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줄이고 줄여서 침묵에 닿고자 했던 내 의도가 이루어졌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문자 언어를 가장 적게 쓰는 글의 한 형식에 경도된 적이 있다. 바로 하이쿠다. 하이쿠는 말의 내핍, 말의 살을 발라내고 앙상한 뼈만 남기는 시다. 하이쿠의 직계존비속 같은 산문을 쓰고자 했던 내 의도는 속절없이 실패했다. 남은 것은 침묵의 잔해 같은 것들이다. 침묵은 정보, 소통, 지식의 부정이고 폐기다. 즉, 마음의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일체 끊음이다. 침묵은 여백, 백지, 고요다. 침묵의 외면적 형상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내가 침묵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침묵에 근접해서 그 중심에 서린 고요의 질량에 놀라 나는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돌아섰다.
침묵 면전에서의 망설임, 놀라움, 무서움에 마음의 여린 부분이 긁혔다. 가까스로 몇 마디 짧은 말들로 응고된 것들은 그 긁힘의 자국들이다. 나는 실재에서 가장 먼 것들을 더듬거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마음의 가장자리에 바글거리는 아득함은 무, 영원, 우주 따위와 아주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다. 그것들은 항상 마음 안에서 한 줌의 불로 타오른다. 나는 얇은 날개를 가진 곤충처럼 자고 깨면서 불현듯 《논어》의 한 구절, “어찌 네 생각을 하지 않으리오만, 네 집이 멀구나.”를 떠올렸다. 나는 오래 이역異域들을 떠돌고 있으니, 네 집은 멀구나!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화가가 되기엔 노동의 강도를 감당할 만한 근력이 모자라고, 요리사가 되기엔 혀가 불행의 감미에 무감각하고, 뮤지션이 되기엔 절대 음감을 타고나지 못했다. 땅을 칠 만큼 분한 노릇이다. 그나마 글쓰기는 겨우 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꾸역꾸역 무언가를 끼적였다. 하지만 장미의 기쁨과 우울, 피아노의 내면에 숨은 강건한 노동의 구조, 돌의 기복이 심한 감정, 정강이의 심미적 위치에 대해서 나는 쓰지 못했다. 나는 몽중생사夢中生死의 일, 가느다란 속삭임, 희박한 아름다움에 경도된 마음의 자취들에 관하여 겨우 몇 자를 적었다. 이 책의 글들이 짧아진 사정은 그와 같다.
책의 제목으로 쓴 것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구절이다. 곤핍한 시절에 어리석은 글들을 모아 반듯하게 책을 꾸려 준 후배 시인들 김종훈, 김근, 이영주 시인께 감사드린다.
글 장석주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
-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어디에서 구할까 장석주 저 | 서랍의날씨
그동안 장석주가 펴내거나 발표한 글 중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들을 뽑아 새로 제목을 붙여 묶은 책이다. 다독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통찰은 남과 다른 시각으로 일상과 사물, 개인적 경험 들을 들여다본다. 그는 비 온 뒤 느리게 기어가는 달팽이에서 위빠사나 수행자를 떠올리고 찰나라는 시간을 통찰하는 사람이다. “흘러가 버린 시간과 흘러오는 시간 사이에 찰나가 꽃봉오리를” 열며, “그 찰나에서 삶은 빛난다”는 문장은 그 자체로 시이며 철학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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