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19년 망명 생활 덕분에…
위고는 1802년 2월 26일 동부 프랑스의 브장송에서 태어나 나폴레옹 휘하에서 장군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파리로 돌아온 후 처음엔 파리 이공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이미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글 : 최경진
201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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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은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 등 세기의 걸작을 집필한 프랑스 작가 빅토르 마리 위고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가 죽자 프랑스 정부는 국장으로 예우했으며 “그의 시신은 밤새도록 횃불에 둘러싸여서 개선문에 안치되었고, 파리의 온 시민이 판테온까지 관의 뒤를 따랐다.”(G. 랑송)라고 전해진다.

위고는 1802년 2월 26일 동부 프랑스의 브장송에서 태어나 나폴레옹 휘하에서 장군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파리로 돌아온 후 처음엔 파리 이공대학(Ecole Polytechnique)에 진학하려 했으나, 이미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미 10대 초중반 나이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일기에 기록할 정도로 프랑스의 문호가 될 것을 다짐했다.


빅토르 위고

1822년에 처녀시집 《송가집과 잡영집(Odes et Poesies Diverses)》을 쓰고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 (Han d'Islande, 1823)》도 발표했다. 1825년 프랑스 왕실로부터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무렵부터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1827년 희곡 《크롬웰 (Cromwell)》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을 선도했다. 《동방시집 (Les Orientales, 1829)》, 《사형수 최후의 날(Le Dernier jour d'un condamne, 1829)》 등도 발표했다. 초기의 작품에는 왕당파적ㆍ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그 후 점차 자유주의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다.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지배하는 의고전파와 대립하였다. 당시 문단에 발흥하던 낭만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같은 경향의 젊은 작가와 화가를 자택에 모았고 점차 낭만파의 지도자가 되어갔다. 희곡 《크롬웰(Cromwell, 1827)》에 붙인 서문은 고전주의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연극이론의 선언서로서 유명하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 2월에는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의 초연에 즈음하여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싸움’ (La Bataille d'Hernani. 또는 ‘에르나니 논쟁’) 이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위고는 고전파의 방해에 대비하여 미리 수많은 동지를 ‘박수치는 사람’으로서 극장 안에 배치, 청년시인 고티에가 빨간 조끼를 입고 싸움의 앞장을 섰던 일화는 유명하다. 야유와 박수가 엇갈리는 가운데 별다른 지장 없이 끝나 낭만주의는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했다.

이 승리 후에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압도하여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을 점유했다. 위고는 더욱 왕성한 활동을 보여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 1831)》로 지위를 굳혔다. 그는 시집 《가을낙엽(Les Feuilles d'automne, 1831)》, 《황혼의 노래(Les Chants du crepuscule, 1835》, 《마음의 소리(Les Voix interieures, 1837)》, 《빛과 그늘(Les Rayons et les ombres, 1840)》을 발표했다 . 희곡으로는 상연 금지를 당했던 《마리용 들로름(Marion Delorme, 1831)》을 비롯하여 <왕은 즐긴다>(1832), <뤼크레스 보르지아(Lucrece Borgia)>(1833), <마리 튀도르(Marie Tudor)>(1833), 운문극 《뤼 블라스(Ruy Blas, 1838)》 등을 발표했다. 1841년에는 대망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843년 이후 10여년간은 위고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그 원인은 희곡 《성주들(Les Burgraves, 1843)》에 대한 혹평과 맏딸의 사고사를 들 수 있다. <성주들>은 13세기의 라인강 주변의 성주들을 주인공으로 한 서사적 색채가 강했다. 프랑스 극장 초연 때 낭만주의 연극에 염증을 보이는 관객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크게 실패했으며 위고도 이후 극작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신혼이던 열아홉 살의 맏딸 레오폴딘의 부부가 센 강 하류의 빌키에에서 보트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위고는 6개월이나 펜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좌절과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1848년 2월 혁명을 비롯한 주위 정세에 자극을 받아 위고는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 한층 굳혔다.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국외로 추방을 당했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 거의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에 접어들어야 했다.

망명을 통해 잡다한 일에서 해방되자 위고는 창작에 전념하여 작품 세계의 전체적 판도를 규정 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 시기에 풍자시집 《징벌 시집(Les Chatiments)》(1853)을 시작으로, 대표적 서정시집인 《관조 시집》(1856)과 서사시집인 《세기의 전설》(1859)을 썼다. 사후에 발간된 미완의 주요 시집들인 《사탄의 종말》, 《신》 등과 더불어, 중요한 소설들인 《레미제라블》(1862), 《바다의 일꾼들》(1866), 《웃는 남자》(1869)를 집필했다. 예술론을 피력한 평론집 《윌리엄 셰익스피어》(1864)과 수많은 미발표 원고들을 남겼다.

1870년 보불 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민적 시인으로서 영예에 싸인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낸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은 《두려운 해(L'Annee terrible, 1872)》, 《세기의 전설》제2집, 제3집 (La Legende des siecles, 1877, 1883)》, 소설 《93년(Quatrevingt-treize, 1874)》 등이 있다.

빅토르 위고의 83년 일생에 일관되게 흐른 것은 인류가 한없이 진보할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의 불 같은 정열이었다. 덕분에 그는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말년에 위고가 살았던 파리의 엘로 거리는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빅토르 위고 거리’로 개칭되었다. (출처: 예스24,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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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 #웃는 남자
6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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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5

인류가 한없이 진보할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의 불 같은 정열이 창작의 원동력이 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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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많이 들어본 작품들이네요 제대로 다시한번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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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매우 재미있게 본 작품들을 많이 남기신 분이었네요. 빅토르 위고에 대해 알수 있는 기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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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진

지구에 춤을 추러 온 화성인입니다. 여행과 영화 감상을 좋아하며, 책을 사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잘 읽지는 못하고 쌓아만 둡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게 삶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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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 정치가. 1802년 프랑스의 브장송에 태어났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일찍이 문학적 재능을 보이며 시작(詩作)에 몰두했다. 위고는 첫 시집 『오데와 잡영집』(1822)으로 주목을 받은 이래, 희곡 [크롬웰](1827), 시집 『동방시집』(1829), 소설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날』(1829)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특히 [크롬웰]에 부친 서문은 고전주의 극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극 이론의 선언서로서, 위고가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에는 희극 [에르나니](1830)의 초연이 낭만파와 고전파 사이의 ‘에르나니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로부터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의 주류가 되었다. 그 후에도 위고는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며, 시집 『가을 낙엽』(1831), 『내면의 음성』(1837), 『햇살과 그늘(1840)』, 희곡 [마리용 드 로름](1831), [힐 블라스](1838) 등을 발표했다.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1831)는 위고에게 민중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혀 주었으며, 1841년에는 프랑스 학술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 뒤 위고는 10여 년간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 활동에 전념했고, 1848년 2월 혁명 등을 계기로 인도주의적 정치 성향을 굳혔다.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국외로 추방을 당하여,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 등에서 거의 19년에 걸쳐 망명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시집 『징벌』(1852), 『정관』(1856), 『여러 세기의 전설』(1부, 1859), 소설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노동자들』(1867) 등 대표작의 대부분이 출간되었다. 특히,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대하 역사소설로서, ‘인간의 양심을 노래한 거대한 시편’이자 ‘역사적, 사회적, 인간적 벽화’로 평가받는 위고 필생의 걸작이다. 1870년 보불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자, 위고는 공화주의의 옹호자로서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874년에는 『93년Quatrevingt-treize』을 출간했다.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에 여담 형태로 삽입된 ‘워털루 전투’ 이야기는 위고가 벨기에 전적지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곳곳을 답사하는 노력 끝에 집필한 것이다. 위고 특유의 비장미 넘치는 문체가 돋보이는 이 글은 일세를 풍미한 영웅 나폴레옹의 패배 과정을 극적이고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는 동시에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일깨우며 여운을 남긴다. 1876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됐으나,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켜 정계에서 은퇴했다. 국민 시인으로서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고,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내며, 『웃는 남자』(1869), 『끔찍한 해』(1872), 『93년』(1874), 『여러 세기의 전설』(2부, 1877; 3부, 1883) 등을 발표했다. 1885년 5월 폐렴으로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의 인파가 애도하는 가운데 그의 유해가 판테온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