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수다를 좋아한다. 커피 한 잔 놓고 떠드는 수다, 때론 울고 웃는 수다는 지루하고 팍팍한 일상에 아름다운 색깔을 입혀 준다. 이런 수다를 통해 세상을 발견하고 여성의 삶을 사랑하게 된 수녀가 있다.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 교수 박정은 수녀는 20여 년 동안 여성들을 위한 피정 ‘지혜의 원’에서 사연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왔다. 동그랗게 모여 앉은 이들이 부끄러웠던 이야기를 꺼내고 함께 맞장구치며 귀기울일 때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본 그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이야기와 성장에 대한 책 『사려 깊은 수다』를 펴냈다.
지혜의 원(The Circle of Wisdom)은 제가 시애틀에서 석사과정 프로젝트로 시도한 여성영성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 고민하던 때 였어요. 저는 한국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여성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여성들에게서 건강한 정신을 만나기도 했고, 화려하게 보이는 여성들에게서 말 못할 깊은 아픔을 만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함께 모여서 말씀을 읽고 생각을 나눌 때, 평범하게만 보이던 그분들이 지닌 깊은 영성에 놀라기도 하고 또 감동하기도 했지요. 미국에서 영성학을 공부하면서 좋은 것들을 많이 배웠는데, 이런 것들을 한국의 여성들과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사회는 개인주의 문화라서 영성 또한 개인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가 처음 만났던, 자갈치 시장 아주머니들과의 모임의 역동을 기본으로 해서 영성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재현해 본 것이 ‘지혜의 원’입니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도, 말을 잘하는 것도, 경제적인 능력도 아닙니다. 그저 여성으로서의 삶을 함께하는 마음입니다. 함께 한 자리에 모여서 지친 마음과 삶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힘을 받고, 또 다시 내가 갈 길을 생각해 보는 그런 자매애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책에서 소개하신 여성 모임을 구성하는 내용들이 다채롭습니다. 지혜의 원 모임을 만들어 가면서 주요한 영향을 받은 사람이나 책, 경험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여성 모임을 위해 제안한 작업은 미국의 영성 프로그램에서 보고 배운 후 제가 우리 식으로 바꾼 것도 있고, 프로그램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도 있습니다. 특히 몸 작업은 제가 춤 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을 기초로 하여 자매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만들게 된 것이고, 예술 작업은 시애틀에서 했던 30일 여성 피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하는 많은 작업들은 제 영성의 근간이 된, 이냐시오 기도 방식에서 온 것입니다. 지혜의 원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전입니다. 특히 그물을 짜고, 그 그물을 자르는 예전은,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해 본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함께 나눈 경험을 마무리하는 지혜의 그물을 짜고 또 그 그물을 해체하면서 마치는 이 작업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띄게 되었습니다. 18년 동안 이 작업을 하면서 이 시간은 언제나 가장 감동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경험을 책으로 펴내면서 무엇이 가장 영향을 주었나 생각해 보면, 여성영성을 가르쳐준 은사들과 영적지도자들이 많이 계시지만, 역시 함께 나눈 자매들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눈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부서진 마음에 깃든 신의 연민을 깊이 만났던 것 같습니다.
피정을 20여 년간 해오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제가 이 피정을 기획했을 때는, 한국의 자매들과 이 피정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삶은 제가 계획하는 대로 되지는 않더군요. 여성에게 힘을 북돋워 줄 수 있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있었지만, 이러한 희망은 제가 몸 담고 있었던 한국 수도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저는 공동체에서 제명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날개가 꺾인 채 수도회 없는 수도자로 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지혜의 원’ 이란 프로그램은 그저 석사 학위에 필요한 과정 정도로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버클리 지역의 한국인 2세 여성들이 이 피정을 함께하고 싶다고 요청해 왔습니다. 이민자로서의 겪는 아픈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공동체 없이 수도생활을 하며 아픔과 소외를 느꼈던 제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소속감 없이 힘들었던 제게 자매들과 하나가 되는 이 공간은 깊은 소속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제가 걷는, 조금은 다른 제 인생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제가 피정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매로서 저의 부서진 마음과 그들의 아픈 마음이 만나는, 자매애(sisterhood)를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바빠도 일년에 최소한 한 번은 이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의 모임은 영양가 없는 수다로 피곤하기만 하다고, 혼자 조용히 지내는 게 낫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꼭 ‘모여서’ 대화하는 일이 필요한 이유가 있을까요?
실제로 여자들의 모임은 때로 그저 영양가 없는 수다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자리에 갔다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기도 합니다. 또 격의 없이 나눈 이야기들이 소문이 되어서 자신에게 되돌아 오면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함께 모여서 대화하는 일이 구원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고립된 여성들은 자기의 경험, 특히 부정적인 체험을 지나치게 개인의 수치스러운 일(privatization)로 치부하고 그 경험에 함몰되어 더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수치심으로 남고, 수치심은 그 사람을 부자유하게 합니다. 이는 한국인의 심성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겪은 일을 통해, 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내가 겪은 일을 해석해 내는 힘을 얻게 됩니다. 무엇보다 내가 겪은 고통들이 사회 구조에서 오는 것임을 알게 될 때, 수치를 벗는 개인적인 치유를 넘어, 사회를 함께 바꾸고 생명을 주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힘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성장 과정을 초승달-보름달-그믐달의 주기로, 소녀에서 여신으로 가는 여정으로 설명하신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중년을 맞이하는 여성들이 아름답게 ‘그믐달 시기’를 준비할 수 있을까요?
그믐달 시기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점은 그 아름다움이 세상, 특히 남성중심적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적이고 영성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지식이 가장 기본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자기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앎’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자기 영혼의 어둠에 익숙하고 편안해지는 성숙한 아름다움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찰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 삶의 경험은 나를 어떤 사람이 되어가게 했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깊은 기도, 관상은 결국 자신을 잘 관찰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길어낸 경험들을 잘 들으면 내가 가고 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쯤인지를 가늠하게 됩니다. 특히 갱년기를 지내는 여성의 경우, 다른 여성들과 신체적, 심리적 변화에 대해서 함께 나누면 여유 있게 자기 삶을 바라보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여성들의 모임이 생기기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지혜의 원’ 같은 모임을 꾸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실제적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여성들의 모임이 많이 생긴다면 정말 저는 행복할 겁니다. 제가 이 모임을 통해 힘을 받고 또 위안을 받았던 것처럼, 다른 여성들도 그랬으면 하니까요. 공동체성은 사실 한국 여성 안에 깊이 있는 것이어서 별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나눔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임이 그저 수다로 끝나지 않기 위한 실제적인 조언을 드린다면, 첫째, 형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냥 아무 이야기나 두서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배려해서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주어진 시간 내에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여성들은,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면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도 불쑥 끼어듭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지치게 됩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시간과 주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이 모임의 이름인 ‘지혜의 원’이 의미하는 대로,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힘과 품위를 가집니다. 교육 정도나 사회적 지위가 그 사람의 발언을 더 영향력 있거나 힘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들을 함께 나누는 자리입니다. 자기가 가진 타이틀에서 오는 부담에서 벗어버리고, 또 못 가진 지위에 대한 열등감을 벗어버리고 한 사람의 인격으로 만나 삶의 의미를 함께 찾아가는 자리라는 것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임을 하고 싶은 여성들이 함께 모여 지혜의 원을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의 경험으로 더욱 풍부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사순 기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한 적이 있는데, 거기 많은 사람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도 같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죽인 사람을 용서하시고 십자가에서 먼저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도 하나 하나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왔습니다. 결국 저만 용서를 못 하고 혼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때 “너는 아직도 못 내려왔니? 이제 그만 그 수치를 벗고 내려와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처럼 다른 많은 여성들도, 죄의식과 아픔이 수치심 때문에 더 큰 상처가 되어 그 안에 함몰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자매들과 함께 가난에 대한 상처,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상처, 자라면서 가정에서 받은 상처, 그 무엇이 되었든 아픔을 나누면서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해 당당하게 함께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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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은 수다박정은 저 | 옐로브릭
청바지를 입은 수녀님, 사연 많은 여자들의 ‘듣는 귀’가 되어준 수녀님. 재미 신학자 박정은이 20년 간 여성 피정 ‘지혜의 원’을 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여성의 연대와 성장에 대한 통찰을 묶어낸 책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목소리와 이름이 희미해져 버린 여성들이 자기를 발견하고 지나온 인생을 평온하게 바라보며 충만한 지혜로 성장하도록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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