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찬 겨울, 독방에 신문지만한 햇볕이 비뚜름히 들어왔다가 나갑니다.
하루 두 시간, 그 햇볕을 무릎에 얹고 책을 봤을 때의 행복감.
그 감정 때문에 그는 무기수의 삶을 견뎠다고 합니다.
신영복 선생 얘긴데요.
다산의 유배지 초당에도
수인번호 9번 청주교도소 김대중의 책상 위에도
총살당할 당시 체 게바라의 녹색가방에도 책이 들어있었다고 하죠.
“문학은 더 큰 삶, 다시 말해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 주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이건 수전 손택의 고백입니다.
프랑스어로 책(Libre)이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엔
‘자유롭다’ 혹은 ‘~로부터 풀려나다’란 뜻이 있다고 해요.
영어로 자유를 뜻하는 ‘리버티’, 그리고 도서관을 의미하는 ‘라이브러리’
역시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인 거죠.
불교에선 인생을 고해, 고통의 바다라고 한다지만요.
몸을 얻어 산다는 것, 나날의 생활이라는 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유리감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주민번호를 수인번호로 단 삶의 무기수인 셈이지요.
그런 우리 곁에도 다시 책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입니다.
'책에 대한 동경과 찬사'를 담은 다이 시지에의 데뷔작
1) 책 소개
000년 『소설 속으로 사라진 여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다이 시지에의 첫 장편소설이 재출간되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 중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농촌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간 두 소년과, 농촌에서 만난 바느질하는 소녀와의 낭만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 영화로 만들어져 2002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2003년 『D 콤플렉스』로 페미나상을 수상한 다이 시지에는, 프랑스에서 영화감독과 소설가로 활동 중인 중국 태생의 작가. 중국인의 정체성 문제를 특유의 해학과 유머로 그려내며 주목 받아왔다. 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직접 문화대혁명을 겪은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 지식인들은 모두 농촌으로 보내져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던 시절, 부르주아계급 의사를 부모로 둔 두 소년이 첩첩산골로 보내진다. 이들의 재교육이란 것은 소위 똥지게를 지고 나르거나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일. 그러던 어느 날 이들에게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금지된 서양문학과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바느질하는 소녀와의 첫사랑이다.
마오쩌둥의 '붉은 어록' 이외에는 거의 모든 책이 금서로 통했던 때, 소년들은 발자크와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스탕달,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 등의 작품들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된다. 바느질 소녀 역시 두 소년이 읽어준 발자크의 소설에 매료된다.
작가 다이 시지에는 섬세하고 위트 있는 문체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준 서양의 스승들 발자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에게 찬사를 표한다.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책이 인생이 바꿀 수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세대의 '책에 대한 동경과 찬사'를 담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2) 저자 : 다이 시지에
1954년 중국 푸젠성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년간 쓰촨성에서 ‘재교육’을 받는 고초를 겪었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 1984년 국비장학금을 받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영화 학교를 졸업했다. 2000년 첫 장편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로 큰 성공을 거두며 데뷔했고, 2003년 『D의 콤플렉스』로 페미나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며 <중국, 나의 고통> <소재봉> <식물학자의 말> 등 여러 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는 2002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 121-122회 <책, 임자를 만나다> 도서
인체 재활용
메리 로치 저/권루시안 역 | 세계사
다음 ‘책, 임자를 만나다'시간 역시 특집으로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문학 분야의 김중혁 작가가 전하는 비문학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죠. 김중혁 작가가 직접 들고 온 비문학 작품은 메리 로치 작가의 <인체재활용>입니다. 저널리스트인 메리 로치가 '시체'의 재활용에 관해 취재한 결과물을 모은 책인데요. 저자의 독특한 필체와 분위기로 전달되는 이 책, 김중혁 작가의 말솜씨로 또 한 번 재활용 되는 시간을 함께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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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다이 시지에 저/이원희 역 | 현대문학
직접 문화대혁명을 겪은 작가는 중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개인의 문제로 끌어들여 유쾌하고 흥미롭게 전개한다. 작가가 스스로 말했듯이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세대의 '책에 대한 동경과 찬사'를 담은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동진
어찌어찌 하다보니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십 수년간 했고,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영화평론가’로 불리게 됐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한 번도 꿈꾸진 않았던 ‘영화 전문가’가 됐고, 글쓰기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글쟁이’가 됐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꿈을 지탱할 만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삶에서 꿈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되물으며 변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