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순 소설가와 만나면서 처음 건넨 말이 “이번 소설은 참 많이 달랐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적으로 읽은 임성순의 첫 소설이 실험으로 충만했던 『문근영은 위험해』였다. 이 작품에 비한다면 최신작 『극해』는 정통 소설에 충실한 편. 정통 소설이 뭔지에 관해서는 답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현실에 바탕을 둔 허구이며 등장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엮는 사건이 존재하며, 이야기에는 소설가가 품은 주제의식이 담긴다면 정통 소설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극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 태평양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많은 사람이 징용되었다. 군인으로 징용된 사람도 있지만, 선원이나 공장 노동자 등으로 차출된 사람도 많았다. 『극해』의 중심에는 배를 타게 된 조선인이 있다. 이들이 탄 배 유키마루는 처음에는 고기를 잡는 어선이었으나, 전세가 기울면서 군 작전에 투입된다. 선원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고, 피로는 쌓여만 간다. 특히 약자였던 조선인을 향한 일본인의 폭력이 심해진다.
이 부분까지만 읽은 독자라면, 영화 <명량>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억압받는 우리 민족을 구원할 영웅이 나타나겠지, 하는 기대감이 책을 읽는 동안 커진다. 이런 예측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선상반란이 일어나며 조선인을 억압하던 일본인을 처치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소설의 후반부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후반부가 궁금하다면, 책에서 확인하시라.
소설가 임성순은 제6회 세계문학상수상작 『컨설턴트』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에 『문근영은 위험해』,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를 발표했다. 『극해』는 그가 발표한 4번째 장편소설.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바다비린내와 피냄새가 가득한 후각적인 소설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인간은 어떻게 약해지나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이 책 쓴 계기가 있던데.
『컨설턴트』를 쓰고 나서였다. 상 받기 전이었다. 여러 사람에게 초고를 보여줬다. 그중 한 명이 안권태 감독이었다. 소설 배경이 90년대이니, 자연스레 90년대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때 감독님이 원양어선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해주더라. 한국 사람들이 중국 교포 선원을 심하게 대하니까 선상반란을 일으켜 한국인을 죽인 사건이었다.
사건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 사건을 찾아봤다. 영화에서 바다가 나오면 100억이 넘으니, 영화로는 무리겠다 싶더라. 그 사건을 잊고 지내다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를 쓸 때였다. 신문에서 우리나라 선원이 제소당했다는 걸 읽었다. 뉴질랜드에서 조업하던 중에 필리핀 선원에게 끔찍한 일을 했더라. 유사성행위를 시키고, 공구로 머리를 때리고, 잠도 안 재웠다. 감금, 임금체납도 했고. 필리핀 선원이 못 견디고 탈출해서 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이 조사하기 시작하니, 배 한 두 척이 아니라 전반적인 문제였다. 그렇게 해당 배 선장과 선원이 뉴질랜드 법정에 섰다.
국제적 망신이었는데, 놀라운 건 네티즌의 댓글이었다. ‘바다에서 인권이 뭐가 중요하냐, 잘못하면 죽는데’ 이런 댓글이 달리고, 심지어 그 댓글이 베스트 댓글이었다. 인권을 버리려고 돈 벌러 간 게 아니지 않나. 바다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성폭행을 당해야 할 이유도 없고. 글로 써야겠다 생각한 게 『극해』다.
배 위에서의 이야기니 아무래도 취재도 많이 했을 것 같다.
배를 탄 분이 부산에 몇 분 있어서 그분들에게서 원양어선 이야기를 들었다. 제한된 공간이라 오래 타다 보면 비정상적인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더라. 권태로우니까 윤리적인 개념보다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라도 즐기게 되고. 듣다 보니 군대랑 약간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도 전방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으니,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폐쇄된 사회라 거기만의 룰이 있고, 그 룰이 일반사회의 룰과 달라도 합당하게 받아들이는 공간이다. 조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사람 사이 관계는 어떻고, 어떻게 지루함과 답답함을 극복하는지를 많이 들었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군대에서는 어떤 선임이었나.
스스로 자랑스러운 게, 군대에서 아무도 안 때렸다. 내가 잘해서는 아니었고 운이 좋았다. 한창 군기를 책임져야 할 상병 때, 갈등은 있었다. 위에서는 때리라고 하고, 나는 때리기 싫었다. 그러던 중에 옆 중대에서 폭행 사건이 터졌다. 헌병대가 오고 매주 일이병 소원수리를 받았다. 그 다음부터는 중대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가 군기를 잡을 일이 없어졌다. 만약, 저 사건이 안 터졌다면? 솔직히 (끝까지 안 때릴 거라는) 자신은 없다.
브레이크 없는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극해』 배경이 2차 세계대전이고, 이 시기는 보통 일본이 조선을 수탈하고, 조선은 억압당한 때로 본다. 소설에서 그리는 상황은 갈등의 층위가 복잡하다. 이 시기를 어떻게 인식하나.
2차대전이 일어난 이유가 제국주의 때문이다. 제국주의 기반에는 민족주의가 있다. 독립운동하는 분들이 훌륭한 일을 많이 했지만, 재밌는 건 우리를 괴롭힌 반대도 똑같은 논리였다는 점이다. 우리 동족의 위대함으로 시작하는 논리로 억압하고 억압당했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제국주의를 내세운 나라가 망하고 우리가 독립했다. 독립한 나라는 민족주의로 국가형태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긍정적인 면도 많은데, 너무 과하다 보니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게 이스라엘이다. 2차대전에 당했던 논리와 똑같은 논리로 팔레스타인을 대한다.
민족주의는 국가적으로 권장하는 선한 논리지만, 어떤 선을 넘을 때 위험해진다. 이걸 보여주는 시기가 어딜까, 고민하다 선택한 게 2차대전이었다. 『극해』를 읽은 독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사람이 일본인에 당할 때는 “저 나쁜 놈들” 하면서 감정이입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막상 똑같은 논리로 약한 사람을 대할 때는 아이러니를 느낄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그렇게 싫어하지만 일본에서 안 좋은 면도 많이 배웠다. 민과 군의 안 좋은 결탁, 다른 민족을 열등하게 보는 우익의 논리도 그렇고.
등장인물이 많다. 써놓고 많이 쳐냈을 것 같다.
2,500매까지 썼는데. 사라진 내용이 많다. 원래는 등장인물의 과거 이야기도 많았다. 조업 과정도 자세히 써놨는데 다 덜어냈다. 쓴 뒤에 읽으면서 서사 진행에 도움되는 최소한만 남겼다.
등장인물이 극 후반으로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결국 인간에 관한 소설인데, 인간의 어떤 모습을 다루고 싶었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시대의 가치를 맹종했을 때, 얼마나 쉽게 악해질 수 있을까를 그리고자 했다. 최근 윤 일병 사건도 그렇다. 군대에서 생활하면 누구나 아는 가치가 있다. '군기'. 그런데 스스로 개인이 윤리적 판단을 안 하면 브레이크 없이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악한 면이 아니라 약한 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동시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다루고 싶었다. 자연과 인간 관계가 인간이 약자에게 대하는 것과 같다. 자연을 가치 판단 없이 돈벌이 대상으로 봤을 때 어떻게 되나. 아무 생각 없이 몇백 마리 물개를 쏴 죽인다. 여기에 아무런 윤리적인 느낌을 받지 않는다. 등장인물 중 포수는 처리하지 못할 만큼 잡아서 버리는 걸 자랑까지 한다. 이것도 인간 안에 있는 약한 모습이다.
불법조업 문제와도 연결될 것 같다.
조사하면서 놀랐는데, 우리는 중국 어선이 한국 영해에서 불법조업하는 것만 안다. 사실 대한민국이 불법조업으로 악명이 높더라. 소말리아가 지금 무정부 상태다. 소말리아가 무정부 상태가 되니, 원양어선들이 소말리아 영해에서 물고기를 마구 잡았다. 원래는 돈을 내고 조업증을 끊고 허가된 양만큼만 잡아야 하는데, 정부가 없으니까 선진국 원양어선이 일제히 가서 물고기 씨를 말렸다. 여기서 악명 떨친 나라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없으니 소말리아 어민들은 해적이 됐다. 소말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도 악명이 높으니 EU에서 불법조업국가로 한국을 제소한 상태다. 한국은 여기에 항소해서 7월에 심사를 받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른다.
약자를 괴롭히고 쥐어짜는 논리, 돈
똑같은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이 악한 사람, 약자가 되지는 않지 않나?
어떤 시대든 약자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문제다. 예를 들어, 청년기 이전이나 노년기 이후는 약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6, 7살에게 총 쥐여주고 내보내는 사회도 있고 혼자 된 고아를 데려다 국가에서 훌륭한 교육을 시키는 사회도 있다. 군 생활을 잘 못하는 친구에게 편한 보직을 줄 수 있지만 어떤 사회는 “군기가 빠졌구나, 맞아야 정신 차리지” 하고 때릴 수 있다. 어떤 시스템을 만드느냐가 문제다. 사람들의 일반적 특성인지, 우리 문화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한 자에 감정이입 하기를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학교에서 왕따 당했을 때 피해자가 신고하면 학교 선생님이 와서 아이에게 와서 말한다. 우리 학교의 명예와 신고당한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신고를 철회해달라고. 또, 이런 경우도 있다. 어떤 회장님이 아들에게 상속을 하기 위해 주가조작을 했다. 반응이 이렇다. 아들에게 오죽 물려주고 싶으면 저러겠느냐, 라고. 주가조작으로 피해 봤을 소액주주는 생각 안 하는 거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 감정이입 하는 사람이 많다.
바다에 관한 소설이고, 쓰는 와중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심정이 착잡했겠다.
한창 소설을 마무리할 무렵에 세월호 사건이 생겼다. 내가 쓰고 있어서 이런 사건이 생겼나,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 소설 속 학도병 태우는 배가 침몰하는 장면이 세월호와 유사하다. 세월호는 사람 생명보다 돈을 중시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사건인데 내가 이야기하는 주제와 닿아있는 부분이기도 했고. 이걸 내야 하나,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 한편 정말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듣고 보니, 소설 속에서 선장이 파산을 각오하고 배를 돌렸으면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겠다.
약자를 괴롭히고 쥐어짜는 논리가 결국은 돈이다.
전작 이야기를 해 보자. 이번이 4번째 장편인데, 이전 작품은 어떤 이야기였나.
『컨설턴트』, 『문근영은 위험해』,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회사 3부작이다. 회사에 관한 이야기다. 애초에 구상할 때, 묶어서 쓰겠다고 결심했다. 상투적이지만, 자본주의를 이야기하려 했다. 『컨설턴트』는 관료화된 자본주의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약자들에게 폭력을 행하는가를 이야기했다. 『문근영은 위험해』는 블랙코미디이면서 메타소설이다. 『컨설턴트』를 쓴 소설가가 회사에 들어와서 겪는 황당한 이야기를 그렸다. 『컨설턴트』와 같은 소설조차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상품이 되는 상황을 묘사했다. 시뮬라시옹, 이미지가 실재를 붕괴시키는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는 소설이다.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극해』와 연결 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갇히고, 끝내야 할까?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건 나쁜 논리는 아니다. 어쨌든 자본주의에는 공리가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과 같은 공리. 이런 공리가 옳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해서 쓴 작품이다. 자살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서는 장기나 조직을 얻고 그걸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의사가 있고, 정반대에 신부가 등장한다. 이 두 인물을 충돌하게 해서 질문하는 소설이다.
천재가 아니라 소설가가 됐다
『컨설턴트』로 상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당시 담당기자도 똑같이 물었다. 안 기쁘냐고. 담담했다. 실감이 안 나기도 했지만, 개인적 사건으로 정신적으로 지쳐 있을 때라 별 느낌이 없었다.
글은 왜 쓰게 됐나. 인상으로 봐서는 성직자나 수학자나 물리학자도 어울릴 법한데.
내가 천재였으면 수학이나 물리를 연구했을 것이다. 세상의 근본적인 원리에 관심이 많다. 다만 천재가 아니라서. 예전부터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장편소설은 세계를 창조하는 일인데, 이런 일이 재밌고 좋다. 어머니 영향도 있다. 어머니가 소설 쓰는 걸 좋아하셔서, 내가 군대 있는 동안 '창조문예'라는 기독교계 문예지에 등단하셨다.
영화 시나리오 작업도 하고 있지 않나. 영화인으로서 임성순과 소설가로서 임성순, 어느 정도 다른가?
쓰는 동기, 접근이 다르다. 영화 시나리오는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두고 쓴다. 대자본이 필요하다. 대자본을 투자받아서 그 이상의 이익을 거둬야 하니, 상업적 측면을 배제하고 쓸 수 없다. 소설은 이런 제약 없이 쓴다. 『극해』도 영화화되기 힘들 거라 소설로 썼다. (웃음) 쓰는 방식도 다르다. 영화 시나리오는 샷, 앵글을 고려하면서 쓴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으로는 어떻게 할 건지도 생각한다. 이런 기법을 소설에서 차용할 때도 있긴 하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소설 쓸 때는 샷이나 앵글을 생각하지 않고 철저하게 상황에 들어가서 쓴다.
장편만 쓰는 이유가 있나.
이유는 없고, 일단 단편 청탁이 안 온다. (웃음) 써야 하는 장편이 늘 있고, 청탁 안 오는 단편을 쓸 필요가 없다. 장르 쓰는 사람은 임성순이 문단에 있다 생각하고, 문단에 있는 분은 나를 장르로 분류하는데, 이런 시선에 크게 상관은 하지 않는다.
차기작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에서 벗어난 다른 쪽 이야기를 하려 한다. 하드코어 SF가 될 것이다. SF이다 보니, 수학이나 물리학적 이론이 받쳐줘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수학,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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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해 임성순 저 | 은행나무
이 소설은 누구도 앞날을 예상할 수 없는 전시 상황을 배경으로 태평양 위를 표류하는 포경선 유키마루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생존 전쟁에 관한 이야기다. 끊임없이 꼬리를 무는 사건과 흥미진진한 서사를 바탕으로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생존을 갈구하며 모멸을 견디는지, 살아남은 약자가 어떻게 사악한 존재로 변하는지를 보여주며 나약한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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