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려놓고 멀리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무언가가 팔다리를 옭아맨 것처럼 풀어야 할 일이 뒤엉켜서 꼼짝 못할 때 우리는 이걸 해결하면 어디로든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순간을 견딘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꿈꾸는 것도 그런 때다. 피로에 흠뻑 젖은 몸을 푹 쉬려면 친구도 가족도 방해하지 않는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 내 친구 한 명은 “휴식을 위한 여행은 무조건 우리말이 안 들려야 돼.”라고 말하곤 했는데 불필요한 소리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제대로 된 휴식을 위해서는 필요하다. 친구는 국내 여행을 갈 때면 숙소가 떨어져 있어 숲 바람 소리만 들리는 휴양림을 찾았고 얼마간의 목돈을 모으면 물가가 싼 해외로 훌쩍 날아갔다. 모르는 말을 쓰는 낯선 나라로 떠나 귀와 입보다 걷기에 집중하다보면 몰랐던 몸 구석구석의 감각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이왕이면 더 멀리 오래 떠나고 싶지만 쉴만하면 돌아와 일해야 하는 것이 대부분의 휴가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는 그림책이 있다.
에런 베커의 『머나먼 여행』은 꿈꾸던 세계 여행의 대행자가 되어주는 그림책이다. 작가 에런 베커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 아프리카의 오지, 남태평양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면서 배낭여행자로 지냈다. 그는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여행자의 시선을 몽환적으로 재구성해서 이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들어냈는데 책 전체에 오직 그림뿐 글자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독자는 책을 덮을 때까지 묵음의 버튼을 누른 것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되는데 이것이 오히려 여행지의 펼쳐지는 광경과 냄새, 감촉에 대해서까지 섬세하게 상상하도록 만든다. 여행 이야기 그림책에 글을 써넣지 않는 시도는 에런 베커 이전에도 있었다. 제목부터 『여행 그림책』인 안노 미쯔마사의 연작 그림책들에는 세밀하게 묘사된 정경만 있을 뿐 글자가 없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세계 각국의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들이 여행 그림책에서 글을 배제하는 것은 ‘이국의 풍경’ 속에 서 있는 국외자의 귀에는 늘 언어가 잘 들리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자는 힌두어를 모른 채 인도의 시장을 걷고 뜻 모를 포르투갈어가 들려도 파도소리처럼 생각하면서 로카곶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멀고 낯선 여행지가 좋은 이유 중에는 이처럼 삶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묵음의 순간’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해주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안노 미쓰마사도 그랬지만 에런 베커도 그런 여행자의 마음을 잘 알기에 작품 안에서 문장의 자리를 과감히 덜어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집중하여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글자의 방해 없이 전개되는 그림은 시원하고 색과 무늬는 작은 것까지 시선을 붙잡는다. 붉은 면지에는 여러 가지 탈 것이 그려져 있는데 과거의 범선도 있고 미래의 우주선 같은 비행체도 있다. 이 책에서 붉은 색은 다른 세계를 향한 주인공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속표지를 보면 단발머리 소녀가 새빨간 씽씽카를 타고 어딘가로 신나게 달려간다. 그러나 바로 이야기의 첫 장에서 그 소녀의 여정은 중단되고 만다. 바쁜 아빠와 엄마와 오빠는 떠나고 싶은 소녀의 마음에 귀 기울일 짬이 없어 보인다. 소녀의 집 앞 신호등에 붉은 등이 켜져 있는 것은 순탄치 않은 현실의 장벽이 보내는 정지 신호다. 그리고 소녀와 멀지 않은 곳에 보라색 무언가를 손에 든 소년이 독자를 등지고 서 있는데 뒷모습만 나온다는 건 소녀도, 독자도 아직 이 소년과 친해질 상황이 아니라는 유보의 의미일 것이다.
소녀에게 붉은 색이 떠나고 싶은 욕망이라면 뒷장에 나오는 붉은 씽씽카와 연과 농구공은 공간 이동에 대한 욕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징한다. 소녀의 방 벽에는 피라미드가 그려진 포스터와 세계지도가 붙어 있고 침대 시트는 두 개의 돛을 단 조각배다. 창 밖으로는 비행기가 날아간다. 이보다 더 어떻게 소녀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이 책은 글자 한 자 없이도 충분히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소녀는 우연히 붉은 펜 하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걸로 벽에 그림을 그려서 문을 만든다. 여기서부터 붉은 펜의 마술은 시작된다. 문을 그리면 진짜 문이 되어 숲속으로 통하는 길을 열고 배를 그리면 진짜 배가 되어 물길로 주인공을 안내한다. 주인공은 고대 로마의 수로를 따라 황금색 두오모 사이를 지나서 낯모르는 인연과 인사를 나누고 기구를 타고 여행하다가 보라색 긴꼬리새를 만난다. 이 보라색 긴꼬리새는 소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곳과 전혀 다른 동방의 세계에서 날아온 신비로운 친구다. 그를 따라가다가 위험에 빠진 이 긴꼬리새를 구하는 모험을 벌이게 되고 험난한 여정은 별빛 아래 오아시스의 휴식을 거쳐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무리된다.
소녀를 따라가면서 독자는 탁 트인 여행의 해방감을 제대로 맛본다. 이 환상의 여정에는 실제 여행에서 만나는 복잡한 기차시간표라든가 숙소 구하기 같은 난관은 아예 없기 때문이다. 모험은 우리를 더 용감하게 만들고 무사히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소녀처럼 씩씩한 영웅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다. 긴꼬리새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집 앞에 누군가가 반갑게 마중을 나온 것이다. 첫 장면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소년이다. 마중 나온 소년과 소녀는 친구가 되고 두 사람은 긴꼬리새와 함께 다음 여행을 시작한다. 함께 달리는 자전거의 두 바퀴 색깔에 이들의 관계에 대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작가 에런 베커는 2편과 3편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이 여정을 이어가는 중이라고 한다. 새로운 친구가 나타날 테고 다른 위기가 찾아오겠지만 이 여행은 더없이 안전하고 풍요롭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사랑스러운 세계 일주 원웨이 티켓을 선물로 받아보겠는가. 하긴 알 수 없다. 친구에게 이 그림책을 선물하는 내 마음은 언젠가 우리도 책 속의 소년과 소녀처럼 머나먼 여행을 떠나자는 작은 프로포즈일 수도 있으니까.
● 함께 선물하면 좋은 책
여행그림책 시리즈 세트 (전6권)
안노 미쓰마사 | 한림출판사(전집)
여행을 본격적인 취미로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수집 목적으로 구입하는 것도 좋겠다. 작가의 세밀한 필치는 사진이나 동영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그림책 속 공간만의 정확성과 입체감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책의 주제가 되는 공간에 얽힌 설화, 문학작품, 다른 예술장르의 비밀스런 코드까지 꼼꼼히 숨겨두고 있어서 암호책을 해독하는 듯한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장차 덴마크를 여행하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는 『여행 그림책-덴마크』편, 이런 식으로 선물하는 것도 좋겠지만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선물하는 것도 의미 있다. 내가 가보았던 곳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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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여행에런 베커 글그림 | 웅진주니어
깊은 숲에서 강을 만나거나, 갑자기 폭포수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 순간, 소녀는 마법의 펜을 이용해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 더 멋지고 흥미진진한 여행을 이어나갑니다. 그런데 위험에 처한 신비의 새를 구하다가 그만, 마법의 펜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소녀는 다시 펜을 찾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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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동화작가)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 어린이 철학 교육을 공부했다. 『달려라, 그림책 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을 함께 썼고 EBS '라디오멘토 부모'에서 '꿈꾸는 도서관'을 진행했으며, 서울시립대, 한신대, 서울예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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