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넘은 이, 예순이 넘은 이들이 차례차례 마이크 앞으로 나간다. 시를 읽는다. 출근한 책상에서, 점심을 건너뛰고 카페에 앉아서, 노모를 돌본 다음 몰래 한숨 쉬는 식탁에서, 장거리 강연을 다녀오는 고속도로 휴게소 한쪽에서, 볕 좋은 쪽으로 베란다 화분을 옮기다가, 설거지하는 짬짬이, 아이들이 돌아간 교실에서, 이십 년 만에 삼십 년 만에 한 줄 한 줄 쓰고 다듬은 시를 읽는다. 단어와 단어가, 쉼표와 느낌표와 물음표가, 실내를 그득히 채운다. 누구의 남편 아내 어버이 자식 아닌 시인이 되어, 교감도 목사도 프로듀서도 어린이집원장도 강사도 교수도 기자도 아닌 오직 시인일 뿐인 자신이 되어, 바위처럼 완고한 일상의 갈피에서 애써 잡아챈 절경과 절정을 토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시 쓰고 비평하고 문집이며 시화전이며 문학의 밤을 도모하기’였던 소년시절, 그 시절을 재현하듯 열렬했던 지난 겨울 동문 모임이 떠오르곤 한다. 시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다시 모여 그토록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 경배했을까. 그 시간, 그 자리에, <에밀리>를 선물하고 싶어진다. ‘시가 뭐예요?’라고 묻는 아이가 나오는 그림책이다.
뒷짐 진 빨간 벙어리장갑 손으로 빨간 썰매 줄을 잡고 있는 뒷모습의 아이는 이웃의 노란 집을 바라보고 있다. 일 층에 넷, 이층에 넷,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그 창문들 너머 어딘가에 있을 ‘신비의 여인’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신비의 여인’은 아이네가 이사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말린 초롱꽃을 함께 담은 짤막한 편지로 인사해왔다. ‘저는 마치 이 꽃과도 같답니다. 당신의 음악으로 저를 소생시켜주세요. 그 음악이 저에게 봄을 가져다 줄 거예요.’
편지를 받았던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아빠를 도와 온실 화초를 돌보면서 초롱꽃 편지를 보낸 아주머니를 궁금해 하고, 아빠는 풍문으로 들은 바를 얘기해준다. 키가 작고, 늘 흰 옷을 입으며, 꽃을 가꾸며, 시를 쓴다더라고. 그러자 아이가 대뜸 묻는다. “시가 뭐예요?” 한겨울 온실에서 꽃을 가꾸고, 온실 문 너머에선 엄마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고, 거실 벽엔 그림이 걸려있는 집에서 사는 아빠가 대답한다.
“엄마가 연주하는 걸 들어 보렴. 엄마는 한 작품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데, 가끔은 요술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음악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진단다. 그게 네 몸을 오싹하게 만들지. 그걸 설명할 수는 없어. 그건 정말, 신비로운 일이거든. 그런 일을 말이 할 때, 그걸 시라고 한단다.”
아이는 이 멋진 비유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아빠야말로 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저 그에 대한 느낌을 깨우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누군들 ‘시’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존 홀 휠록 John hall wheelock의 대답은 아이의 아빠보다 근사하진 않지만 철학자 시인답게 정곡을 찌르는 맛은 있다. ‘모든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시는 일종의 계시이다. 한 편의 시는 그 시를 쓴 시인에게 본래의 낯설음 그대로의 세계를, 최초의 놀라운 충격 그대로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 준다. 또한 시는 독자들에게도 그러한 세계를 보여준다.’
엄마를 따라 간 노란 집에 가게 된 아이는 층계 꼭대기에서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던 ‘신비의 여인’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풍문대로의 하얀 드레스 무릎 위에다 종이쪽지를 놓고 무엇인가 쓰느라 골몰해있는 그에게 묻는다.
“그게 시예요?”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 시는 바로 너란다. 이건 시가 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일 뿐이야.”
1830년에 태어나 55년의 생을 살면서 노모를 돌보고 정원을 가꾸며 친척 아이들과 이웃의 아이들에게 손수 구운 빵과 시를 선물하며 은둔했던 에밀리 디킨슨은 1,8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 그림책은 에밀리 디킨슨의 노란 집이 마주했던 킹맨 씨의 집 아이에게 건넨 디킨슨의 시 쪽지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간에,/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리기 때문이다. 애정을 기울여, 에밀리’에서 영감을 얻은 마이클 베다드가 이야기를 만들고, 바버러 쿠니가 그림을 그린 걸작이다.
풍경과 사물의 속 깊은 진리며 신비는 노년에 이르면 쉬이 보이는 법이고, 그러나 예민하고 명료한 감각은 소년의 것이니, 소년에게도 노년에게도 시 쓰기가 그토록 어려운 듯하다. 그러니 더욱,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고 둔해지고 심술 사나워지기 쉬운 일상을 반전시킨 선배들께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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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에밀리제인 욜런 글/낸시 카펜터 그림/최인자 역 | 열린어린이
에밀리 디킨슨의 유명한 시 “말하라, 모든 진실을. 하지만 비스듬히 말하라"를 중심으로 자유 형식의 시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욜런은 은둔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어린 조카 길버트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이야기로 만들었습니다. 고모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건 그들 가족끼리의 농담이랍니다. 일곱 살 길버트가 에밀리 삼촌에게서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며 죽은 벌 한 마리와 시 한 편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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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그림책 번역가로 그림책 전문 어린이 도서관 '패랭이꽃 그림책 버스'와 그림책작가 양성코스‘이상희의 그림책워크샵’을 운영하면서, 그림책 전문 도서관 건립과 그림책도시 건설을 꿈꾸고 있다. 『소 찾는 아이』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은혜 갚은 꿩이야기』『봄의 여신 수로부인』등에 글을 썼고, 『심프』『바구니 달』『작은 기차』『마법 침대』등을 번역했으며, 그림책 이론서 『그림책쓰기』,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를 펴냈다.
앙ㅋ
2015.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