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지면 죄인’, 그 생각이 노예다! - 『부채 인간』
기본적으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주류 경제학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려 하며, 이를 통해 주류 경제학이 진정한 사태의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다. 또한 이런 비판적 작업을 통해 은폐된 사태를 폭로하려고 한다. 우리가 새로운 노예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201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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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진다는 것의 의미는?
K씨의 한탄을 들어보자.
“나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어려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사리 공부해서 간신히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나 나는 오십을 채우지 못하고 명예퇴직을 당하고 말았다. 퇴직금이 있었지만 커가는 아이들의 장래와 부부의 노후 대비를 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퇴직금의 반은 주식투자를 하는 데에, 반은 부동산 투자를 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러나 주식은 반 토막이 났고 은행 융자를 끼고 구매했던 부동산은 폭락해서 결국 경매 처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빚은 남아 결국 신용 불량자로 전락하여 잔혹한 채권추심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난 정말 한평생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내 스스로 성실한 자라고 자부해왔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빚도 못 갚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난 게으름뱅이이고 이 사회의 기생충인 것만 같다. 아, 난 비도덕적인 인간이다. 도대체 내 삶은 뭐란 말인가!”
K씨의 사례는 요즘 들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우이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K씨가 죽일 놈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아온 인생 자체에 대한 혼란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K씨에게 상황이 어쩌다 그리 된 것인지를 매끄럽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도대체 빚을 진 것과 K씨의 재앙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K씨는 대표적인 투자 실패의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K씨의 투자는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니까 모든 책임은 K씨가 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사태가 모두 개인적 선택으로 환원해서 설명 가능한 것일까? 공공부채며 국가부채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를테면 20세기 후반 외환 위기 사태를 맞이하여 혹독한 고통을 당한 것 또한 개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인가?
알다시피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 현상을 합리적 선택을 하는 개인들 간의 교환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채권자에게 채권추심을 당할 때 K씨와 채권자 간의 관계는 이미 수평적 관계가 될 수 없다. K씨의 삶 전체가 채권자의 요구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를 어찌 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교환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주류 경제학은 부채에 의해 생기는 실존의 고통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폐시키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주류 경제학은 삶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는 아주 나쁜 학문이다. 몇 가지 수리적 모델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빚의 노예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 인간』(허경ㆍ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은 K씨의 경우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빚의 노예가 된 것이라고. 노예란 자유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라자라토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주류 경제학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려 하며, 이를 통해 주류 경제학이 진정한 사태의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다. 또한 이런 비판적 작업을 통해 은폐된 사태를 폭로하려고 한다. 우리가 새로운 노예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라자라토의 책은 경제 문제를 다루지만 경제학 서적은 결코 아니다. 그는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철학의 문제를 가로지르면서 자신의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는 니체와 마르크스, 푸코와 들뢰즈 및 가타리를 가로지르면서 현대 경제를 ‘부채 경제’로 규정한다. K씨의 사례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그 같은 가로지르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신자유주의란?
라자라토는 이런 사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여기서 독자들은 ‘아, 그 신물 나는 소리를 또 듣는구나’ 하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신자유주의를 단순히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나 금융 자본주의쯤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에서 실제로는 시장주의가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금융 경제’라는 규정조차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온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
라자라토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부채 경제’이다. 즉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 경제라는 표현은 불평등한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은폐하며, 자본이 개개인을 포획하는 양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채’와 관련해서 이 같이 급진적인 규정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라자라토의 대답은, 자본주의가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채무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부채를 무한한 부채가 되도록 전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사회의 부채는 유한한 부채였다. 나는 나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만 빚을 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나의 부채는 이제 상품으로 둔갑한다. 나의 부채는 금융에 의해 또 다른 상품으로 팔려 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파생 금융 상품이다. 이런 전유 과정을 통해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단순한 일 대 일 관계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의 관계로 전환된다. 나의 실존을 부채를 통해 통제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채권자가 아니라 블록화된 금융 자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의 부채 관계는 금융의 무한한 흐름 속에서 무한한 관계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같이 부채가 전면적으로 확장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자라토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공공 부채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1970년 이래 중앙은행을 통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지자, 금융 시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금융 자본은 국가의 금융 정책 없이 형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 라자라토의 분석이다. 즉 은행의 활동을 증대시키고 자본을 집중화한 것은 바로 국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자본주의를 ‘부채 경제’로 칭하는 건 단순히 금융이 확장되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조차 금융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은 주식에 의해 금융 자산으로 간주되고, 기업의 생산조차 금융과 공생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의 경우도 리스 등의 신용 대출 메커니즘과 전적으로 함께 기능한다. 자동차를 구매할 때 구매액 전부를 내고 구입하는 사람은 소수가 아니던가.
이런 분석이 함축하는 바는, 현대 자본주의가 부채를 대대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K씨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건 개인의 책임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신자유주의가 채무자를 양산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 셈이기 때문이다.
복지 국가, 여전히 가능한가?
라자라토의 분석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는 ‘복지 국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현재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늘어난 국가부채와 공공부채를 축소하기 위해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실상 민간 기업의 수익성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실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사회에 강요했던 것이 바로 그런 정책 아니었던가. 그리고 현재 MB 정권이 추구하는 정책도 그런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시민들이 어떻게 해서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자라토는 복지 국가의 이념이 부채 경제 속에서 변형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자본의 막강한 힘 앞에 자본의 개혁을 위한 도구였던 ‘복지 국가’는 권위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복지 국가’의 기능은 완전히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뉴딜 정책이란 불가능하다. (…) 개혁적 자본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라자라토는 민영화 정책을 통한 복지 정책이란 사실 자본의 구속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한국의 경우 저소득 계층을 위해 ‘햇살론’과 같은 신용 대출 상품을 마련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개개인은 국가에 의해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 무한한 채무 관계를 맺게 된다. 말로는 복지 혜택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채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 현재의 복지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민영화 정책은 공공 정책의 결정권을 소수의 금융 자본 블록에게 양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언제나 채무자를 배려하기보다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는 의사 결정 과정과 분배 과정에서 현재의 부채 경제가 공공성을 배제한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라자라토는 이런 분석에서 훨씬 더 나아간다. 그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펴냄)에 의존해서 빚을 진다는 것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해석한다. (사실 다른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이 대목이 이 책의 압권이다.) 빚을 진다는 것은 이미 갚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행위에서 빚을 지고 있다. 이를테면 “신용 카드의 사용은 영구적 부채를 확립하는 신용 관계의 자동적 개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채무자가 되고 만다.
그런데 라자라토가 주목하는 것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부채 경제 아래서 부채는 채무자에게 내면화된 고통이 되며 부채에 대한 책임감은 죄책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채 경제는 약속의 도덕과 죄의식의 도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죄의식의 배면에는 신자유주의가 개개인을 ‘자기 경영자’가 되도록 요구하고, 이에 따라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K씨가 퇴직금을 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을까? 퇴직금만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K씨는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이제 퇴직금을 운용해서 이윤을 추구한다. 일종의 개인 경영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K씨는 자기 경영자로서 자신의 투자 책임을 고스란히 혼자 져야 한다는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부채 의식을 통해 개개인의 주체를 통제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대출은 정치 경제가 한 인간의 도덕성에 간섭하는 판단이다. (…) 대출 시스템에 속하는 인간 안에서 철폐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돈으로 변화한다. 즉 다시 말해 돈이 인간으로 육화된다. 인간의 개체성, 인간의 도덕성은 상업적 상품인 동시에 돈의 실존적 재료로 변모한다. 돈의 영혼이 소유하는 육체, 재료는-이제 더 이상 돈과 종이가 아니라-나의 인격적 실존, 나의 살과 나의 피, 나의 사회적 덕성, 나의 사회적 평판이다. 대출은 가치를 돈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살,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다.”
이것은 라자라토가 아니라 청년 마르크스의 육성이다. 라자라토는 마르크스를 재해석해서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구속하고 있는가는 보여주려 한다.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임금노동ㆍ시장ㆍ상품은 물론, 공동체 및 인간 마음의 가장 고귀한 감정까지도 경제적 ‘가치’ 생산에 종속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채 경제는, 개개인이 ‘자신과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윤리적 노동 자체’까지 착취하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K씨의 리스크는 K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우리는 엄청난 삶의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의 리스크는 이제 개인적 차원에서 관리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된 지금, 개개인이 한국 경제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세계 경제까지 분석해서 자기를 경영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K씨에게 ‘당신이 실패한 건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라자라토는 우리 앞에 놓인 이런 문제의 지평을 보아야 채권자-채무자라는 왜곡된 권력 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자라토에게서 그 밖의 구체적인 대안을 듣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는 더 이상 어떤 개혁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고 진단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는가? 빚에 의해 미래를 저당 잡힌 현재의 삶을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부채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K씨의 한탄을 들어보자.
“나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어려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사리 공부해서 간신히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나 나는 오십을 채우지 못하고 명예퇴직을 당하고 말았다. 퇴직금이 있었지만 커가는 아이들의 장래와 부부의 노후 대비를 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퇴직금의 반은 주식투자를 하는 데에, 반은 부동산 투자를 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러나 주식은 반 토막이 났고 은행 융자를 끼고 구매했던 부동산은 폭락해서 결국 경매 처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빚은 남아 결국 신용 불량자로 전락하여 잔혹한 채권추심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난 정말 한평생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내 스스로 성실한 자라고 자부해왔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빚도 못 갚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난 게으름뱅이이고 이 사회의 기생충인 것만 같다. 아, 난 비도덕적인 인간이다. 도대체 내 삶은 뭐란 말인가!”
K씨의 사례는 요즘 들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우이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K씨가 죽일 놈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아온 인생 자체에 대한 혼란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K씨에게 상황이 어쩌다 그리 된 것인지를 매끄럽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도대체 빚을 진 것과 K씨의 재앙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K씨는 대표적인 투자 실패의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K씨의 투자는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니까 모든 책임은 K씨가 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사태가 모두 개인적 선택으로 환원해서 설명 가능한 것일까? 공공부채며 국가부채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를테면 20세기 후반 외환 위기 사태를 맞이하여 혹독한 고통을 당한 것 또한 개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인가?
알다시피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 현상을 합리적 선택을 하는 개인들 간의 교환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채권자에게 채권추심을 당할 때 K씨와 채권자 간의 관계는 이미 수평적 관계가 될 수 없다. K씨의 삶 전체가 채권자의 요구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를 어찌 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교환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주류 경제학은 부채에 의해 생기는 실존의 고통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폐시키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주류 경제학은 삶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는 아주 나쁜 학문이다. 몇 가지 수리적 모델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빚의 노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주류 경제학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려 하며, 이를 통해 주류 경제학이 진정한 사태의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다. 또한 이런 비판적 작업을 통해 은폐된 사태를 폭로하려고 한다. 우리가 새로운 노예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라자라토의 책은 경제 문제를 다루지만 경제학 서적은 결코 아니다. 그는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철학의 문제를 가로지르면서 자신의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는 니체와 마르크스, 푸코와 들뢰즈 및 가타리를 가로지르면서 현대 경제를 ‘부채 경제’로 규정한다. K씨의 사례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그 같은 가로지르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신자유주의란?
라자라토는 이런 사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여기서 독자들은 ‘아, 그 신물 나는 소리를 또 듣는구나’ 하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신자유주의를 단순히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나 금융 자본주의쯤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에서 실제로는 시장주의가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금융 경제’라는 규정조차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온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
라자라토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부채 경제’이다. 즉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 경제라는 표현은 불평등한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은폐하며, 자본이 개개인을 포획하는 양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채’와 관련해서 이 같이 급진적인 규정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라자라토의 대답은, 자본주의가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채무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부채를 무한한 부채가 되도록 전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사회의 부채는 유한한 부채였다. 나는 나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만 빚을 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나의 부채는 이제 상품으로 둔갑한다. 나의 부채는 금융에 의해 또 다른 상품으로 팔려 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파생 금융 상품이다. 이런 전유 과정을 통해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단순한 일 대 일 관계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의 관계로 전환된다. 나의 실존을 부채를 통해 통제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채권자가 아니라 블록화된 금융 자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의 부채 관계는 금융의 무한한 흐름 속에서 무한한 관계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같이 부채가 전면적으로 확장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자라토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공공 부채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1970년 이래 중앙은행을 통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지자, 금융 시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금융 자본은 국가의 금융 정책 없이 형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 라자라토의 분석이다. 즉 은행의 활동을 증대시키고 자본을 집중화한 것은 바로 국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자본주의를 ‘부채 경제’로 칭하는 건 단순히 금융이 확장되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조차 금융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은 주식에 의해 금융 자산으로 간주되고, 기업의 생산조차 금융과 공생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의 경우도 리스 등의 신용 대출 메커니즘과 전적으로 함께 기능한다. 자동차를 구매할 때 구매액 전부를 내고 구입하는 사람은 소수가 아니던가.
이런 분석이 함축하는 바는, 현대 자본주의가 부채를 대대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K씨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건 개인의 책임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신자유주의가 채무자를 양산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 셈이기 때문이다.
복지 국가, 여전히 가능한가?
라자라토의 분석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는 ‘복지 국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현재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늘어난 국가부채와 공공부채를 축소하기 위해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실상 민간 기업의 수익성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실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사회에 강요했던 것이 바로 그런 정책 아니었던가. 그리고 현재 MB 정권이 추구하는 정책도 그런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시민들이 어떻게 해서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자라토는 복지 국가의 이념이 부채 경제 속에서 변형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자본의 막강한 힘 앞에 자본의 개혁을 위한 도구였던 ‘복지 국가’는 권위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복지 국가’의 기능은 완전히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뉴딜 정책이란 불가능하다. (…) 개혁적 자본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라자라토는 민영화 정책을 통한 복지 정책이란 사실 자본의 구속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한국의 경우 저소득 계층을 위해 ‘햇살론’과 같은 신용 대출 상품을 마련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개개인은 국가에 의해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 무한한 채무 관계를 맺게 된다. 말로는 복지 혜택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채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 현재의 복지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민영화 정책은 공공 정책의 결정권을 소수의 금융 자본 블록에게 양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언제나 채무자를 배려하기보다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는 의사 결정 과정과 분배 과정에서 현재의 부채 경제가 공공성을 배제한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그런데 라자라토가 주목하는 것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부채 경제 아래서 부채는 채무자에게 내면화된 고통이 되며 부채에 대한 책임감은 죄책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채 경제는 약속의 도덕과 죄의식의 도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죄의식의 배면에는 신자유주의가 개개인을 ‘자기 경영자’가 되도록 요구하고, 이에 따라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K씨가 퇴직금을 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을까? 퇴직금만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K씨는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이제 퇴직금을 운용해서 이윤을 추구한다. 일종의 개인 경영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K씨는 자기 경영자로서 자신의 투자 책임을 고스란히 혼자 져야 한다는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부채 의식을 통해 개개인의 주체를 통제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대출은 정치 경제가 한 인간의 도덕성에 간섭하는 판단이다. (…) 대출 시스템에 속하는 인간 안에서 철폐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돈으로 변화한다. 즉 다시 말해 돈이 인간으로 육화된다. 인간의 개체성, 인간의 도덕성은 상업적 상품인 동시에 돈의 실존적 재료로 변모한다. 돈의 영혼이 소유하는 육체, 재료는-이제 더 이상 돈과 종이가 아니라-나의 인격적 실존, 나의 살과 나의 피, 나의 사회적 덕성, 나의 사회적 평판이다. 대출은 가치를 돈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살,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다.”
이것은 라자라토가 아니라 청년 마르크스의 육성이다. 라자라토는 마르크스를 재해석해서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구속하고 있는가는 보여주려 한다.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임금노동ㆍ시장ㆍ상품은 물론, 공동체 및 인간 마음의 가장 고귀한 감정까지도 경제적 ‘가치’ 생산에 종속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채 경제는, 개개인이 ‘자신과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윤리적 노동 자체’까지 착취하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K씨의 리스크는 K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우리는 엄청난 삶의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의 리스크는 이제 개인적 차원에서 관리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된 지금, 개개인이 한국 경제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세계 경제까지 분석해서 자기를 경영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K씨에게 ‘당신이 실패한 건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라자라토는 우리 앞에 놓인 이런 문제의 지평을 보아야 채권자-채무자라는 왜곡된 권력 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자라토에게서 그 밖의 구체적인 대안을 듣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는 더 이상 어떤 개혁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고 진단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는가? 빚에 의해 미래를 저당 잡힌 현재의 삶을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부채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 부채인간
-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저/허경,양진성 공역 | 메디치미디어
빚을 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 열심히 일하는데 왜 계속 빚을 지게 될까? 이 책은 들뢰즈ㆍ가타리, 니체, 마르크스, 푸코 등의 논리를 빌어 ‘부채’가 단순히 개인의 경제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ㆍ정치적 문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빚을 진 인간(부채인간)’이 되며, 평생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채는 개인의 정치적 힘과 미래까지 약탈하고 있다. 이 책은 확장되는 경제 위기 속에서 더욱 불평등해지는 권력관계에 대응하기 위해 금융자본주의가 어떻게 ‘부채인간’을 만들어 내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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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준영
사범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철학과 대학원에서 플라톤 철학에 대한 연구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정암학당 연구원으로 있다. 서양 고대의 서사시, 비극, 철학의 사상적 연관성과 차이를 탐색하는 쪽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sind1318
201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