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빼고 테이크아웃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러브라인이 없는 드라마들은 종종 웰메이드나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연애가 스토리텔링에서의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버금가는, 로맨스 엑스 마키나라고 부른다.
글ㆍ사진 이진송
201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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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시그널>의 홍원동 연쇄살인 사건 편의 스포일러와 함께 시작한다. 나중에 몰아보려고 아껴둔 분이라면 한 문단 밑으로 내려가서 읽으시길. 박해영(이제훈 분)은 얼굴을 보지 않고 뒤에서 목 졸라 죽인 점, 시신을 이불로 따뜻하게 싸놓은 점 등을 근거로 피해자에 대한 살인자의 심리 변화를 추측하고, 이것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연쇄살인마 김진우(이상엽 분)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호의를 보인 사람인 유승연(서은아 분)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자신의 감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녀를 살해한 것이다. 그 후 김진우는 살인할 수 없는 몸이 되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강아지를 꼭 안은 채 <시그널>을 보던 나는 작게 탄식했다. 아, 로맨스가 드문 드라마라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젊은 남녀가 등장하고, 심경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감정은 결국 로맨스다. 로맨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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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tvN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 이야기는 영원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드라마, 영화, 예능 등의 콘텐츠가 무엇을 소재로 삼든, “어차피 우승은 로맨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맨스가 이긴다. 의학 드라마에서는 병원에서 연애를 하고, 타임워프물에서는 시간을 달려서 연애하고, 수사물에서는 수사하다가 연애하고, 사극에서는 말 타고 연애하고, 예능에서는 러브라인이 빠지지 않는다. 장르 자체가 멜로나 로맨스 코미디가 아니어도 연애는 일단 아무 데나 뿌리고 보는 치즈처럼 얹힌다. 치즈를 올리면 치즈 맛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므로 결국 ‘존맛’으로 귀결되듯 연애 역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어떤 명작이든 연애가 끼면 그때부터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랑 얼레리 꼴레리 했느냐이다. 혹은 누구랑 누구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핑크인지 그린 라이트인지의 여부. 가족극을 표방하고 나왔지만 <응답하라 1988>의 중심추는 남편 찾기에 기울어져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늘 그랬다. 흥행 콘텐츠의 무수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좋은 작품’이라고 선뜻 말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누가 누구와 결혼했는지 추리하는데 몰두하다 로맨스가 너무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는 붕괴하고, 서브 남주는 납작해져서 ‘승리한 로맨스(결혼)’의 전리품이 되었고, 작품은 균형을 잃고 뒤뚱거렸으며 종내에는 개성을 잃었다.

 

드물게 (노골적인) 러브 라인이 부재했던 드라마 <미생>은 방영 내내 유일한 여성 인물인 안영이(강소라 분)가 누구와 ‘썸’을 탈지, 안영이에 대한 동료들의 감정이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 단순한 동료애인지 물고 늘어지는 기사와 추측을 몰고 다녔다. <미생>의 성공 직후 ‘기승전 러브라인’에 대한 피로도를 호소하는 시청자나, 이러한 도식을 반성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글쎄, 여전히 ‘연애 빼고 테이크아웃’은 가뭄에 콩 나듯 듬성듬성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러브라인이 없는 드라마들은 종종 웰메이드나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연애가 스토리텔링에서의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버금가는, 로맨스 엑스 마키나라고 부른다. 꼬여버린 갈등 관계나 서사에서 뜬금없는 러브라인이 등장해서 모든 것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해결해버리는, 받아라 러브러브 빔―! 뭐, 이런 느낌?

 

러브 라인은 흥미를 유발하고, 갈등을 형성하거나 해결하는 가장 편리한 방식이다. 러브 라인이 없으면 당연히 갈등의 원인이나 양상, 해결을 다른 방면에서 모색해야 하는데, 이는 매우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간다. 고향의 맛 다시* 한 스푼이면 해결되는 맛을 다른 방식으로 충족하려면 여러 가지의 다른 재료와 정성껏 우려내는 정성이 필요하듯이. 러브 라인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웰메이드는 아니지만, 러브 라인이 없으면 드라마 전체가 촘촘하고 견고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인물의 동기나 욕망, 행위의 당위성이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면서 다양하고 입체적인 전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우호적인 관계를 상상해보자. 이들의 감정이 연애일 때와 비-연애일 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많은 경우 젊은 남녀는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나오는 순간 강제 러브 라인 익스프레스를 타기 때문에, 이들을 그러한 도식에 가두지 않으려면 창작자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거꾸로 말하면, 러브 라인은 가장 손쉽게 명명하고 배치할 수 있는 관계로 ‘안전빵’이다. 이쯤 돼서 여러분의 머리를 스치는 몇몇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안전빵’, 이 난데없는 러브라인이 말아먹은 무수한 드라마들 말이다. 별 하나에…(모자이크 처리), 별 하나에…(음성변조), 별 하나에…(심의 규정 준수), 아아, 로맨스, 로맨스! 모카에 휘핑크림을 빼는 선택의 어려움처럼, 연애의 달콤함은 포기하기 어려운가보다. (이때 ‘달콤함’은 연애 자체의 달달한 속성만이 아니라 스토리 전개의 간편함을 포함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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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삼시 세끼>의 한 장면

 

이는 비단 드라마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능에서도 러브 라인의 치명적인 유혹은 건재하다. 손쉽게 화제를 생산하고 웃음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 공동체를 표방한 예능 <룸메이트>를 견인한 것은 아이돌 그룹 카라와 갓세븐의 멤버인 영지와 잭슨의 러브 라인이었고, 천덕꾸러기인 냉장고 속 식재료의 화려한 반란을 표방하는 요리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는 툭하면 냉장고 속에서 이성의 흔적, 연애의 낌새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된다. <삼시 세끼―농촌편>은 밥 해먹는 프로그램인 줄 알았는데 20대 여자 게스트는 옥택연과, 이서진과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 게스트는 이서진과 엮여 프로그램 속 우결을 찍기 일쑤다. 이성끼리 조금만 사이가 좋으면 순식간에 자막이나 편집이 이들을 핑크빛 구렁텅이로 닭 몰듯 몰아가니 어린아이나 동물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는 이 그물의 코가 더 촘촘해져 남성 간의 친밀한 관계까지 포획한다. 아니 ‘러브 라인’은 이성 간에만 가능한 거 아니었나? 방심하지 마시라, 최근 남발되는 ‘브로맨스’라는 게 있다. 너네 그렇게 사이좋게 서 있으면 저기 있는 브로맨스 아저씨가 사귀어라(짝) 사귀어라(짝) 한다! TV 캐스트에서는 아예 대놓고 <꽃미남 브로맨스>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취지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연예계 남남 절친들을 발굴, 그들이 나누는 속마음과 허심탄회한 우정 스토리를 통해 화려한 연예인들의 이면 속에 숨겨진 진솔함을 들여다보는 프로그램”(네이버 인터넷 프로그램 정보)이라는데…우정이라면서요? 저기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로맨스라는 단어는 뭐죠? 연애는 배고픈 가오나시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친밀한 관계와 특별한 감정이 다른 가능성을 모두 버리고 연애 앞에 ‘헤쳐 모여’ 하면, 결국 ‘기승전 연애’만 남는다. 

 

연애가 없으면 팔리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이는 기승전연애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익숙하고 편한 방식에 안주한 결과에 가깝다. 우리의 삶과 세계는 연애 말고도 다양하고 풍부한 것들, 이를테면 ‘연애가 아닌’ 관계, ‘연애 감정이 아닌’ 감정, ‘치정 싸움이 아닌’ 싸움, ‘고백이 아닌’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세계를 핍진하게 그려내는 것만이 창작물의 미덕은 아니다. 그럴 거면 다큐멘터리를 보지 뭐하러 영화나 드라마, 예능을 보겠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요리를 하겠다고 나섰으면, 양푼에 모든 재료를 넣고 쓱쓱 비빈 후 모든 맛과 향을 지워버리는 강력한 한 방울을 떨어뜨리지는 말아야지. 연애여도 좋지만, 연애일 수밖에 없거나 연애이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국은 가능성과 상상력의 문제이다. 연애가 아니어도 좋은, 연애가 없어도 재미있는, 연애 감정이 아니어도 동기가 될 수 있는, 그런 무수한 비-연애를 찾아 오늘도 나는 리모컨을 잡고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채널 사이를 헤엄친다. 꼬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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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