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여성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작가 조르주 상드(1804~1876)입니다. 쇼팽보다 6년 연상이지요. 오늘은 이 유명한 여성 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이름부터 한번 살펴보지요. 그녀의 본명은 ‘아망틴 오로르 루실 뒤팽’(Amantine Aurore Lucile Dupin)입니다.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여섯 살에 지방 귀족이었던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지만 시골 영주의 안주인으로 살 수 있는 여성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뒤드방 남작과 헤어진 채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로 들어서지요. 그게 1831년의 일이었고 이듬해에 <앵디아나>(Indiana)라는 소설을 써서 작가로 데뷔합니다. ‘조르주 상드’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발표하면서 사용한 필명이었는데 이후에도 계속 같은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한데 ‘조르주’는 남자 이름이지요. 영어로 하면 ‘조지’가 됩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여성작가들이 남자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프레데리크 쇼팽(Fr?d?ric Chopin) [출처: 위키피디아]
사실 ‘소설 쓰기’는 그 무렵의 지적인 부르주아 여성들이 도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문직’이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차별’이라고 해야 할 성역할이 엄연히 존재했으니까요. 여성의 참정권 제한은 물론이거니와 대학에서도 여성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학 교육을 받아야 가능했던 철학이나 과학 분야에서 여성의 이름을 만나기는 어렵지요. 여성이 활약할 수 있었던 분야로 ‘소설 쓰기’ 외에 또 다른 것을 떠올려보자면 아마도 음악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대부분 남성들이 주도했습니다. 쇼팽과 상드의 시대, 그러니까 낭만주의 시대의 기억나는 여성 음악가로는 슈만의 아내였던 클라라 슈만, 또 멘델스존의 누나였던 파니 멘델스존 등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한데 당시에 작가 조르주 상드는 과연 어느 정도의 인기를 누렸을까요? 한마디로 말해 엄청났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발자크나 빅토르 위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볼 수 있지요. 같은 시기에 영국에는 찰스 디킨스가 있었습니다. 상드는 불어로 소설을 썼지만 영국에서도 번역돼 인기를 누렸던 작가였고, 그녀가 받았던 원고료는 앞에서 언급한 ‘세 분’보다 오히려 한 수 위였지요. 게다가 상드에게는 이른바 ‘무명 시절’이 없었습니다. 처녀작이었던 『앵디아나』가 요즘말로 ‘대박’이 나면서 단숨에 유명작가로 부상했던 것이지요.
그녀가 파리로 들어섰던 1831년에 폴란드의 청년 쇼팽도 역시 파리에 옵니다. 물론 우연이었겠지만 훗날 두 사람의 열애를 떠올린다면 필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1830년 11월에 폴란드를 떠난 쇼팽은 오스트리아 빈에 체류하다가 프랑스 파리로 들어서지요. 그 여정 중에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을 때, 조국 폴란드의 독립운동 봉기가 러시아 군대에 진압됐다는 소식을 듣고 연습곡 12번 ‘혁명’을 작곡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여부는 좀 불투명합니다. 실제로 음악가 쇼팽이 ‘폴란드 민족주의자’로 채색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는 조국 폴란드를 분명히 사랑했고 자신의 음악에, 특히 ‘마주르카’에 폴란드 민속음악의 체취를 강하게 담아내기는 했지만 민족주의 운동가로서의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조르주 상드 [출처: 위키피디아]
그보다는 좀더 보편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할 성 싶습니다. 우리가 흔히 쇼팽을 일컬어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부르는데, 저는 이 수식어야말로 쇼팽을 설명하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양음악사의 인물 수식어는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경우들도 적지 않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음악의 어머니 헨델’일 겁니다. 같은 시대의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칭해놓고 그와 대구를 이루는 표현으로 등장한 듯한데,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수식어입니다. 하지만 쇼팽의 경우에는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물론 이런 표현 앞에서 쇼팽보다 한 살 아래인 리스트를 먼저 떠올릴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두 사람은 당대의 피아노 음악을 수놓았던 천재들이었지요. 한데 저는 쇼팽에 비해 리스트의 피아니즘은 좀더 소설적이고 영화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지점에서 또한 떠올릴 것은 당대에 피아노라는 악기가 차지했던 위상입니다. 제가 베토벤 편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비약적인 발전과 개량을 이룬 악기, 그와 더불어 대량생산과 대량 보급이 가능해진 악기로 피아노를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말하자면 19세기 초중반에 가장 인기 있던 악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부르주아지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악기가 바로 피아노였습니다. 집안의 거실에 프랑스산 플레옐이나 영국산 브로드우드, 혹은 독일산 베흐슈타인 피아노를 들여놓는 것이 교양과 품위의 상징이던 시대였지요. 오늘날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스타인웨이는 이보다 조금 후발주자였습니다.
이미 연재한 글에서도 여러 차례 설명했습니다만 음악의 발전은 악기 발전과 궤를 같이 합니다. 그러니 쇼팽과 리스트는 ‘피아노 르네상스’의 선택을 받은 음악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1831년 9월, 기진맥진한 심신으로 파리에 들어선 쇼팽은 약 6개월간 꽤나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주머니에 돈도 떨어진데다 파리에서는 아직 무명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듬해 2월에 파리의 살 플레옐에서 가졌던 데뷔 연주회가 큰 성공을 거둡니다. 조르주 상드가 처녀작 <앵디아나>로 일약 유명작가 대열에 올라섰던 바로 그 해에, 쇼팽은 피아노 회사 플레옐이 만든 콘서트홀에서 성공적인 데뷔 연주회를 치렀던 것이지요.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836년 리스트의 연인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살롱에서였습니다. 남장을 하고 시가를 피우는 유명 여성작가, 아마도 사회주의자였을 조르주 상드에게 쇼팽은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확실한 설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의 강렬한 개성에 끌렸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렇지 않다면 약 1년 뒤부터 전개된 둘의 열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첫 만남에서 진짜로 거부감을 느꼈다면 아마 둘은 다시 만나지 않았을 겁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1838년 가을, 스페인 마요르카 섬으로 가서 동거 생활을 시작하지요. 상드의 두 아이들인 모리스와 솔랑즈도 함께였습니다. 하지만 마요르카에서의 생활이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두 사람과 아이들은 발데모사 수도원에서 살았는데 주거 여건이 별로 좋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상드와 쇼팽의 관계를 의심한 동네 사람들의 비난과 구박도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우기가 닥치는 바람에 몸이 약한 쇼팽은 건강을 크게 상하고 말지요. 아마도 폐병으로 추정되는데 쇼팽은 이때 각혈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상드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아무 차도가 없자 할 수 없이 마요르카 섬을 떠납니다. 마르세이유에서 잠시 요양을 한 후,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 중부의 노앙(Nohant)으로 쇼팽과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요. 이때부터 1846년까지 쇼팽과 상드는 노앙과 파리를 오가며 지냅니다.
상드는 쇼팽의 음악인생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지요. 특히 노앙 시절은 쇼팽의 삶에서 매우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쇼팽, 기질적으로 예민한데다 신체적 질병까지 있었던 그는 상드의 모성애적 사랑에 큰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물론 당대와 훗날까지도 일부 남성들은 상드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험담을 퍼부었지요. 남성 편력이 많은데다 과시욕이 넘치는 여자, 소설이 많이 팔리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소설을 쓰지는 못한 B급 작가라는 등의 비난이 많았습니다. 제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라는 책에서도 썼듯이, 보들레르와 니체는 아주 대놓고 상드를 욕했던 인물들이지요.
하지만 적어도 쇼팽과의 관계에서 상드가 보여줬던 태도는 헌신적이었습니다. 귀족적 취향에 까탈스럽고 병약한, 때로는 상드의 남자관계를 의심하기까지 했던 쇼팽의 곁에 상드는 9년간이나 머물지요. 지나치게 모성애적인 연애관계가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상드는 쇼팽에게 행복과 영감을 줬던, 어머니 같은 연인이었고 예술의 뮤즈였습니다.
쇼팽의 창작적 전성기는 바로 그 시기, 상드와 사랑에 빠져 있던 마요르카에서 노앙까지의 시절이었습니다. 마요르카에 머물던 시기에 쇼팽은 24곡의 전주곡을 완성했고, 노앙 시절에도 많은 곡을 썼지만 그중에서도 <소나타 2번 b플랫단조>와 <소나타 3번 b단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자는 노앙에 당도한 직후였던 1939년 여름에, 후자는 노앙 시절의 막바지였던 1844년 여름에 작곡했지요.
이 두 곡 중에서 소나타 3번을 음악적으로 더 원숙한 작품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장송’이라고 불리는 소나타 2번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형식적 완성미는 3번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감성적으로 호소력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절망적인 색채감, 무겁고 어두운 리듬이 두드러진 소나타입니다. 특히 3악장 ‘장송행진곡’이 유명한데 쇼팽은 이 악장을 1837년에 이미 작곡했다가 2년 뒤에 소나타 2번에 포함시키지요.
1악장은 네 마디의 무겁고 느린 서주로 막을 엽니다. 이어서 곧바로 빨라집니다. 왼손으로 저음부를 격렬하게 짚어나가면서 오른손으로 짧은 악구를 집요하게 반복하는 첫번째 주제, 그리고 두번째 주제에서 느리고 서정적인 선율이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뜨거워집니다. 끊어 치는 리듬으로 돌진하듯이 막을 여는 2악장은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딴딴다다단’ 하는 리듬형을 잘 기억해두기 바랍니다. 이어서 우아하고 잔잔한 분위기의 중간부가 등장했다가 다시 무겁고 저돌적인 스케르초, 그리고 마지막 코다에서 중간부에 등장했던 우아한 악구가 다시 얼굴을 내밉니다. 긴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입니다.
이어서 소나타 2번의 백미인 3악장 ‘장송행진곡’으로 들어섭니다. 마치 장송의 행렬이 서서히 걸음을 떼는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무겁고 장엄하면서도 비애감이 느껴집니다. 장송의 발걸음이 점차 크고 무거워집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중간부의 애수 어린 선율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마 처음 듣는 분들도 단번에 마음을 빼앗길 만한 선율일 겁니다. 마지막에 다시 장송의 주제로 돌아왔다가 곧바로 짧은 피날레 악장에 들어서지요. 이 피날레는 왠지 그로테스크합니다. 셋잇단음표를 양손으로 계속 연주하면서 수수께끼 같은 악구를 펼쳐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강렬한 포르티시모 한 방으로 음악을 마무리합니다.
ps.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쇼팽의 소나타 2번(1962년/Sony)은 현재 품절 상태여서 추천 목록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1984년/DG
오랜 세월 꾸준히 손꼽혀온 명연이다. 물론 쇼팽의 음악 중에서도 소나타 2번은 남성적 열정을 대변하는 곡 중의 하나인 까닭에, 이지적이고 때로는 차갑게까지 들리는 폴리니의 연주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견도 있다. 그렇더라도 쇼팽은 폴리니의 한 시절을 대표했던 레퍼토리다. 차분하게 음악을 풀어나가는 솜씨가 역시 폴리니답다. 치밀한 음향의 조율이 돋보인다. 어둡고 무거운 악구와 부드럽고 섬세한 악구를 견실하게 조탁해가는 연주력이 탁월하다. 자칫하면 오버하거나 그 반대로 맥이 빠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 쇼팽의 소나타 2번일 터. 하지만 폴리니의 연주는 두고두고 들을 수 있는 모범적인 사례다. 2008년의 새로운 녹음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좋다.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2008년/Naive
개성이 넘치는 강렬한 연주다. 소콜로프는 1950년 레닌그라드 태생. 러시안 피아니즘의 계승자답게 파워풀하면서도 섬세하고 영롱한 연주를 들려준다. 리듬과 템포의 운영은 기존의 쇼팽 연주들에 비해 좀더 자유스럽다. 유니크한 음악을 창조하려는 자신감 있는 태도를 엿보게 한다. 어딘지 관조적인 폴리니의 스타일에 비하자면 훨씬 더 음악이 피부로 육박해오는 느낌을 준다. 1악장 서주부터 듣는 이의 귀를 붙들어맨다. 특히 소나타 2번이 가진 강약의 대비, 애틋한 서정과 남성적인 폭발력의 대비를 선명하게 구사하고 있는 호연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장의 CD에 24개의 전주곡과 소나타 2번을 함께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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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열엄
2014.06.25
ik7723
201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