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이병헌을 모른다: <지.아이.조 2>의 이병헌
이병헌, 대체 그는 누구일까?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설명하기 위해 ‘천만관객을 동원한 한국의 스타를 넘어 할리우드의 스타로 진화하고 있다’거나 그의 데뷔작, 함께 스캔들이 났던 여배우, 그에 대한 소문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이병헌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201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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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이.조: 전쟁의 서막>
2009년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은 시리즈로 기획된 프랜차이즈 영화였다. 한국에서 260만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과도한 게임 스타일의 사용과 밋밋한 이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다소 지루한 영화였다. 이병헌의 할리우드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의 아쉬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닌자 스톰 쉐도우를 연기한 이병헌의 존재감만은 지친 영화 속에서 반짝거리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위안이었다. 5년 만에 제작된 속편 <지.아이.조 2>의 이야기는 프랜차이즈 영화답게 1편에서 이어진다. 코브라군단은 미국 대통령을 납치한 뒤 가짜를 앞세워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새로운 하이테크 무기로 전 세계를 위협하면서 지.아이.조팀을 궤멸시키고, 각국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음모를 드러낸다. 살아남은 지.아이.조 요원들은 전쟁 영웅인 조 콜튼(브루스 윌리스)의 도움을 받아 코브라군단의 음모에 맞선다.
세계적인 흥행 열풍 속에 이병헌의 비중이 전편에 비해 훨씬 커진 시리즈의 2편은 아쉽게도 1편에서 부족하다고 지적된 단선적인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볼거리는 훨씬 다양해 졌다. 1편보다 훨씬 더 다양해진 신무기의 성능이 강해졌고, 몸으로 싸우는 동양 액션과 폭파하고 깨부수는 서양 액션이 골고루 섞여 시각적 쾌감을 준다.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한 3D 와이어 액션은 아찔하고 실감난다. 1편에선 주로 복면을 쓴데다 비중도 다소 작았던 스톰 쉐도우의 비중은 훨씬 더 커졌고, 이병헌이 매력을 발산할 기회는 훨씬 더 풍부해졌다. 1편에서는 주로 복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이병헌이 복면을 벗고, 노쇠한 브루스 윌리스 대신 체지방 하나 없는 탄탄한 몸매도 실컷 보여준다. 하지만 도드라지는 것은 단선적인 캐릭터들 사이에서, 인물의 고뇌를 담아내는 그의 섬세한 연기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배우가 반가워서 하는 인사치레나 애국심의 발로 때문이 아니라, <지.아이.조> 시리즈의 1편에 이어 2편에서도 제대로 살아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여러 배우들 사이에서 이병헌이 독보적이다.
모르는 남자, 이병헌
증권가 찌라시, 스캔들, 떠도는 소문과 SNS, 화보와 수많은 기사는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보고한다. 부지런히 검색만 하면 우리는 스타들의 학창시절과 취미, 심지어 저녁에 누굴 만나 무얼 먹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마치 스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스타는 일상 속에서도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미 손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에 올라간 스타라면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실체가 아닌 이미지의 아우라로 다가온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는 그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들에 대해 누군가 물어온다면 딱히 명확하게 표현할 말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병헌도 그렇다. 대체 그는 누구일까?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설명하기 위해 ‘천만관객을 동원한 한국의 스타를 넘어 할리우드의 스타로 진화하고 있다’거나 그의 데뷔작, 함께 스캔들이 났던 여배우, 그에 대한 소문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이병헌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사랑>
<해피 투게더>
그렇다면 이병헌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쌓아올린 지난 20년 동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1992년 청춘 드라마 <내일은 사랑>이다. 고소영, 박소현과 함께 이병헌은 남자다우면서도 유머러스한 이미지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몇 편의 드라마를 거쳐 1995년 그의 영화 데뷔작은 최진실과 함께 한 코미디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였다. 그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불사하지만, 아쉽게도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같은 해 액션과 멜로가 어우러진 <런 어웨이>, 1996년 정선경과 함께 한 <그들만의 세상>, 1997년 <지상만가> 등에서 강인한 남성의 이미지를 선보였지만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90년대까지 이병헌이 여전히 인기를 얻고 빛을 발한 곳은 TV 드라마였다. 1995년 최진실, 정우성, 이영애와 함께 한 <아스팔트 사나이>, 1997년 심은하와 함께 한 <아름다운 그녀>, 1999년 송승헌, 김하늘, 조민수, 조재현, 차태현, 전지현, 한고은 등 지금은 한 자리에 모을 수도 없는 배우들이 함께 한 전설의 드라마 <해피 투게더> 등의 인기로 이병헌은 큰 인기를 끌었다.
<내 마음의 풍금>
<번지 점프를 하다>
1998년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은 배우 이병헌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열일곱 늦깎이 초등학생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이 영화에서 전도연은 <접속>을 통해 얻은 배우로서의 가능성에 방점을 찍으면서,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전도연이라는 걸출한 배우와 함께 이 영화의 성공을 이끈 것은 이병헌이라는 배우였다. 도시적 이미지가 강했던 이병헌이었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딱 시골 초등학교 선생에 어울릴 만큼 평범하고 순박한 모습을 보였다. 이 작품을 통해 이병헌은 스타가 아닌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이병헌은 미스터리의 열쇠를 쥔 이수혁 병장 역할을 맡아 복잡한 내면연기를 선보인다. 이 영화는 박찬욱이라는 감독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물론 <넘버 3>와 <반칙왕>을 통해 인기를 얻었던 송강호, TV 드라마의 퀸이었지만 영화에서 큰 존재감이 없었던 이영애, <기막힌 사내들>로 갓 데뷔한 신하균 모두를 탑으로 이끈 영화이기도 하다. 같은 해 고 이은주와 함께 한 퀴어 코드의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를 통해 이병헌은 순수한 첫사랑을 품은 대학생부터 남자 제자에게 갑자기 마음을 빼앗겨 혼란에 빠진 중년 남성까지의 다층적인 연기를 훌륭하게 선보이며 믿음직한 배우로 급성장했다. 박병훈 감독의 2002년 <중독>에서 더욱 깊어진 내면연기를 선보인 이병헌은 2003년 송혜교와 함께 한 드라마 <올인>을 통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인기 스타로 자리매김한다.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2005년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은 특유의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2006년 수애와 함께 한 <그 해 여름>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이미 다양한 장르의 영화 속에서 제 몫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낸 작품이었다. 2008년 트란 안 홍 감독의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지루한 전개 사이로 이병헌의 연기만이 구원 같은 작품이었지만, 해외 진출의 가능성을 실험한 영화였다. 2008년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통해 칸 영화제 진출, 같은 해 드라마 <아이리스>를 통해 ‘사탕 키스’라는 이슈를 만들어 내며 한류 스타로서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 김지운 감독과 함께 한 세 번째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무시무시한 영화였다. 광기어린 최민식과 짝패가 된 이병헌은 모질게 밀어 붙인다. <악마를 보았다>는 솔직히 최고의 스타가 욕심낼 영화는 아니었다.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극한의 묘사 속에서 이병헌은 스타가 아닌 배우의 얼굴로 관객과 대화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년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이병헌의 모든 장점이 응집되어 폭발한 영화였다. 이병헌의 카리스마, 이병헌의 순박함, 이병헌의 코믹함, 이병헌의 간절함 등이 어우러졌다. 1인 2역을 맡은 광해와 하선이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물론 CG로 다듬어졌지만 한 화면에 잡힌 2명의 이병헌은 침묵하고 있지만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외양을 한 다른 사람, 이 영화의 키워드는 이병헌의 손에 있었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통해 어둡고 차가워진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이면에 있는 능청스럽고 익살스러운 모습을 끌어낸 영화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애초에 이병헌은 충분히 가벼울 수 있었지만, 근래에 너무 무거웠던 것도 사실이다. 좀 가벼워져도 된다.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올라도 이병헌의 입지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 자신감이 느껴지는 선택이었다. 그는 가장 대중적인 장르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격을 떨어뜨리지 않는 방법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너무 뜨거운 혹은 너무 차가운 이병헌이 아닌, 순박한 웃음과 광기어린 카리스마를 동시에 품은 배우 이병헌의 모습은 낯설어서 신선했고, 익숙하다고 착각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브루스 윌리스와 함께 이병헌은 2013년 <레드 2>로 할리우드에서의 인기를 이어갈 전망이다. 그가 맡은 역할은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전직 CIA 요원인데,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블랙 코미디라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고 글을 맺는 건 이병헌을 충분히 얘기하고도 여전히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한마디로 잡히지 않아서이다. 그게 뭐 대수일까? 그냥 이병헌이라는 이름으로 충분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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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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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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