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불행한 건 아닌 중세여성, 모두 행복한 건 아닌 현대 여성
중세 여성이라고 다 불행했던 것도 아니고 현대 여성이라고 다 자신의 시대가 행복한 것도 아니다. 또 여성에게 유리한 것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편리를 꾀하는 얌체족 여자도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이건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가치는 있으며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불변의 가치라는 점.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글ㆍ사진 박신영
201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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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윤모 아저씨의 성추행 관련 뉴스를 인터넷 매체에서 읽다가 흥미로운 댓글들을 발견했다. 그가 여성에 대하여 ‘중세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비판 댓글이 많이 달렸던 것이다. 왜 우리는 여성들에게 나쁜 상황이 벌어지면 현시대에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세적 상황이라고 하며, 그런 짓은 중세 시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할까? 여성들이 살기에 지금은 중세와는 완전히 다른, 살기 좋은 시대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이런 언급을 하는 것일까? 아, 궁금하다. 추가 댓글 달고 싶어라!

비슷한 경우가 더 있다. 첫 책을 낸 후, 책 읽는 여자, 역사 에세이 쓰는 여자로서의 나란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할 때가 종종 생긴다. 자연스레 나의 개인적 경험을 말하게 된다. 늦은 밤 퇴근 길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책 읽고 있는 나에게 “니 까짓게 여자 주제에 책을 읽어?”하며 시비 거는 술 취한 아저씨를 만난 일이나 아침에 들어간 가게에서 “안경 쓴 여자가 첫 손님으로 와서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은 경험 등등… 그런데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 열에 일곱은 이런 불편한 반응을 내게 보인다. “진짜야? 세상에, 요즘에도 그런 일이 있어? 조선 시대도 아닌데?” 심지어는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다. “요즘이 중세냐? 어디 달나라 갔다 왔냐? 피해의식에 쩔어 겪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는군! 너 꼴페지?” 얼마전 내 인터뷰 기사에도 그런 댓글이 달렸다. 아, 못 참겠다. 답 댓글 달고 싶어라!

아, 안심하시라. 친구들은 내가 댓글 단 사람들과 볼썽사납게 싸워댈까봐 걱정이시지만, 학구적인 난 단지 궁금해서 그분들께 정중히 묻고 싶을 뿐이다. “저, 중세 여성사에 대해 어떤 책을 읽으셨어요?”


서양사에서 중세 시대(Middle Ages)란?

서양사에서 중세 시대(Middle Ages)란 보통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 때부터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1453까지의 약 천 년에 달하는 시기를 말한다.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하는데,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시기, 혹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세가 끝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서양의 중세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는 3대 명저는 다음과 같다. 마르크 블로흐의 <봉건사회>와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 그리고 아일린 파워의 <중세의 사람들>. 하지만 중세의 여성들에 대한 본격적인 저작물들은 비교적 늦은 시대인 1980년대 즈음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여성사 연구는 주로 여성의 참정권 획득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근현대사 위주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중세 여성사가 학자들 사이에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그 성과가 일반 독자들에게 논문 아닌 대중적 역사서들을 통해 알려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중세의 여성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의 영화나 역사 소설 등에 그려진 대중적이고 약간 흥미 위주로 변형된 이미지에 근거한 경우가 많다.


<아내 구타> 독일, 1456년, [출처 : <제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325쪽 삽화]


‘남편이 아내를 때릴 권리’가 있었던 중세

물론 현대 여성들에 비해 중세 여성들의 처지가 모든 방면에서 훨씬 열악했음은 굳이 두꺼운 역사책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중세기 거의 모든 나라의 법전에는 공식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때릴 권리’가 명시되어 있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서양 중세를 떠올릴 때 일반적으로 갖는 암흑기의 이미지는 서양 중세를 지배한 종교인 가톨릭에서 유래하듯이 서양 중세의 여성을 떠올릴 때 공통적으로 갖는 불행과 억압의 이미지 역시 가톨릭에서 유래한다. 서양 중세 사회에서 법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고 여성의 열등함을 규정짓는 근거는 교회법이었기 때문이다. 교회법은 여성 차별의 근거를 여성이 남성보다 늦게 창조되었으며 뱀의 유혹에 넘어가 인간에게 원죄를 짓게 했다는 점에 두었다. 이렇게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한 가치가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공개적으로 규정지었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대단한 현실적 억압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기 구분에서 중세는 고려시대였다. 하지만, 앞서 윤씨 아저씨의 기사에 고려 시대가 아니라 “지금이 조선시대냐?”라는 댓글이 달린 것으로 보아 여성 차별에 있어서 시대를 거론하는 것은 단순한 연대 구분이 아니라 그 시대의 현실을 지배하는 강력한 차별 이론의 존재 유무가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서양 중세 여성사의 좋은 길잡이 <제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서양 중세 여성사의 좋은 길잡이이며 제목부터 중세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를 느끼게 해 주는 책으로 <제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가 있다. 중세 유럽 사회는 세 위계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성직자, 전사, 농민)’라는 사회적, 직업적 신분 체계이다. 얼핏 보기에 ‘제 4신분’이라는 이 책의 도발적인 제목은 중세 여성이 앞의 세 신분 아래에 놓인 최하층의 신분이었다는 의미로 보인다. 아마 중세 여성에 대해 현대인인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이미지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저자인 슐람미스 샤하르는 신분이나 지위, 직업을 초월하여 ‘중세 여성을 하나의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해 호기심 유발을 했을 뿐이다.

저자는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다양한 계급에 속하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중세 서유럽 여성들의 삶을 방대한 문헌 자료를 통해 재구성한다. 결과적으로 중세의 여성은 별개의 차별받는 한 신분이었다기보다는 귀족 여성이건 도시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한 여성이건 농민 여성이건 수녀이건 이단 분파에 속한 신앙 운동을 한 여성이건… 각각 속한 사회적 위치에서 같은 위치의 중세 남자들에 비해 모두 하층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체적으로 같은 억압을 받는 중세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각각의 여성들이 처한 계급, 사회 경제적 지위와 개인적 상황에 따라 각각의 여성들이 받는 중세 봉건적 억압의 정도는 모두 달랐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다 억압받았던 것도 아니다. 영지를 상속할 권리를 가진 귀족 여성의 경우, 현대의 어느 여성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많이 발휘하며 살기도 했다. 또 교회와 법은 남녀의 차이와 차별을 인정했지만 중세 사회에서는 성별에 따른 노동 분화는 거의 없었다. 여성 농노들은 남성 농노들 못지 않게 힘든 노동을 견디고 영주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녀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계층에서도 의무 이행 정도와 상관없이 여성의 권리는 남성의 권리보다 보장되지 않았다. 바로 이 점만이 중세의 모든 여성들을 상징적으로 ‘제 4 신분’이라 묶을 수 있는 공통 요소이다.

[출처 : 구글]

자, 그랬다. 중세 여성들은 확실히 당시 남성들에 비해 차별받았으며 힘들게 살았다. 그렇다면 현대 여성들은 모두 중세의 그녀들과 다르게, 더 잘,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위의 책에서 저자가 각종 자료들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 낸 각계각층 중세 여성들의 삶을 읽고 있노라면,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어랍쇼? 지금과 거의 다를 바가 없네?”


여성의 처지는 중세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남성들의 노동력이 부족해지면 그때만 여성 임금이 오르고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는 1,2차 세계대전 시기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중세 흑사병 창궐 이후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도시의 남성 노동자들은 그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그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여 같은 직종에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증오했다고 한다. 이는 근대 산업화 초기 노동집약적 경공업에 종사하는 남녀 노동자들의 갈등을 서술한 문장이 아니다. 중세 내내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하는 여성들은 집 밖의 일을 마치고 귀가해서는 또 가사일을 해야 하는 이중 노동에 시달렸다. 이는 현대의 직장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중세 여성 농노들이 처한 안타까운 처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이나 중세나 별다른 것이 없다. 심지어 드라마에 빠진 현대 여성들과 중세의 궁정풍 문학과 로맨스 시가에 빠진 중세 여성들도 거의 같아 보인다. (현실을 떠난, 현재 내 옆에 있는 남자와 다른 남자와의 낭만적 사랑을 꿈꾼다는 것은 이상적인, 다른 질서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일부의 남성들이 비판하듯 여자들의 머리가 비어서 돈 많고 능력있는 미남들 보며 헬렐레 좋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중세 시대는 모든 여성들에게 깜깜한 암흑기였을까?

그런데 이런 중세 역사서에 드러난 여성들의 모습을 볼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여성에 대한 당대의 1차 사료들은 거의 다 남성 기록자가 그들의 가치관에 근거한 시각으로 보고 걸러서 기록한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재판하고나서 남성이 남긴 기록, 남성의 수녀원 방문 기록, 남성의 편지, 남성 시인이 쓴 기사도 문학… 이런 기록물들을 그대로 옮겨서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또 역사란 언제나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반복적인 것은 기록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렇다면 사건 사고 기록물에 등장하지 않는, 일하고 사랑하며 사는 평범한 중세 여성들의 삶 역시 가혹한 차별과 고난의 연속이었을까? 중세 시대가 당시의 모든 여성들에게 내내 깜깜한 암흑기였을까? 어차피 역사란 완전히 객관적인 기록물이 될 수 없다. 그 시대의 역사를 서술하는, 후대에 사는 역사가의 현실적 입장이 반영되기 마련이므로.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좋은 의미에서 목적 의식을 갖고 쓴 역사서가 더 객관적이고 훌륭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있는 그대로 현장 상황만 동영상으로 찍어 객관적으로 전달한다면 안중근 의사도 윤봉길 의사도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되어버리지 않은가. 한일 관계와 지난 역사를 설명해주는 내레이션이 그 동영상에 없다면 말이다. 자, 그렇다면 여성 저자의 의도가 대놓고 내레이션으로 들어가 있는, 다른 중세 여성사 책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아일린 파워의 <중세의 여인들>이다.


여성 저자가 쓴 중세에 살던 여성 이야기, <중세의 여인들>

이 책은 <중세의 사람들>을 쓴 아일린 파워의 중세 여성에 대한 짧은 논문과 강연 모음집이다. 논문 모음집이라는 책의 성격상, 이 책은 완벽하게 체계를 갖춘 중세 여성사 입문서는 아니다. 그러나 초기 여성사 연구에 있어서 이 책은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그 이전까지는 연회장에서 논하던 역사를 ‘부엌에서’ 논하기 때문이다. (이는 저자의 <중세의 사람들> 원문 19쪽에 'The great historian now takes his meal in the kitchen' 이라 서술한 부분을 이용한 표현임을 밝힌다.) 즉, 저자는 유명한 남성 영웅의 전쟁사 위주였던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 시선을 돌려 평범한 농민의 일상사를, 부엌의 주인공들이었던 여성들의 역사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도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합심해서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중세의 여인들>에서 저자는 우선 중세의 여성관을 언급한 후 귀족, 향반(젠트리), 중산층, 도시와 농촌의 일하는 여성들의 삷을 골고루 다뤄준다. 중세 여성의 교육과 중세의 수녀원에 대해서도 말한다. 경제사회사 학자인 저자의 서술 방식은 과부 여성의 유언장을 분석하여 그녀의 가정사와 그녀가 관리하던 장원의 이모저모를 재구성하는 식이어서 어떻게 보면 시시콜콜해 보이기도 하지만 읽다보면 어느덧 '중세를 살던 그녀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장점을 가진다. 물론 그녀들의 삶은 같은 계층의 남성들에 비해 고되고 힘들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냥 객관적인 중세 여성사 관련 자료를 제시하는 사이사이 자신의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독자인 나에게 읽다보면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전달해 주는 점이었다. 저자는 그냥 중세 암흑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도 사람 사는 세상, 서로 사랑하고 노력하는 남녀가 합심해서 살아가는 세상이었다고 자신의 주관적인 의도를 담아 서술해주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에는 여성에 대해 한편으로는 완전 복종을 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숭배하는 양극단의 사상이 정식화되어 다음 세대에 유산처럼 물려지게 되었다. 이 두 사상은 중세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로도 여성의 존재를 규정하거나 변화시켰다. 하지만 어느 하나가 중세의 보통 남자들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위치는 이론적 개념에 의해서만 정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객관적 사실들의 불가피한 힘과 일상생활에서 쌍방의 타협 등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런 객관적 사실들이 만들어낸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우월한 것도 열등한 것도 아니었으며, 대체로 남녀 간에 형평을 이루는 것이었다.
중세의 남자는 여자 없이 일상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었다. 가정의 안락을 위해서 여성에게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집을 떠나 있을 때에는 여성이 그의 일을 대신 맡아 하였고, 그 어느 시대보다 중세의 여자들이 이런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실제로 남녀 간에는 동지의식 같은 것이 존재했다.
-<중세의 여인들> 본문 68 ~ 69쪽에서 인용
또 저자는 억압받는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만을 그리지 않는다. 아무렴, 중세나 지금이나 다 사람들마다 성격이 다른 법인데, 중세 여성이라고 닥치고 울면서 순종만 했을까. 이런 신나는 일도 있었단다.

링컨 교구의 한 수녀원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주교가 수녀원을 방문하여 보니파키우스 교황의 회칙을 한 부 전하면서 수녀들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수녀들은 격분하여 주교가 말을 타고 수녀원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 따위 규정은 지킬 수 없다고 소리치며 회칙을 집어던져 주교의 머리를 맞혔다.
-<중세의 여인들> 본문 179쪽에서 인용
이런 서술은 페미니즘과 여성 참정권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던 저자의 이력과도 관계있다. 저자에 대해 맥신 버그가 쓴 전기인 를 보면, 비교적 여성사학자가 드물었던 시기, 1928년에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받았던 시기에 보수적인 영국 사학계에서 여성 사학자로서 저자가 그녀의 시대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저자의 개인사와, 저자가 쓴 중세 여성사를 같이 읽으면서 역사에 대한 가치 판단은 평가하는 사람들이 속한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 그리고 같은 시대라도 각각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회 현실에서 접하는 모든 현상에 대한 평가 역시!

[출처 : 아마존 서점]

간단히 말해서 중세의 특징적 여성관은 교회와 귀족 계급이 그들의 사상을 사회에 일방적으로 부과하던 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만약 여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이 아니라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더라면, 아마도 지배적 도그마는 달라졌을 것이다. 부유한 도시 중산층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하더라도 도그마는 다소 달려졌으리라. 교회와 귀족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나 지배적이었지만 다른 목소리들을 완전히 제압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의 여인들> 본문 34 ~ 35쪽에서 인용

모두 불행한 건 아닌 중세여성, 모두 행복한 건 아닌 현대 여성

그렇다. 어느 시대나 억압은 있었고, 또 그 억압에 굴하지 않는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차별도 있었지만 연대도 있었다. 하긴, 중세가 여성의 암흑기라는 것이 현대의 일반 독자인 우리에게 직접적으로는 뭐가 문제겠는가? 그렇게 규정짓는 이면의 시선이 문제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중세를 암흑기로 규정지으면서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이성을 과시하려는 르네상스 시기 인문주의자, 계몽주의자의 시선을 본다. 자신들의 시대는 전 시대와 다르다는 것, 자신은 각성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남성들은 역사상에 늘 있었다. 그러므로 “요즘이 중세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사는 시대와, 자신의 진보성에 대한 우월감이 깔려 있다. 현대는 중세와 다른 시대이며 현대에는 이런 일이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편견을 담아 그런 말을 할 때, 피해를 당한 여성의 문제는 이 시대의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지 열등한, 혹은 운 나쁜 그녀만의 개인적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되어 그녀의 사생활이 공격받기도 한다.

하지만 각각의 모든 여성에게는 그녀가 처한 각각 현재의 상황이 모두 다 그녀의 온전한 시대이다. 어떤 끔찍한 일이 현대에는 0.01%의 확률로 벌어지는 일이라도 그런 일을 겪은 한 여성에게는 그 현실이 그녀에게 100%로 발생한 유일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는 중세에 사는 여성도, 조선에 사는 여성도, 21세기에 사는 여성도 다 존재한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그릇된 시각이 중세에만 있고 현대에는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세 여성이라고 다 불행했던 것도 아니고 현대 여성이라고 다 자신의 시대가 행복한 것도 아니다. 또 여성에게 유리한 것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편리를 꾀하는 얌체족 여자도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이건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가치는 있으며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불변의 가치라는 점.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중세 여성사 책들에 손을 얹고 얼치기 중세의 마녀처럼 내가 책에서 만난 중세의 여성들을 불러본다. 언니들, 이 무지한 동생에게 인생의 지혜를 나눠 주세요. 제가 읽고 고민하고 쓰고 있는 것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향 연기 사이로 한 언니가 등장한다. 너희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중세적이란 말에는 너희의 우월감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서 기분 나빠. 다른 언니가 말한다. 현대에 살면서 중세적 사고방식을 일관성있게 가진 아저씨는 사실 별로 위험하지 않아. 정말 위험한 남자는 여러 시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현재 자신의 이익에 맞게 그때그때 사용하는 남자야. 또 다른 언니가 손을 내저으며 급히 말한다. 아니, 남자뿐만 아니야. 모든 시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관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이 문제야. 그러니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세니 조선 시대니 종북이니 좌빨이니 꼴페니 하고 의미를 갖다 붙이는 사람들에 주의하라. 다른 언니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 안에서 열심히 산 존재들이다. 너도 시대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인간과 삶의 진실을 보라. 각각의 인간은 각각 다른 시대에 살 수 있고 그 시대나 환경의 한계에 신음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사회적 면에서나 개인적 면에서나 자신들이 처한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성장해야 한다. 조용히 듣던 아일린 언니가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한 마디 한다. 그리고 어떤 상처를 받든지 절대 남성을 여성의 적으로 생각하지 마. ‘봉토들은 결혼을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한다(<중세의 여인들> 본문 54쪽에서 인용)’라고 내가 이미 말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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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중세의 여인들 #아일린 파워
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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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민

2013.07.28

오와 중세의 여인들에 대한 상세하고 깊은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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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ee78

2013.06.30

이런 어려운 내용을 술술 풀리게 써주셨네요. 현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여러가지 생각이 오갑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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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로리

2013.06.30

근대화가 되면서 여성의 권위와 인권이 더 사라진 것 같아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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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

한글을 뗀 이후로 책 읽고 글 끄적거린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소년중앙》과 계몽사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삼중당 문고와 창비 시선, 문학과 지성사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숙명여대 국문과 입학 후 대하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사학을 부전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진 이후 그동안의 과대망상과 능력 부족을 깨닫고 겸허하게 독자로 돌아가기로 결심, 한동안 조용히 책 읽고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 놀다 보니 너무 심심해서 블로그(blog.yes24.com/mkkorean)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무작정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게으른 배짱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독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책이 2013년 1월 출간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지금까지 문학, 역사, 인간이라는 세 개의 열쇠로 세상을 여는 역사 에세이를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앞으로도 익숙한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