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한 장면
지난 연휴에 두 개의 히어로 물을 보았다. 하나는 할리우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다른 하나는 한국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다. 두 영화를 비교하거나 품평할 생각은 없다. ‘무간도를 시작하며’에서 말한 대로 나는 영화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두 영화가 ‘우리’보다 ‘나’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자유로운 만큼 책임질 수 있다’는 쪽이라면 아이언 맨은 ‘책임지는 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입장이다. 둘 다 그 이유를 마스크 뒤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경험에서 찾는다.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는 전작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조직의 악마성에 데었고 아이언 맨, 토니 스타크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자기 이성의 악마성에 데었다.
<탐정 홍길동>은 양쪽에 모두 해당한다. 사교(邪敎) 조직 ‘광은회’에 어머니를 잃었고, 두려움을 지각할 수 있는 좌뇌 해마가 손상됐다. 마음이 사라진 빈 공간에 무자비함만 남은 그는 소시오패스(sociopath 반사회적 인격 장애)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그의 첫 대사 “귀찮아. 귀찮아 죽겠네. 귀찮아서 죽을 수도 있을까”는 인상적이다. 귀찮아서 죽을 수도 있지만 귀찮아서 죽일 수도 있다. 어머니를 죽인 원수 김병덕을 죽이려고 찾아간 그의 앞엔 김병덕이 없다. 김병덕의 손녀 동이와 말순이만 남아 있다. 두 어린 소녀는 홍길동의 귀찮음을 배가시킨다. 홍길동이 껌 딱지처럼 달라붙은 아이들을 데리고 김병덕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지난하기만 하다.
“우리도 같이 가면 안 돼요?”
“협조하려고 그러는 건데.”
“아저씨가 우리 할아버지 찾아준다면서요?”
“이 아저씨 이상한 거 같아.”
“아저씨 진짜 뭐 하시는 분이에요?”
“뭐라는 거야?”
여덟 살 말순이의 끝없는 조잘거림은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포인트에 머물지 않는다. 홍길동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다. ‘복수’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살아온 그는 두 소녀와의 만남을 통해 귀찮음을 귀찮아하지 않게 된다.
귀찮음을 귀찮아하지 않는다고? 이를테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귀찮음을 잊어가는 과정이다. 그/그녀를 기다려야 하고, 나의 식욕과 관계없이 그/그녀와 같이 밥을 먹어야 하고, 그/그녀에게 줄 선물을 골라야 한다. 그 뿐인가. 그/그녀를 기쁘게 해줄 문구를 고민해 문자와 카톡을 보내야 하고, 그/그녀가 보낸 문자와 카톡에 성실히 답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그녀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야 한다. 지극히 귀찮은 일들이다. 하지만 용하게도 우리는 그 일들을 즐겁게 해낸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우리가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일상의 힘이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홍길동에겐 일상이 없었다. 사실 일상이란 성가신 일 투성이다.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머리를 빗고, 양말을 신고, 셔츠와 바지를 입고, 외투를 걸친다. “오늘 늦어?” “오늘 별 일 없었어?” 바쁜 출근길, 피곤한 퇴근길에 가족과 말을 주고받고, 식탁에 밥과 반찬을 놓고, 설거지를 하고, 이부자리를 편다. 신기한 건 그토록 귀찮은 일상이 우리에게 치유하는 힘,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사실이다.
일상은 말순이의 누런 콧물처럼 지질하고 비루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의 콧물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추상이 아닌 일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달라지지 않는 한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일상이 빠진 개혁이나 혁명, 정의는 가짜다. 어쩌면 우리가 지는 것은 일상에서 실패하기 때문이다. 일상은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만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 또한 일상이다.
홍길동은 아이들과 말을 섞고, 자장면과 서비스 탕수육을 먹고, 소녀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간다. ‘나’가 없는 삶을 살던 홍길동은 그 과정을 거쳐 나를 찾아가고, 나를 넘어 우리로 나아간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홍길동은 선언한다. “난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다.” 그는 그 이유를 “내가 진짜 누군지, 내 적이 누군지 전부 알게 됐다”는 데서 찾는다. 나는 그가 일상의 힘으로 내면을 회복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영화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도시인들의 일상 없는 삶이 보인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정신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다. 보고하고, 보고받고, 지시하고, 지시 받다 보면 금세 해가 진다. 야근과 회식으로 ‘저녁이 있는 삶’은 눈물겨운 꿈일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한해, 두 해를 보내고 나면 나만의 일상은 사라지고 텅 빈 자아만 남는다. 가면(假面) 속에 진짜 내 얼굴은 없다. ‘일상이 없다’는 건 ‘내면이 없다’는 뜻이다.
마왕 신해철의 노래가 <복면가왕> 음악대장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일상으로의 초대’는 말한다. 당신의 일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바쁘다는 이유로 일상의 중요함을 잊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라고.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과 가치들을 당신의 일상 속으로 초대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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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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