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킬미, 힐미>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제작을 준비하던 작품이다. 작년 1월부터 제작이 가시화되었고, 여름이 지나기도 전에 꽤 구체적인 설정과 줄거리를 담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제작진이 사전 준비에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킬미, 힐미>가 오랜 기간 남자 주인공의 캐스팅에 난항을 겪은 것은 필시 7중 인격이라는 설정의 난해함 때문이리라. 두셋도 아니고 일곱이라니,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시도조차 하기 힘든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지성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연기는 즐겁기 그지없다. 여러 개의 인격을 연기하는 지성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얼굴의 배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나하나의 인격은 놀랍도록 서로 다른 개성을 뽐내고, 각자의 정체성을 침식하지 않는 범위에서 존재를 공유한다. 특히 신세기의 인기는 어마어마하다. 세기 오빠를 찾는 팬들은 매회 그가 등장하는지 여부를 묻고, 대사는 유행어가 되어 여기저기서 회자된다.
하지만 여기서 반동분자가 돼 보고자 한다. 물론 돋보이는 개성을 자랑하는 신세기도, 페리박도, 요섭이도 요나 혹은 앞으로 등장할 미지의 인격들도 모두 좋다. 허나 나는 주장한다, 누구보다 더 아름답고 멋있는 인격은 따로 있다고. 가장 매력적이며 눈여겨볼 만한 사람은 단연 그들의 아버지이자 존재 이유인 차도현이라고 말이다.
출처_ MBC
흔히 재벌 3세라고 하면 떠올리는 모습이 있다. 거만하고 무례한 태도, 돈이면 뭐든지 해결되리라는 황금만능주의적 사고 같은 것들. 흥미롭게도 <킬미, 힐미>의 주인공 차도현(지성)은 이런 전형적 남자 주인공과는 궤를 달리한다. 초반부터 드러나듯 차도현은 타인에게 시종일관 신사적이고 정중하며, 선하고 바른 성격이다. 그의 병에 대해 아는 최측근까지도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가 남몰래 견디고 있는 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도현은 다양한 인격들을 제 안에 숨기고 그들이 때때로 저지르는 사고를 수습해야 하고,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에겐 필사적으로 비밀을 감춰야 한다. 때때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저를 위협하는 사람들에겐 돈을 쥐어 보내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현명했다고 덤덤하게 과거를 술회한다. 그가 쥔 돈과 권력을 생각해봐도 이 모든 부담이 타자에 대한 공격이 아닌 배려와 이해로 표출되는 것은 이례적이다.
호전적이고 잔인한 인격의 신세기, 능글맞고 허풍이 심한 페리박,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성향의 안요섭과 명랑 발랄한 여고생 안요나, 7세 아동인 나나 등 개성 강한 인격들 사이에서도 차도현이 자신의 특성을 잃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초반부, 인격의 주인인 차도현은 오랜 기간 자신의 병에 짓눌려왔다는 것 이외엔 눈에 띌 만한 특이점을 드러내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인격들 사이 정체성을 잃어버릴 법도 했지만, 드라마는 오히려 그 병적인 신중함에서 도현의 매력을 추려낸다.
신세기가 저지른 사고 때문에 병원을 동분서주하는 장면, 리진(황정음)은 도현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다. 자신의 실수도 아닌데 적극적으로 나서 고개를 숙이고, 행동은 어색할 정도로 과잉되어 있다. 심지어 주먹을 휘두른 상대에게는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읍소를 하기도 한다. 스스로의 낯을 깎아내리면서도 자신의 다른 인격이 타인에게 준 피해를 수습하는 데 여념이 없는 이 장면, 리진은 석호필(고창석)의 말을 떠올린다. ‘인격들이 벌여놓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11년 동안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어. 마치 끝나지 않는 전쟁을 홀로 목숨 걸고 치루는 것처럼.’
시청자들 역시 자신을 죽이고 누르고, 자신을 잃은 사이 행여 다른 인격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을까 조바심 내온 그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평소 필요 이상으로 정중하고 신사적인 태도는 오히려 그 반동이라는 것도. 리진이 자신의 병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해외로 보내기로 결심하는 장면 역시 그렇다.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도현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출처_ MBC
다행히 리진은 돌아온다. 단 한 번도 성 밖을 향해 구조 신호를 보낸 적 없는 이 불쌍한 야수를 위해. “연민과 호기심이 있었다면 모두 지워버리세요. 전 마법이 풀려 멋진 왕자로 돌아오는 야수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괴물입니다.” 도현은 리진에게 자신은 마법에 걸려 야수가 된 왕자가 아니고 그냥 괴물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기나긴 형벌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야수보다 더 가련한 존재다. 하지만 동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은 오히려 자신을 성에 가둔 남자 주인공을 구원할 터다. 가만히 기사의 구조를 기다리는 히로인이 아닌 스스로 성벽을 타고 오르는 히어로가 되어.
리진은 능동적으로 행동하며 도현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그의 변화는 캐릭터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지금부터 제가 내미는 손을 잡으면 되돌릴 수 없게 됩니다. 실수로 담장을 넘어 온 공이라고 해도 안 돌려줍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정말 가느냐고 묻는 리진의 말에 도현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 다른 어떤 인격도 아닌 차도현 본인이 스스로를 위해 욕심을 냈다는 점에서 이 변화는 의미가 크다. 병적으로 신중하고 매사 조심스러웠던 도현이 최초로 욕심낸 사람이 리진이라는 것은 이 드라마 내에서 훌륭한 로맨스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리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저는, 차도현입니다.”말하는 장면도 그렇다. 자신의 존재를 강조하는 이 말 역시 리진에게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 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드러내며, 그녀가 신세기 등 자신의 숨은 인격을 이겨서라도 손에 쥐고 싶은 상대임을 보여주기도 하니까. 로맨스에서 ‘최초의 예외’란 짜릿한 쾌감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차도현 역시 그렇다. 드라마는 이렇게 차도현의 예외성을 만들어 간다. 이 모두가 좋은 서사이며 훌륭한 로맨스라는 확신을 주면서.
<킬미, 힐미>는 초반부터 오리진과 차도현의 과거에 숨겨진 비밀을 암시했다. 드라마는 틈틈이 도현이 어렸을 때 겪은 화재 사고는 그의 질병과 관계가 있으며, 리진 역시 그 사고로 인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고 트라우마를 갖게 됐음을 드러낸다. 당연히 도현의 7중 인격은 단순히 극에 재미를 주기 위한 설정이라기보다 과거 사건으로 인해 이 두 사람이 얼마나 다치고 상처 입었는지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드라마는 그들에게 의사와 환자 이상의 관계성을 부여함으로써 시청자들의 공감과 흥미를 이끌어냈다. 리진은 도현에게 의사가 아닌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고, 이미 그들은 단순한 주치의와 환자는 아니다. 그렇기에 <킬미, 힐미>는 일방적으로 누가 누구를 고치고 치유하는 기록도, 의료보다 연애가 앞서는 흔한 로맨틱 코미디도 아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다친 서로를 위로하고 달래는 두 사람의 치유기이자 성장담이 될 터다. 진수완 작가의 전작인 <경성 스캔들>이 그러하듯이, <킬미, 힐미> 역시 덜 자란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 상처를 어루만지고 꽃을 피우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이렇게 꽁꽁 얼었으니 이제 곧 아름다운 꽃이 피겠다고, 당신의 꽃은 틀림없이 존재만으로 아름다울 거라고 말해주는 그런 이야기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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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
앙ㅋ
2015.02.09
rkem
2015.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