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텍스트가 오랜만에 다시 찾아왔다. 2007년 <이상한 계절> 이후로 뜸하던 활동이 선공개 싱글들을 통해 가닥을 잡더니 이렇게 8년 만에 해후를 한다. 헛된 것,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라는 재의 속성에 기억과 순간이라는 대상을 대입해서 앨범을 짰다. 거기에 2인조 편성을 버리고 다섯 명의 밴드 형태를 취함으로써 긴 공백만큼이나 두드러지는 전작과의 차별성을 꾀했다. 실로 돌아온 탕아를 맞이하는 듯한 기분이다.
<재의 기술>은 기존의 못이 가지고 있던 특징을 곳곳에 새겨두고 있다. 첫 번째는 직관성이다. 리드보컬 이이언은 못의 디스코그래피에서뿐만 아니라 본인의 솔로 앨범에서도 기존 대중음악이 가진 작법을 해체하고 변형시키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의 방법이 사뭇 직관적이라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그 방법이란 일반적인 대중음악이 취하지 않는 박자를 택한다거나(3박뿐만 아니라 7박 11박까지 그 범위는 넓고 다양하다) 템포를 급변시키는 것이다. 귀에 확 뜨이는 전자 사운드를 차용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에서는 콘트라베이스같은 아날로그 악기까지 도입한다. 듣는 처지에서 굳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차이를 모를 수 없다. 미묘한 화성이나 편성의 변화가 아니라 음악의 기본에 대놓고 손을 댐으로써 밴드 자체가 독특한 직관의 틀을 가지고 간다.
두 번째는 못 특유의 비감이다. 이들이 비감을 조성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장치가 멜로디인데 특이하게도 이것이 곡의 메시지와 분위기를 제시하는 역할까지 겸한다. <재의 기술>의 가사를 따로 읽어보면 분명 절망과 상실 혹은 무기력 등으로 상징되는 애절함의 정서가 있다. 그럼에도 특별한 부연 설명 없이는 그 대상이나 제재가 다소 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이이언 스스로가 가사를 써 나아감에서 사건 중심의 서술보다는 화자의 감정을 기초로 하여 서술한다는 느낌이 강한 것이다. 예컨대 다수의 노래가 ‘헛됨’ ‘부끄러움’ ‘절망’ ‘위로’ ‘아픔’ 등의 단어를 사용할 뿐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가장 구체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듯한 「지난 일요일을 위한 발라드」에서도 몇 가지 분절적인 행동을 나열함으로써 분위기를 유추하게 할 뿐이다.
결국 못이 가장 효과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은 멜로디이다. 못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헛되었어」를 시작하는 이이언의 목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그 분위기를 파악하고 감정에 몰입할 수 있다. 가사를 통해 모호한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것을 전적으로 듣는 이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재의 기술>의 수록곡들은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히 매혹적인 선율을 가지고 있다. 가령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에서 비장함을 심어주는 것은 「먹구름」이라는 소재가 아니라 두터워진 공간감을 선보이는 후렴구 멜로디와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끊어 내뱉은 이이언의 노래이다. 박자를 마음껏 변용하고 불안정하게 흩트려놓은 구성에서도 대중적인 캐치를 놓치지 않는 것은 지금 보아도 놀라운 못의 특기다.
못의 정규 앨범 사이 이이언의 솔로 앨범들을 보면 그는 ‘전자음악 장인’이라는 칭호답게 전자음에 천착하기도 하고 그 형태를 고스란히 어쿠스틱 편성 위에 올려놓는 실험을 하기도 한다. 덕분에 신보에서 밴드 사운드를 받아들이는 것에 커다란 이물감은 없다. 다만 이런저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못의 작법에 커다란 변화가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그들답게 좋은 멜로디를 썼고 좋은 가사를 썼다. 그럼에도 <재의 기술>은 기다림에 목말라했을 팬들에게 충분히 좋은 답례다. 아이러니하게도 슬픔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가 또 다른 슬픔 혹은 절망인 경우가 많다. 그만큼 나의 감정에 타인이 동기화하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는 의미이다. 못은, 또 이와 비슷한 동종의 음악가들은 그 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여전히 아프고 슬픈 우리는 그 절망에 감응하고 몸부림치며 한동안 또 버텨낼 동력을 얻었다.
2016/03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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