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으르렁말과 가르랑말, 들어봤니?”
지난 11월 19일, 어김없이 고종석의 한국어 글쓰기 강좌가 시작되었다. 추운 날씨에도 수강생들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고종석은 교실을 가득 메운 수강생들에게 새삼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글ㆍ사진 정연빈
201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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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수업은 고종석의 『자유의 무늬』 중 「‘기념비적 대작’의 정치학」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고종석은 천천히 글을 읽어나가며 수정할 부분들을 찾아냈다. 가장 먼저, 복수가 명시되어 있는 문장에서 ‘-들’을 지적했다. ‘너무 많은 기념 조형물들’ 같은 표현은 한국어에서 어색하게 느껴진다. ‘들’을 빼고 쓰는 게 좋다. 같은 맥락에서 ‘이른바 기념비적 대작들이 수두룩하다’에서도 ‘수두룩하다’에 복수가 드러나므로 ‘들’을 빼는 게 더 자연스럽다. 수강생 중 하나가 ‘표상’이라는 말이 어렵다고 하자 ‘드러내왔다’로 고쳐 쓰라고 권했다.




‘자기자신’으로 붙여 쓰는 경우도 많다

이어 ‘자기’와 ‘자신’의 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들은 학교 문법에서 명사로 취급되며 특히 재귀대명사로 자주 쓰인다. 한국어는 일반대명사가 재귀대명사로 사용되는 독특한 용법이 있다. 이를테면, ‘박근혜대통령은 그녀를 존중한다’에서 ‘그녀’는 ‘다른 여자’와 ‘박근혜 대통령 자기 자신’을 모두를 가르킬 수 있는 중의적 표현이 된다. 이런 표현은 명백하게 재귀대명사가 정해져 있는 유럽어에서는 불가능하다.

흔히 ‘자기’와 ‘자신’을 비슷하게 생각하는데 둘 사이에는 기능적 차이가 있다. ‘자기’와 달리 ‘자신’은 체언 뒤에 붙어서 그 주어를 강조할 수 있다. ‘자기’와 ‘자신’을 붙여 쓰는 용법도 있다. ‘자기자신’으로 말이다. 원래 맞춤법상으로는 ‘자기’와 ‘자신’을 떼어 써야한다. 하지만 요즘문법학자 대부분은 ‘자기자신’을 ‘자기’나 ‘자신’과 다른 제3의 재귀대명사로 보기 때문에 ‘자기자신’으로 붙여 쓰는 경우도 많다.

고종석은 다음 예문으로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자신’을 설명했다. ‘피터는 메리에게 폴이 자기를 때렸다고 말했다’에서 ‘자기’는 문장 전체의 주어를 받는다. 하지만 ‘피터는 메리에게 폴이 자기 자신을 때렸다고 말했다’에서 ‘자기자신’은 폴이 된다. ‘자기자신’은 동일한 절 안의 주어를 받기 때문이다. 한편, ‘피터는 메리에게 폴이 자신을 때렸다고 말했다’에서 ‘자신’은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고종석은 이런 이유로 재귀대명사로 사용할 때는 자신을 쓰지 않는 편이 좋다고 했다. 의미 전달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체할 말에는 ‘스스로’가 있다. ‘자신’을 재귀대명사로 보는 학자들은 ‘스스로’도 재귀대명사로 처리한다. ‘서로’ 역시 비슷하게 재귀대명사로 쓰인다. 고종석은 ‘스스로가 그 일을 해냈어’ 나 ‘그들은 서로 사랑했어’를 예로 들어 재귀대명사로 사용되는 것을 설명했다. 물론, 학교 문법에서 인정하는 건 아니다.

그때, 누군가 ‘재귀대명사’가 한국어에 있는 개념인지 물었다. 고종석은 문법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명사, 대명사 같은 품사를 나누는 작업이라는 말로 설명을 시작했다. 특히, 한국 문법은 일본에서 시작된 난학과 영어 문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기에는 한국어에 재귀대명사가 없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몇 십 년 전부터 이들을 재귀대명사라고 말하고 있다. 학교 문법에선 아직 명사나 부사로 취급되지만 학계에서는 재귀대명사를 인정하는 추세가 짙어지고 있다.




이름의 편견을 제거하는 것 중요하지만

계속해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이는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했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감한 금기어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였다. 이들은 ‘깜둥이’나 ‘흑인’이라는 말 대신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을, ‘정신박약’이라는 말 대신 ‘학습곤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파출부’가 ‘가사도우미’로, ‘보험외판원’이 ‘보험설계사’나 ‘생활설계사’로, ‘청소부’가 ‘환경미화원’으로 바뀐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다.

고종석은 PC가 어떤 이름에서 편견을 제거하려는 중요한 노력이긴 하지만 늘 효과적이진 않다고 말했다. 원래 이름에 붙어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들은 금세 새 이름으로 옮겨 붙는다. 그래서 PC를 반대하는 사람 중에는 보수주의자들 뿐 아니라 가장 급진적인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공정함 자체를 바로잡지 않는 한, 말을 바꾸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런 대처가 사회 경제적 상태의 진보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비판이 있다는 거다.

두 번째로 읽은 글은 「무서운 신세계」였다. 이 글은 불법체류 외국인에 대한 집중단속으로 시작해 길에서 담배꽁초가 점점 사라지고 지하철에서 걸인들을 찾기 힘들게 변하는 사회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나아지는 것은 없이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만드는 사회가 더 억압적이라는 이야기였다.

고종석은 글 첫머리에 등장하는 ‘우리들의 닫힌 마음’을 ‘한국인들의 닫힌 마음으로’으로 바꾸었다. 글의 의미가 더 명확하게 들어오도록 수정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근로기준법’은 ‘대한민국 근로기준법’으로 고쳤다. ‘사회의 구성원’에서는 ‘-의’를 빼고 ‘사회구성원’으로 써도 충분히 의미가 통한다. 고종석은 한국이 산재나 교통사고가 잦기 때문에 장애인 비율이 높을 텐데 길에서 장애인들과 마주하는 일이 적다고 말하며 한국사회의 억압적 속성을 지적했다.


낯설지만 신선한 표현

다음으로 ‘서로 다른 피부빛깔의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할 때 자유의 옹호자들은 편안하다. 그들이 요즘처럼 거리에서 자취를 감출 때 자유의 옹호자들은 불안하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이 문장에서 ‘편안하다’ 와 ‘불안한다’ 같은 심리 형용사가 ‘자유의 옹호자’라는 삼인칭에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독자가 ‘자유의 옹호자’가 글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사용해도 좋다.

그는 ‘법의 문제’와 ‘마음가짐의 문제’에서 ‘-의’의 삭제했다. ‘사용자가 근로자에 대하여’는 ‘사용자가 근로자에게’로 바꾸는 게 훨씬 자연스럽게 읽힌다. ‘국적을 이유로 차별적 근로조건을 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문장은 ‘근로조건을 차별하지 못하게’로 고쳐 쓰는 게 좋다. 고종석은 많은 수강생이 ‘현실은 가파르다’에서 ‘가파르다’는 표현을 지적했다고 말하면서 이 부분은 글쓴이의 독창적 표현이라 그대로 두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한 수강생이 낯설기는 하지만 신선한 표현이라 말했다.

이어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한국인 사용자들이 저지르는 온갖 형태의 인권침해’는 ‘이주 노동자들에게’로 수정했다. ‘거의 노예노동에 가깝게 만든다’에서 서술어가 ‘가깝게 만든다’인 만큼 ‘거의’는 필요하지 않다. ‘시민들’에서 ‘-들’을 제외하고 ‘외국인들 가운데 일부’에서는 ‘가운데’를 삭제했다. ‘혼혈인들에 대해 내보이는 태도’는 ‘혼혈인을 대하는 태도’로 고쳐 쓰는 게 좋다. 고종석은 ‘한국은 혼혈아들이 정상적으로 자라나기가 불가능한 드문 사회 가운데 하나다’에서 ‘불가능한’은 과장이 심하니 ‘힘든’, ‘어려운’ 으로 고치자고 제안했다. 글을 다 읽고 난 고종석은 이 글이 불순함과 더러움을 옹호하는 글이라 말하며 깨끗하고 순수한 것을 옹호하는 공동체는 억압적일 수 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평소에 쓰는 말은 중립적이지 않다

두 편의 글을 읽은 다음, 고종석은 새무엘 하야카와(Samuel Hayakawa)에 대해 언급했다. 캐나다 출신 일본계 미국인 언어학자인 새무엘 하야카와는 『생각과 행동 속의 언어』라는 책에서 언어의 함축 의미를 따져보며,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으르렁 말은 “이런 버러지 같은 놈!”(You filthy scum!)을, 가르랑말은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여자야”(You’re the sweetest girl in all the world)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으르렁 말은 남을 위협하거나 모욕하는 언어이며, 가르랑말은 남의 호감을 사려는 언어행위다. 이 두 언어에서는 중립적 정보기능이 거의 사라지고 표현적 기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이 말들은 개념보다 정서를 전달한다. 으르렁말의 극단적 형태는 욕설과 저주이며, 가르랑말의 극단적 형태는 연인들의 밀어를 꼽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평소에 쓰는 말은 중립적이지 않다. ‘스파이’나 ‘첩보원’은 나름대로 중립적이지만 ‘밀정’이라는 낱말을 선택하면 명확한 으르렁말이 된다. 이는 ‘중매인’과 ‘뚜쟁이’의 차이에서도 잘 드러난다. 때로는 같은 말도 사용주체에 따라 다른 말이 된다. 어떤 입장에서 어떤 의도로 사용했느냐에 따라 언어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같은 말이 그렇다.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주의’는 긍정적 의미였지만, 현재는 중립적인 맥락이 더 많이 생겨나고 있다. 그런가하면 현재 독일에서 ‘민족주의’는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빠’와 ‘-까’의 언어에서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적극적인 지지자를 뜻하는 ‘-빠’와 거세게 비판하는 사람을 뜻하는 ‘-까’는 누가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다는 정서적 판단에 익숙한 둔 사람들이다. 이미 어떤 정서에 매혹된 사람들에게 ‘사실’과 ‘논리’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다. ‘-빠’의 언어들은 이른바 가르랑말(purr words)에 속하고, ‘-까’의 언어들은 이른바 으르렁말(snarl words)에 속한다. 고종석은 그러나 으르렁말로 생겨나서 가르랑말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노빠’를 소개했다. ‘노빠’는 노무현전대통령의 지지자들의 뜻하는데, 처음에는 ‘정의의 독점’, ‘감상주의’ 등을 표현하기 위해 상대진영에서 만들어낸 비하적 발언이었다. 하지만 대선에서 이기고 난 뒤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노빠’라 칭하며 긍정적인 언어로 바꾸어냈다. 이때 ‘노빠’는 ‘개혁’, ‘지역주의반대’, ‘리버럴리즘’ 등의 가치를 대변한다.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은 글쓰기에서 주로 사용할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에따라 중요한 글쓰기 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정치 팸플릿에서는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의 활용이 중요하게 사용된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선거 진영에서는 ‘놀부를 뽑을것인가 흥부를 뽑을것인가’, ‘원균을 뽑을것인가 이순신을 뽑을것인가’와 같은 정치 카피를 사용했다. 지금은 다소 유치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상대진영을 비하하며 자신에게 호감을 주는 형태로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을 활용한 예로 볼 수 있다. 이 언어는 광고 카피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고종석이 광고에 대해 언급하자 수강생들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새로운 개념인 으르렁말과 가르랑말, 그리고 광고와의 연결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종석은 시계를 가리키며 이미 끝날 시간이 지났다고 말했다. 짐을 챙길 생각을 하지 않는 수강생들에게 고종석은 날도 춥고, 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라 말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모습에 수강생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늘 그렇듯 아쉬운 마음으로 아홉 번째 강의가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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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자유의 무늬 #생각과 행동 속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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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빈

북극곰이 되기를 꿈꾸며 세상을 거닐다.
어지러운 방에 돌아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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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간결하면서도 냉철한 글로 유명한 고종석은 이 시대 유명한 저널리스트이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과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언어학 석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법학과 언어학을 공부했지만 문학이나 저널리즘에 관심을 가진 그는 24세에 한 영어 일간지의 기자가 된 이 후 지금까지 직업적 저널리스트 생활을 해 왔다. 좋아하는 작가는 애거서 크리스티, 에릭 시걸, 존 그리셤 같은 영어권의 대중 소설가이고, 저널리즘에 대한 취향이 까다로운 그가 선택한 신문은 르몽드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정도이다. 그를 정서적으로 압도한 최초의 책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눈물을 훔쳐내며 읽은 심훈의 『상록수』이며, 그를 지적으로 압도한 최초의 책은 고등학교에서 내쳐져 자유롭던 열 일곱 살 때 골방에서 담배 피우기를 익히며 읽은 노먼 루이스의 『워드 파워 메이드 이지』다. 그는 자신의 문체에서 에릭 시걸과 김현과 복거일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자신의 생각에서 칼 포퍼와 김우창과 강준만을 느낀다. [코리아타임스], [한겨레신문], [시사저널] 등지에서 스물 두 해 동안 기자 노릇을 한 그는 2005년 봄 [한국일보] 논설위원직을 끝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의 멍에와 명예에서 벗어났다. 현재 도서출판 개마고원 기획위원으로 있다. 나이에 걸맞은 가장 노릇을 못하며 살아온 터라, 그는 더러 자신이 객원남편, 객원아비, 객원자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득 자신을 객원한국인이나 객원인류로 여길 때도 있다. '객원'의 비정규성과 느슨함이 베푸는 자유의 감촉을 그는 무책임하게도 흐뭇해하는 편이다. 언젠가 페르시아어로 '루바이어야트'를 읽어보는게 꿈이다. 특별히 집착하는 기호품은 디스 플러스 담배와 붉은 포도주와 아스피린이다. 지은 책으로는 사회비평집 『서얼단상』, 『바리에떼』, 『자유의 무늬』,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경계 긋기의 어려움』, 문화비평집 『감염된 언어』, 『코드 훔치기』, 『말들의 풍경』, 한국어 크로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어루만지다』, 『언문세설』, 『국어의 풍경들』, 역사인물 크로키 『여자들』, 『히스토리아』, 『발자국』, 영어 크로키 『고종석의 영어 이야기』, 시 평론집 『모국어의 속살』, 장편소설 『기자들』, 『독고준』, 『해피 패밀리』, 소설집 『제망매』, 『엘리아의 제야』, 여행기 『도시의 기억』, 서간집 『고종석의 유럽통신』, 독서일기 『책 읽기, 책 일기』, 에세이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등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게 다예요(C'est tout)』, 『어린 왕자』를 우리 말로 옮겼다. 주저主著 『감염된 언어』는 영어와 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