 부인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보는 등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들을 하는 데 열을 올린다.
재미있게도 탐정으로서의 이러한 자세가 미야베 미유키에게 상당히 어필한 듯하다. 스물일곱 살에 데뷔하여 30년 동안 추리소설을 쓰며 일본에서 백만 부 단위로 책을 팔아치우는 그녀가 지금껏 만들어낸 유일한 탐정 캐릭터는 『누군가』, 『이름 없는 독』,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 등장하는 스기무라 사부로, 딱 한 명뿐이다. 그리고 스기무라의 탄생에 혁혁한 영향을 끼친 이가 바로 앨버트 샘슨이라는 것을 나도 작년에야 알게 되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얘기를 들어보자.
“저는 ‘앨버트 샘슨’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에요. 시리즈를 전부 읽고 났더니 샘슨 같은 탐정을 만들어 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스기무라 사부로가 탄생했어요. 샘슨의 매력은, 일단 멋있지 않다는 거예요(웃음). 힘도 세지 않고요. 수수께끼의 미녀가 등장하지도 않아요. 탐정 소설에 흔히 나오는 멋진 대사를 읊조리지도 않죠. 하지만 다정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그런 점들이 무척 좋았어요.”
미야베 미유키
『인디애나 블루스』의 속편 『침묵의 세일즈맨』에서는 탐정 샘슨이 자신의 조수가 된 (샘슨의) 딸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인터뷰에 따르면 지난 달 출간된 최신작에서 마침내 탐정으로 데뷔한 스기무라 사부로도 앞으로 나올 어떤 작품에서는 딸과 함께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딸과 함께 듀엣으로 나오는 아빠 탐정은 어째 한국 정서에 별로 안 맞겠다고 여기면 할 수 없지만 관심 있는 형제자매님들은 두 시리즈를 비교해 가며 읽어도 좋을 듯하다.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미남이고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책을 만든다. 가끔 이런저런 매체에 잡문을 기고하거나 라디오에서 책을 소개하거나 출판 강의를 해서 번 돈으로 겨우 먹고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