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녜요. 마음속에 담아가지고 다니는 한 어린 녀석이지요” 하고 그가 대답했다.
날개 단 어린 왕자.
별이 있는 행성에 서 있는 모습.
줄이 쳐진 노트에 잉크.
히치콕은 그 어린아이 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그에게 말했다. “이 어린 녀석 말예요, 이 아이의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요? 어린이용 책으로 말입니다. 1942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책을 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요.” 생텍스는 그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전업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어린이책을 쓸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제안은 점차 무르익었고 출판인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권했다. 어린이들의 계절인 크리스마스 축제를 위한 어린이책? 그는 한 번도 참다운 어린 시절을 가졌던 것 같지 않았다. 진짜 경험이 없었다면 상상의 어린이를 만들어내면 어떨까?
그리고 며칠 뒤 생텍스는 친구인 레옹 윈체슬라스에게 말했다. “날보고 어린이책을 써보래요. 나를 문방구에 좀 데려다주겠소? 색연필을 좀 사야겠어요.” 색연필을 잔뜩 사자 그는 아직 형태가 불분명한 자기 생각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몇 가지 데생 연습을 했다. 그후 그는 『전시 조종사』의 삽화를 그린 베르나르 라모트의 도움을 청했다. 라모트가 몇 가지 견본을 그려 보였으나 생텍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찾고 있는 그 꿈꾸는 듯한 분위기와 순진 소박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콩트에 몰입했다. 그는 글뿐만 아니라 그림도 자신이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바오밥나무가 뿌리로 그 작은 별을 온통 다 움켜쥐고 있는 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새우고 나서 그는 그 그림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으려고 버티었다. “이봐, 여기를 좀더 바로잡아야 하고 저기는 좀더 악센트를 줘야겠어” 하고 라모트가 권했지만 그는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이 그림은 기적이야. 글이라면 수정할 용의가 있어. 하지만 그림은 이보다 더 잘 그릴 자신이 없어. 이건 기적이라고.”
(......)
드니 드 루주몽은 『일기』에서 생텍스를 이렇게 묘사한다. “거구의 대머리, 귀족 분위기의 새처럼 동그란 눈, 정비사 특유의 섬세한 손가락으로 그는 작은 붓 여러 개를 어설프게 쥐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혀를 빼물고 그림 그리는 데 몰두했다. 나는 어린 왕자를 위해 배를 깔고 엎드려서 다리를 세운 포즈를 취해주었다. 꽃들 속에 엎드려 우는 어린 왕자의 이미지다. 토니오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이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게 나야! 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라고요!’”
생텍스의 상상에서 곧장 튀어나온 인물들, 마음씨 좋은 수염 난 노인, 활짝 핀 꽃들, 작은 동물들이 포즈를 취해준 사람들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린 왕자의 모습은 콘수엘로를 많이 닮았다. 콘수엘로의 사내아이 같은 이상한 머리 모양이라든가 바람에 휘날리는 머플러가 그랬다. 색채감각이 있었던 그녀는 남편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했다. 생텍스가 화풀이로 뱀의 목에 나치 문양을 걸려고 하자 극구 말려서 떼내도록 한 사람도 그녀였다. 그녀에게는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정성껏 단장한 꽃잎과 가시가 있었고 화산 이야기는 화산의 땅인 그녀의 모국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콘수엘로는 어린 왕자가 돌아가야 할 장미였다.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너는 영원히 책임이 있는 거야. 너는 네 장미꽃에 대해 책임이 있어.”
기자요 친구였던(아마도 한때는 연인이었을 것이다) 실비아 해밀턴에 따르면 생텍스가 책으로 쓰기 전인 1942년 초에 이미 그녀에게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책의 삽화를 전문가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그려보라고 충고했다. 그 영향을 인정하듯 생텍스는 그녀에게 『어린 왕자』의 원고를 선물로 주었고 그녀는 훗날 원고를 뉴욕의 모건 라이브러리에 판매한다. 앞서 언급한 여배우 아나벨라 역시 생텍쥐페리가 그녀에게 『어린 왕자』의 일부를 읽어주었다고 말했다.
“실비아 해밀턴에게 우정에 넘친 추억과 함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실비아 해밀턴에게 바친 헌사(『인간의 대지』 미국판).
『바람과 모래와 별』의 속표지. 종이에 잉크
“내 평생의 친구인 베르나르 라모트에게,
언젠가 불화에 대해 내가 그럴듯한 변명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결국 나는 간을 치료할 생각이네.) 친구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베르나르 라모트에게 바친 헌사.
록펠러센터 앞에서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 그리고 코끼리가 있는 행성.
『인간의 대지』 속표지. 종이에 잉크.
- 어린 왕자를 찾아서 김화영 저 | 문학동네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고의 불문학자이자 개성적인 글쓰기와 유려한 번역으로 우리 문학계와 지성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해온 김화영 선생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만났다. 이 책 『어린 왕자를 찾아서』는 『어린 왕자』를 번역하면서 ‘어린 왕자’를 태어나게 한 진정한 어른이었을 생텍쥐페리의 삶을 조망하고,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의미를 풀어냈다.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어 ‘어린 왕자’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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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
문학평론가이자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42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교에서 알베르 카뮈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뛰어난 안목과 유려한 문체로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을 국내에 소개해 왔으며, 고려대학교 불문학과에서 3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치한 문장과 깊이 있는 분석으로 탁월한 평론을 선보인 전 방위 문학인으로, 1999년 최고의 불문학 번역가로 선정된 바 있다.
저서로는 『지중해, 내 푸른 영혼』 『문학 상상력의 연구―알베르 카뮈의 문학세계』 『프로베르여 안녕』 『예술의 성』 『프랑스문학 산책』 『공간에 관한 노트』 『바람을 담는 집』 『소설의 꽃과 뿌리』 『발자크와 플로베르』 『행복의 충격』 『미당 서정주 시선집』 『예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흔적』 『알제리 기행』외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는 『알베르 카뮈 전집(전20권)』『알베르 카뮈를 찾아서』 『프랑스 현대시사』 『섬』 『청춘시절』 『프랑스 현대비평의 이해』 『오늘의 프랑스 철학사상』 『노란 곱추』 『침묵』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팔월의 일요일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짧은 글 긴 침묵』 『마담 보바리』 『예찬』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최초의 인간』 『물거울』 『걷기예찬』 『뒷모습』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이별잦은 시절』 등이 있다.
sh8509
2013.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