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크로스> 진화한 복수극의 귀환
좋은 구조란 효율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가끔 소설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한다. 좋은 구조를 갖춘 소설에서는 요소 하나하나가 낭비 없이 사건의 절정으로 향하기 위한 키로 사용되고, 영리한 작가일수록 아주 적은 페이지, 적은 개수의 문장으로 독자들을 납득시킨다. 군더더기와 곁가지를 쳐내고 핵심만 남긴 소설은 전달코자 하는 메시지에 주력하고, 자연스레 좋은 구조가 완성된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능력은 ‘극이 얼마나 좋은 구조를 갖췄는지’로도 알 수 있다. 지지부진 군더더기가 많은 이야기일수록 효율성은 떨어지고 잡고자 하는 필연성은 사라진다. 훌륭한 드라마일수록 씬의 개수가 아닌 양질의 연출과 텍스트로 시청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맙게도, 이런 효율성을 단 두 시간의 방송분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지난 수요일 첫 방송을 시작한 <골든 크로스>도 그렇다.
출처_ KBS
드라마는 두 가족의 단상을 통해 현대사회의 명암을 그린다. 이런 시도는 꽤 성공적이고, 언뜻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 그것도 꽤 잘 쓰인 몇몇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소설들은 범죄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드라마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개인적 복수와는 다른 차원에 위치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첫 주 방송분에서 드라마는 두 부녀를 대조시키고, 의도적인 대비는 눈을 잡아끈다. 출세해서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 다짐하는 하윤(서민지 분)과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주완(이대연 분)은 아주 이상적인 부녀의 모습처럼 보인다. 하지만 밖으로는 성매매를 일삼고 사리사욕을 위해 음모를 꾸미는 동하(정보석 분)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경애하는 이레(이시영 분)의 모습은 곧 다가올 관계의 종말을 예감케 한다. 청렴한 경제인의 탈을 쓰고 사회악적 행위를 일삼는 동하가 이레에게만은 더없이 다정하고 넉넉한 아버지라는 것은 이 캐릭터의 이중적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주완 부녀와의 대조를 더욱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두 자애로운 아버지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택할 길이 다르다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살인죄를 뒤집어써서라도 아들과 아내를 지키려하는 주완의 선택은 안타까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동하의 경우 타인을 해치고 진실을 숨겨 살아남으려 한다. 당장은 살인죄를 뒤집어쓴 주완의 선택이 가족에 파멸을 가져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두 아버지의 선택이 제 가족에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점도 역시 흥미롭다.
장점을 더 꼽아볼까. 서사성을 갖춘 작품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들의 기초를 다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골든 크로스>는 그 부분에서 매우 잘 된 작품이다. 평생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청렴하게 살아온 강주완이나 음모에 휘말려 결국 목숨까지 잃고 만 하윤의 설정은 아주 설득력 있다. 이 가족에게 닥칠 비극을 설명하는 장면들은 효율적으로 잘 배치되어 있으며 개연성도 뛰어나다. 한 가정에 닥친 비극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음모의 여파로 설정한 것도 그런 장면 중 하나다.
동하 역시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하윤에 자신의 아내를 투영하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장면에선 그의 억눌린 본성이 튀어나온다. 복수를 위해 혐오하는 아내와 함께 살 수밖에 없었던 평생 동안 그는 억압받았을 것이다. 아내에게 비웃음당하고 장인에게 복종하며 복수라는 한 가지 일념을 위해 살았지만 분명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사회적 성공으로 공허를 달래려 했지만 물론 뜻대로 되지 않았을 테고. 인간은 모두 두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동하는 딸 앞에서는 자상한 아버지로, 장인과 아내 앞에서는 비(非)인간으로, 밖에서는 성공한 경제인으로 살며 본성을 눌러왔다. 그 억압된 욕망을 분출하는 부분은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 장면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출처_ KBS
주인공 도윤(김강우 분)을 볼까. 그는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을 계기로 제 인생관을 바꾸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작가의 전작인 <각시탈>에서 이강토(주원 분)가 난세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데 비해, 도윤은 일종의 안티히어로, 즉 반영웅이 될 것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아버지가 평생을 목숨처럼 여겨온 가치를 부정하며 제2의 삶을 시작할 이 캐릭터는, 강토가 형 강산(신현준 분)이 지키려 했던 가치를 이어받아 각시탈이 된 것과 정반대의 이유로 드라마의 중심에 설 것이다. 이 캐릭터엔 마음을 끄는 데가 있다. 아버지와 동생을 파멸로 몰고 간 기득권층에 권력과 부를 이용해 응징에 나서겠지만, 결국 정의와 진실을 쫓게 될 인물이기에.
그의 역할이 단순한 복수극의 히어로에서 그치지 않길 바란다. 악역들이 나름의 드라마를 형성하고 연민을 이끌어낼 동안 어영부영 머무르는 주인공은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황금과 권력 이상의 가치를 깨닫고, 그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캐릭터로서 연민과 공감 이상의 것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회파 추리소설에 빗댈 수 있을 만큼 드라마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조명한다. 노동자를 무시한 기업의 일방적인 정리해고나 사리(私利)를 위해 국가경제를 뜻대로 주무르는 고위층, 연예인 스폰서 등 다양한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이런 이슈들은 시청자들에게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기회를 제공하고, 필연적인 결과를 위해 촘촘히 배치되어 있어 이야기에도 도움을 준다.
배우들의 열연도 볼만한 요소다. 서동하를 연기하는 정보석의 열연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하윤에게 아내 세령(이아현 분)을 투영하며 분노와 증오,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폭발시키는 장면은 가히 최고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장면이었다. 또한 2회 말미, 사건을 조작하려는 검은 손에 분노하면서도 아들과 아내를 살리기 위해 오열하며 없는 죄를 자백하는 배우 이대연의 열연 역시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장면 중 하나다.
3,4회, 아들과 딸은 아버지와 관계된 진실을 찾기 위한 길에 나선다. 그 끝에 있는 것은 결코 마주하기 힘든 추악한 진실, 그리고 인정하기 힘든 잔혹한 현실이다. 가련한 인물들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뒤흔들 파국 이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테다. 자신이 목숨처럼 지켜온 신념을 버리고, 운명적인 고행을 떠나게 될 그들의 이야기를 기대한다. 개인적으로, 최근 많은 드라마들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종영하는 데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부디 1,2회의 완성도를 종영까지 보여주는 작품이 되길, 복수의 통쾌함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드라마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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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