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그 주변에서 서성거린 기록들
시적 감성이 인문학적 통찰을 만나 황홀하게 피어난 산문들. 독자들을 매료하는 빼어난 감각과 밀도 있는 문장에 빠져들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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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말을 줄이고 줄여서 침묵에 닿고자 했던 내 의도가 이루어졌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문자 언어를 가장 적게 쓰는 글의 한 형식에 경도된 적이 있다. 바로 하이쿠다. 하이쿠는 말의 내핍, 말의 살을 발라내고 앙상한 뼈만 남기는 시다. 하이쿠의 직계존비속 같은 산문을 쓰고자 했던 내 의도는 속절없이 실패했다. 남은 것은 침묵의 잔해 같은 것들이다. 침묵은 정보, 소통, 지식의 부정이고 폐기다. 즉, 마음의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일체 끊음이다. 침묵은 여백, 백지, 고요다. 침묵의 외면적 형상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내가 침묵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침묵에 근접해서 그 중심에 서린 고요의 질량에 놀라 나는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돌아섰다.

침묵 면전에서의 망설임, 놀라움, 무서움에 마음의 여린 부분이 긁혔다. 가까스로 몇 마디 짧은 말들로 응고된 것들은 그 긁힘의 자국들이다. 나는 실재에서 가장 먼 것들을 더듬거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마음의 가장자리에 바글거리는 아득함은 무, 영원, 우주 따위와 아주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다. 그것들은 항상 마음 안에서 한 줌의 불로 타오른다. 나는 얇은 날개를 가진 곤충처럼 자고 깨면서 불현듯 《논어》의 한 구절, “어찌 네 생각을 하지 않으리오만, 네 집이 멀구나.”를 떠올렸다. 나는 오래 이역異域들을 떠돌고 있으니, 네 집은 멀구나!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화가가 되기엔 노동의 강도를 감당할 만한 근력이 모자라고, 요리사가 되기엔 혀가 불행의 감미에 무감각하고, 뮤지션이 되기엔 절대 음감을 타고나지 못했다. 땅을 칠 만큼 분한 노릇이다. 그나마 글쓰기는 겨우 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꾸역꾸역 무언가를 끼적였다. 하지만 장미의 기쁨과 우울, 피아노의 내면에 숨은 강건한 노동의 구조, 돌의 기복이 심한 감정, 정강이의 심미적 위치에 대해서 나는 쓰지 못했다. 나는 몽중생사夢中生死의 일, 가느다란 속삭임, 희박한 아름다움에 경도된 마음의 자취들에 관하여 겨우 몇 자를 적었다. 이 책의 글들이 짧아진 사정은 그와 같다.

책의 제목으로 쓴 것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구절이다. 곤핍한 시절에 어리석은 글들을 모아 반듯하게 책을 꾸려 준 후배 시인들 김종훈, 김근, 이영주 시인께 감사드린다.

 


글  장석주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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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어디에서 구할까 장석주 저 | 서랍의날씨
그동안 장석주가 펴내거나 발표한 글 중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들을 뽑아 새로 제목을 붙여 묶은 책이다. 다독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통찰은 남과 다른 시각으로 일상과 사물, 개인적 경험 들을 들여다본다. 그는 비 온 뒤 느리게 기어가는 달팽이에서 위빠사나 수행자를 떠올리고 찰나라는 시간을 통찰하는 사람이다. “흘러가 버린 시간과 흘러오는 시간 사이에 찰나가 꽃봉오리를” 열며, “그 찰나에서 삶은 빛난다”는 문장은 그 자체로 시이며 철학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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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어디서 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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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 시인, 에세이스트, 인문학 저술가. 그밖에 출판 편집자, 대학 강사, 방송 진행자, 강연 활동으로 밥벌이를 했다. 현재 아내와 반려묘 두 마리와 함께 파주에서 살고 있다. 1955년 1월 8일(음력),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스무 살이던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하고, 스물 넷이 되던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와 문학평론이 입상하면서 등단 절차를 마친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직접 경영하는 동안 15년간을 출판 편집발행인으로 일한다.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학교, 명지전문대에서 강의를 하고, 국악방송에서 3년여 동안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진행자로도 활동한다. 2000년 여름에 서른여섯 해 동안의 서울생활을 접고 경기도 안성의 한적한 시골에 집을 짓고 전업작가의 삶을 꾸리고 있다. 한 잡지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소장한 책만 2만 3,000여 권에 달하는 독서광 장석주는 대한민국 독서광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쓴다고 해서 안으로만 침잠하는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다. 스무 살에 시인으로 등단한 후 15년을 출판기획자로 살았지만 더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되자 업을 접고 문학비평가와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왔다. 급변하는 세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보다 잘 소통하고 교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성에 있는 호숫가 옆 ‘수졸재’에 2만 권의 책을 모셔두고 닷새는 서울에 기거하며 방송 진행과 원고 집필에 몰두하고, 주말이면 안식을 취하는 그는 다양성의 시대에 만개하기 시작한 ‘마이너리티’들의 롤모델이다.” 저서로는 『몽해항로』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일요일과 나쁜 날씨』, 『행복은 누추하고 불행은 찬란하다』,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이상과 모던뽀이들』,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일요일의 인문학』,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고독의 권유』, 『철학자의 사물들』,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시간의 호젓한 만에서』,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공저) 등이 있다. 애지문학상, 질마재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