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로 나미에, 그녀가 전설인 이유
이만큼 진폭이 큰 가수도 없다. 올라갔다 싶으면 땅을 쳤고, 아플 새도 없이 다시금 디딤발을 내딛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 과정 속에는 모든 상처를 홀로 끌어안아야 했던 인간 아무로 나미에의 인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굴곡을 겪었음에도 그녀는 밝다. 긍정적이다. 20년 동안 그 미소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글ㆍ사진 이즘
201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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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사키 아유미(浜崎 あゆみ) 는 뚜렷한 하락세이고, 우타다 히카루(宇多田 ヒカル)는 유명인의 가면을 벗고 잠시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 아이코(aiko)와 유키(YUKI)는 성장을 멈춘 채 자신만의 세계에 자리를 마련했고, 니시노 카나(西野 カナ)는 여전히 ‘착신우타(着うた - 우리나라의 다운로드 개념)’에서의 기세를 범시대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주주(JUJU)나 아베 마오가 이제 출발점에 있다고 한다면, 그녀의 20주년은 더욱 각별해질 수밖에 없다. 변화의 흐름이 격렬한 일본 시장에서 한 번의 하락세를 거친 후 여왕의 가운을 재탈환해 낸 솔로 여가수는 그녀 이외에는 쉬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불가능한 ‘제이팝의 여제’ 아무로 나미에는 그렇게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공룡밴드 미스터 칠드런(Mr. Children)의 20주년을 기념하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그곳에 더욱 관심이 쏠려 있었다. 하지만 뇌출혈로 쓰러진 후 기적적으로 생환한 사쿠라이 카즈토시의 귀환을 제외하면 다소 순탄했던 미스치루에 비해(물론 병의 극복이나 음악적 고민을 쉽게 바라보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의 커리어는 확실히 고전의 연속이었고 변화의 체감도도 심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팬들조차 아무로 나미에를 과거의 인물이라 단정 지을 때에도 그녀는 스스로를 현재진행형 아티스트라 여기고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아끼지 않았다. 국민밴드와 대등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로 나미에를 언급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이팝의 여왕이나 트렌트세터와 같은 화려한 수식어를 동반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철의 여인’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가수이기 전에 한 아들의 어머니이며, 여자라는 성적 편견으로 바라보기엔 어느 남자들보다 강인한 내면을 갖추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낯선 부분이다.







그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데뷔와 함께 < Sweet 19 Blues >(1996)로 최연소 최다 판매기록을 세웠을 때도, 1997년 < 홍백가합전 >에서 200만장이 넘게 팔린 히트 싱글 「Can you celebrate?」를 부르며 눈물을 흘릴 때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베스트 앨범인 < Best Fiction >(2008)으로 연간차트를 1위로 장식하고 레코드 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던 2008년, 그때가 아마 팬을 넘어 일반 대중들과도 함께 환희와 희열을 나눌 수 있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1990년대의 거장 코무라 테츠야(小室 哲哉)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신스 뮤직에, 태닝한 피부와 미니스커트, 통굽 부츠로 무장한 스타일의 결합을 통해 그녀의 잠재력은 개방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시대 여성들에게 ‘아무라(アムラ)’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게 만들었던 1997년, 본인으로부터의 갑작스런 결혼 발표는 아무로 나미에가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이때부터 이미 그는 내뱉은 말에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자신임을 분명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속도위반 임신, 그리고 그 상대가 15살 연상의 백댄서 샘(Sam)이라는 것을 알게 된 대중들은 마치 야마구치 모모에의 결혼발표가 20세기 말에 재현되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고, 아무래도 통념과는 어긋나는 행동이라 생각했는지 조금씩 아무로에 대한 애정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런 시선에 대한 화살받이가 되어야 했던 것은 역시나 본인이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대강은 예상했겠지만, 일상에서의 행복을 희생당하지 않겠다는 소신은 비난 여론에 결코 꺾이지 않았다. 대신 활동중단을 선언하며 후배가수들이 치고 올라오는 틈을 내보이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곧이어 터질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친어머니가 숙부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열도를 충격으로 몰아넣음과 동시에 본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 다가왔다.

급히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안정을 위한 긴 휴식에 들어가는 듯 했지만, 2주 만에 복귀하며 힘들 때 자신의 곁에 있어준 대중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 그녀는 그해 < 홍백가합전 >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1999년 3월 17일 발매되었던 「RESPECT the POWER OF LOVE」를 불렀다. 2년 전 같은 무대에서 흘린 눈물과는 대조적인 아픔이 흘러내리고 있었음을 많은 이들이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제이팝계의 질서는 재편되고 있었다. 특히나 여성 솔로 신은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미시아(Misia)를 필두로 하마사키 아유미, 여기에 700만장이라는 다시는 없을 판매량을 역사에 남긴 우타다 히카루까지. 아무로 나미에의 이름이 차트에서, 브라운관에서, 모든 곳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 Break the Rules >(2000)와 < LOVE ENHANCED ♥ single collection >(2002)의 부진, 코무로 테츠야와의 결별, 그리고 남편과의 이혼. 21세기라는 백 스테이지엔 1990년대 가수를 위한 대기실이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과 피를 나눈 아들이었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친어머니 관련사건 당시 충격이 너무 커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연예계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자신을 다잡게 한 것은 바로 하나 있는 아들. 한명의 어머니로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모성애는 결국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었던 심연의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변화를 모색했고, 이전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 Style >(2003)로 컴백했다. 왼쪽 팔에는 아들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채.

요체는 블랙 뮤직으로의 노선 변경이었다. 한번 스타일이 정립되면 그것을 좀처럼 바꾸지 못하는 일본 시장에서 던진, 분위기 전환을 위한 과감한 한수였다. < Break the Rules >에서 연을 맺은 미국의 유명 작곡가 겸 프로듀서 댈러스 오스틴(Dallas Austin)의 지휘아래 전개된 작업은 예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지만, 본토의 트렌드를 과하게 끌어온 탓에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대신 소녀에서 여성 아티스트로서의 진화를 체감케 하기엔 안성맞춤이었으며, 기존 아무로 나미에의 모습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신규 팬 층의 유입을 허락했단 점에서 일장일단의 결과물이었다.







전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이라면 < Queen of Hip-pop >(2005)과 < Play >(2007) 때라고 할 수 있는데, 나오와이엠티(Nao'ymt), 티쿠라(T.Kura) 등과의 만남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둔탁한 비트를 중심으로 한 편곡, 저음역대를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단단해진 창법이 자리를 잡으며 2000년대의 아무로 나미에를 새롭게 완성시켰다. 「Want me, want me」, 「Girl talk」, 「Hide & seek」 등 퀄리티 높은 곡들이 이때 탄생했다. 다소 주춤했던 기세 역시 이 무렵 회복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결국 베스트 앨범 < Best Fiction >(2008)을 통해 간만의 밀리언셀러를 만들어내고 연간차트 1위에 등극하게 된다. 그야말로 끊임없는 자기진화가 만들어낸 감격적인 정상탈환이었다.

이렇게 커리어의 후반으로 오면서 그간의 경험과 노력 덕분인지 목소리는 두꺼워졌고, 무엇보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발음과 멜로디와의 유착감은 어느덧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음을 실감케 한다. 감각적인 비트와 세련된 워딩, 안주하지 않는 노력이 빚어낸 퍼포먼스는 로컬과 인터내셔널의 취향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일본 여가수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역사란 참 두고 봐야 하는 것 같다. 하마사키 아유미와 우타다 히카루가 < A Best >(1999)와 < Distance >(1999)로 세기의 라이벌전을 펼치고 있었을 때만 해도 이미 한물갔다고 생각했던 아무로 나미에가 13년 후 이토록 전방위적 활동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있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순탄치 않은 경력 동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변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명백히 구분할 수 있는 지혜였다.

아쉽게도 한국과의 연은 2004년 엇갈렸다. 국내 공연기획사가 내한공연의 개런티를 지급하지 않은 채 도주한 탓이다. 실례로 이번 20주년 앨범 < Uncontrolled >(2012) 아시아 프로모션 일정에서도 한국이 제외된 것을 보면, 아직도 그때 남은 앙금이 재회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획자는 자신의 이익이 얼마나 많은 음악팬들의 염원과 맞바꿔진 것인지 알고나 있을까. 순수한 열정을 바닥에 깐 욕심은 죄악이며 최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만큼 진폭이 큰 가수도 없다. 올라갔다 싶으면 땅을 쳤고, 아플 새도 없이 다시금 디딤발을 내딛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 과정 속에는 모든 상처를 홀로 끌어안아야 했던 인간 아무로 나미에의 인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굴곡을 겪었음에도 그녀는 밝다. 긍정적이다. 20년 동안 그 미소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Get myself back」의 가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상처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야 / 지금까지도 잘 극복해왔어 / 눈물은 닦자 지금부터가 진짜 아니겠어 / 이제 괜찮아 모든 게 다 잘 될 거니까’ 많은 시련 속에서도 결국 웃는다. 긍정의 한 켠에 부정적인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그맣게 세를 내어주는 것, 그것이 그녀가 다른 이들과 달랐던 점이다.




아직도 국내에서는 그녀가 옛날 가수로 치부되는 일들이 많다. 단언하건대 그 영향력은 아직도 굉장한 수준이다. 10대, 20대, 30대의 나이에 각각 낸 정규앨범이 모두 오리콘 차트 1위에 오른 유일한 솔로가수이며, 수많은 잡지사가 커버모델로 앞 다투어 그녀를 섭외하는데다가, 신작은 40만장을 돌파했고 1997년 이후 15년 만인 돔 투어는 하루만에 매진되어 추가공연이 결정되었다.

이처럼 시간이 중첩되는 동안 단순한 결혼축하곡이었던 「Can you celebrate?」를 본인 인생의 송가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아무로 나미에의 강한 의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덕분에 차려진 여제의 20주년, 그것은 음악팬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글 / 황선업(sunup.and.down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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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로 나미에 #제이팝의 여왕 #트렌트세터 #제이팝 #아무라 #Can you celebrate?
1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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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richu

2016.06.10

그냥 아무로 나미에 광빠돌이 입장에서 기사를 쓰셨네요
aiko와 yuki가 성장을 멈췄다는 글에서 웃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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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urojoa

2014.10.20

아무로의 어머니는 숙부에게 살해당하신게 아닙니다.
뭘좀 제대로 알고 리뷰를 올리셨으면 좋겠군요. 아무로의 친 숙부가 그런게 아니라
아무로의 어머니가 재혼한 남자의 남동생에 의해 변을 당하신 건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무로 친 숙부가 그런줄 알것 아닙니까? 잘못된 리뷰는 신속히 수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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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o27

2013.10.11

무엇보다 인기가 떨어지면 열심히 tv방송으로 어필하는게 대부분인데 아무로 나미에는 tv방송은 드물게 하고 몸이 부서져라 전국 라이브 공연을 해왔죠. 그런 노력과 노력에 대한 완성도가 보여서 기존 인지도에, 입소문으로 새로운 세대에게도 통하는 제 2의 전성기도 누리게 된것이고... 지금도 끝임없이 라이브 공연을 해오는 모습 정말 무대를 사랑하는 가수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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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