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국가 밀레투스
그리스에 기원전 8세기 무렵이 되면 많은 땅을 가진 귀족들이 등장한다. 그리스는 한반도처럼 산이 많은 지역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땅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귀족들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쉬운 언덕이나 산 위에 도시를 세웠다. ‘높은 곳에 있는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아크로폴리스Acropolis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기존의 땅을 독차지하자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살기 좋은 땅을 찾아서 그곳에 도시국가를 세웠다.
그 이후 기원전 5세기쯤 되면 도시국가는 그리스 본토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이오니아 해, 에게 해의 여러 섬들과 해안, 멀리는 지금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의 해안에도 세워졌다. 해외의 도시국가는 주로 바다 인근 건설되었는데 당시 배가 주요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밀레투스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흐름에 따라 소아시아의 한 귀퉁이에 자기의 이름을 딴 밀레투스라는 도시국가를 세웠다. 도시국가라고 해도 비교적 큰 규모를 가진 것도 있었지만 작은 마을 공동체의 형태를 가진 것들도 있었다.
도시국가 밀레투스는 지리적으로 큰 이점이 있는 곳에 세워졌다. 밀레투스는 지금의 터키 남쪽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중계무역을 하기에 좋은 입지였다. 오늘날에도 아테네에서 로도스 섬을 거쳐 밀레투스로 향하는 배가 운행된다.
당시 최고의 힘을 가진 것은 소아시아 동쪽에 있는 페르시아제국이었다. 그리고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중간 지점에 밀레투스가 자리했다. 밀레투스는 이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서 중계무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움켜쥐었다. 밀레투스 항구에는 수많은 사람과 배 들이 드나들었고 진귀한 물건들로 넘쳐났다.
금강산 구경도 배가 부른 다음의 일이라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밀레투스의 주민들은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양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난 것도 교역을 통해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에 막대한 부가 축적되었기 때문이고, 중국의 송나라가 국력에 비해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 것도 교역을 통한 비약적인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밀레투스에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물질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세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이른바 철학의 시작이었다. 주지하듯 인류는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동물적 차원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로 도약했다. 그리고 그 논리적인 사고의 힘의 토대가 된 것이 철학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서양철학이 태동한 곳은 도시국가 밀레투스였다. 그리고 그 육중한 문을 열어젖힌 사람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탈레스Thales였다. 탈레스는 세상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탈레스는 그리스어로 ‘아르케Arche’라고 부르는 본질과 근원에 대해 물음을 가진 첫 번째 사람이다. 아르케는 그리스어로 ‘처음’이라는 뜻이지만 철학에서는 ‘원리’로 번역한다.
탈레스가 하늘의 별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걷다가 구덩이에 빠져 하녀에게 먼 곳보다 가까운 곳을 잘 모른다는 핀잔을 들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러나 탈레스가 추구했던 논리적인 생각이 지닌 힘을 잘 보여주는 일화도 여럿 있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국가를 건설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진취적이고 모험 정신이 강했다. 그들은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그들이 보기에 신기하고 놀라운 건축물 가운데 일곱 가지를 꼽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렀다. 그 가운데 단연 압도적인 것은 이집트의 대大피라미드였다.
그러나 아무도 피라미드의 높이를 알지 못했다. 워낙 거대한 규모라서 높이를 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탈레스는 멀찍이 떨어져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해냈다. 정오가 되면 본체와 그림자의 크기가 같아진다는 원리를 통해 간단하게 높이를 알아낸 것이다. 논리적인 사고가 지닌 힘이고 철학의 출발이었다.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높이를 잰 탈레스에게 감탄했지만 여전히 그가 세상의 원리나 이치에만 관심을 갖고 결혼이나 경제생활 같은 현실에 서투르다고 비웃었다. 처음에 웃고 넘기던 탈레스는 생각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돈벌이에 나섰다.
탈레스는 하늘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날씨가 좋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리스의 특산물인 올리브가 풍년이 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올리브를 짜는 압축기를 싼값에 모두 사들였다. 사람들은 올리브를 짤 때도 아닌데 압축기를 산다고 놀렸다. 탈레스는 자기의 생각을 믿고 아랑곳하지 않고 창고에 압축기를 모아두었다.
다음 해에 정말로 올리브는 대풍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올리브를 짜려고 했지만 압축기가 없었다. 압축기를 가진 사람은 탈레스뿐이었다. 사람들은 많은 돈을 주고 탈레스에게 압축기를 빌려야 했고 탈레스는 순식간에 큰 부자가 되었다. 매점매석이나 독점이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생각의 힘을 증명하기에는 효과적이었다. 그 이후 생각에 빠져 있는 탈레스를 비웃는 사람은 없어졌다.
탈레스가 하늘에서 발견한 것은 또 있었다. 밤하늘에서 작은곰자리를 발견해서 항해를 하면서 방향을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탈레스는 오랜 생각 끝에 세상을 이루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 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몸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이 물이고 물이 빠져나간 바위나 나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관찰한 끝에 나온 생각이었다. 탈레스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습기를 가지고 있다. 작은 씨앗도 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탈레스는 물이 우주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훗날 아에 티우스Flavius A?tius, 서로마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게르만의 침입을 막고 노예 반란을 진압하는 등 쇠퇴하는 제국을 위해 끝까지 분투했다라는 사람은 ‘성스러운 힘은 물이라는 요소에 존재하는데 이것이 곧 운동의 계기를 이룬다’라고 탈레스의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탈레스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살았던 노자도 물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상선약수上善若水’가 그것이다. 풀이하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세상의 이치 또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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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덕
한양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그 후 한양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아시아 문화, 종교 문화, 신화와 축제 등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신화 읽어주는 남자》, 《역사와 문화로 보는 일본기행》, 《신화, 우리 시대의 거울》, 《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 《하룻밤에 읽는 그리스신화》 등이 있다. 주요 번역서로는 《고민하는 힘》, 《주술의 사상》, 《일본인은 한국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