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이카
베토벤의 3번 교향곡은 <영웅(Eroica)>이다. 이 교향곡은 처음에는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영감을 받아 '나폴레옹 보나바르트'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에 실망한 나머지 '영웅(Eroica)'으로 다시 고쳤다는 일화가 있다. 스탕탈의『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엥에게도 나폴레옹은 영웅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 같은 군인이 되고 싶었다. 군인은 영웅에 대한 찬양인 동시에 그가 출세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의 출세욕은 사제가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그가 군인(적색)에서 사제(흑색)이라는 옷만 바꿔 입는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라틴어로 성경 전체를 암송할 수 재미있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그가 재미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놀라운 기억력 때문이었다. 가난한 제재소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의 운명은 집안의 수입이 될 육체노동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육체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몸매였다. 무엇보다도 조용할 때는 깊은 생각과 열정을 나타내 보이다가도 성난 순간에는 사나운 표정으로 이글거리는 커다란 검은 눈은 그의 사색적인 태도에 한몫했다. 비록 아버지로터 밥값을 못하는 책 버러지라고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는 책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단단한 열정을 지녔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영혼을 단련시켰으며 행복과 위안을 동시에 얻었다.
어린 아이
그는 자기 삶을 혁명할 만큼 대단한 자존심을 지녔다. 만약에 자존심을 잘 다스린다면 영웅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받게 되면 바보가 되고 마는 성격이었다. 부유층의 가정교사를 하면서 비로소 그가 출세하고자 하는 계획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부유층 그들만의 생각을 경멸하면서도 성직자로써 출세하고자 하는 그의 격정은 어두웠다. 성직자로써의 소명감이나 의무감은 없었다. 오로지 야심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돈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고 싶지는 않았다. 부유층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가난 때문이지 그의 영혼은 저 멀리 저 높은 곳에 있었다.
그는 자기의 영혼이 어린아이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행복은 아주 가까이에 있으며 순간적이다. 어린아이는 모든 것들이 눈앞에 보이면 좋아한다. 굳이 뭔가를 고민하는 불편함도 없지 않은가. 지금 그에게는 비록 신분이 하녀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고, 친구와 동업을 하게 되면 가정교사의 몇 배 많은 돈을 벌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뿌리쳤다. 어린아이처럼 살면서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이 되고 싶은 야심 때문에 하루라도 나폴레옹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날이 없을 정도다. 어지간한 시련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니 나폴레옹이 아닌 나폴레옹의 부하처럼 살아야만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사형 선고
재미! 그에게 이 보다 위대한 감정이 없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의 재미난 능력은 오락이 아니라 자존심이었다. 남들이 사는 방식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비범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자존심 때문에 그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틸드를 사랑에 빠지게 했다. 모든 남자들이 훌륭한 사회적 지위를 마련해 줄 그녀의 타고난 명성에 불나방처럼 모여 들었다. 그들의 취향대로 결혼하며 사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겠지만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하품 나는 사랑에 불과 했다. 그녀는 사랑을 받기 보다는 사랑을 하는 행복을 원했다. 뭔가 위대한 사랑, 기적이 따르는 사랑 말이다. 그런데 어떤 경쟁자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그를 발견했다. 즉,남자를 뛰어나게 만드는 것은 사형 선고뿐이다. 그것만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것이거든.
그녀가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이 사형 선고였다. 가슴을 움켜잡을 정도로 냉혹했지만 이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면서부터 권태를 몰랐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사랑을 가문의 지위로 얻는 것은 더러운 행운인데 하물며 돈으로 얻는 다는 거나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하는 사랑에는 위대한 열정이 메말랐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안개에 쌓였다고 하면 길을 잃어버렸다고 하소연 할 수 있을 것인데. 비록 그의 사랑이 출세하고자 하는 야심과 한 몸이라는 질투를 받았더라도 사랑 그 하나만을 본다면 그는 불덩이 같은 영혼으로 타올랐다. 사랑을 황홀하게 했다. 결코 불장난이 아니었다. 무심코 종이 위에 그린 얼굴이 놀라면서도 기쁘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마는 것처럼.
자기 극복
그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싶었다. 그런 만큼 그 또한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의 사전에 무죄는 불가능했다. 오로지 사형 선고뿐이었다. 그가 이토록 위험하게 살아야만 하는 까닭은 그래야만 자기 삶을 나폴레옹처럼 혁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자기 극복’의 가르침이지 ‘자기보존’의 가르침이 아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기존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기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통한다. 그러나 ‘보다 높은 인간들’이 경우엔 자신들을 죽이는 데 주저한다. 한편에서는 새로운 자기 자신을 만들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가진 것들을 내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기존의 자신에 대한 집착이 긍정에 대한 깨우침을 가로막은 셈이다.
나폴레옹 없이 권태롭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재미없을까? 진실은 엄격하면서도 정직하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형선고를 받아야 한다. 사형선고를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 극복으로 말이다. 그러니 우리 또한 위험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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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스탕달 저/이동렬 역 | 민음사
19세기 프랑스 문학이 산출한 탁월한 걸작으로, 낭만주의적 목가가 판치는 시대에 한 시대상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며 리얼리즘 문학의 장을 연 스탕달의 대표작이다. 19세기 프랑스 왕정복고기라는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반동 체제 말기의 여러 양상과 의미를 포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매력적인 주인공 쥘리엥 소렐의 삶과 사랑을 통해 연애 심리 묘사의 절정을 보여준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그는 이 책을 통해 대혁명이 형성해 놓은 사회에서 행위의 은밀한 동기와 영혼의 내면적 성질에 관한 한 발자크의 총서 『인간 희극』전체와 맞먹는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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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청(서평가)
책만 보는 바보. 그래서 내가 나의 벗이 되어 오우아(吾友我)을 마주하게 되지만 읽은 책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때만큼은 진짜 외롭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