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신분에서 왕의 후궁이 된 여인 - 나쁜 궁녀의 대명사 장녹수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淑媛이 되었다가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되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둘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 장녹수와 연산군이 그토록 빨리 가까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글ㆍ사진 신명호
201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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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 의하면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한다. 가비란 집안의 여자 종을 말한다. 제안대군의 여자 종이었다는 뜻이니 장녹수는 사노비私奴婢였던 셈이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가비가 된 내력은 대군의 가노家奴, 즉 남자 종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좀더 생각해 보면 약간 애매한 부분이 나타난다. 장녹수가 원래 노비 출신이었는지, 아니면 남자 종에게 시집가서 노비가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이는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장한필은 문과에 합격하고 문의 현령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아버지 쪽으로 본다면 엄연히 양반 가문의 딸인 장녹수가 어찌하여 제안대군의 남자 종에게 시집을 갔단 말인가.

실마리는 아무래도 장녹수의 어머니 쪽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장녹수의 친언니 장복수張福壽가 내수사의 여자 종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양반 관료였지만 어머니는 노비, 그것도 내수사의 노비였다는 얘기가 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내수사의 여자 노비였으므로 그 자손들도 어머니를 따라 자연히 내수사의 노비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장녹수는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녹수 자매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장한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어린 자매를 데리고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을지 짐작이 간다.

장녹수는 궁녀로 입궁하기 전에 이미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데다 얼굴이 썩 예쁜 편도 아니었다. 단지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내는 개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런 소문은 연산군에게도 들어갔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랬으니 연산군이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당연히 장녹수를 만났을 것이다.

실제로 장녹수의 노래와 춤은 연산군을 매료시킬 만큼 뛰어났던 모양이다.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 그것도 연상인 장녹수를 연산군은 딱 한 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고 한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淑媛이 되었다가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되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둘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 장녹수와 연산군이 그토록 빨리 가까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두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영화 <왕의 남자> 中 장녹수 (2005, 이준익 감독)

첫째,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다.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예술을 사랑하는 연산군. 얼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여 두 사람을 이어 준 끈은 바로 이 예술적 교감이었다. 둘째, 모성애에 목말라하는 연산군의 갈망을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 자란 반면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다.

이렇게 자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갈구했을 것이다. 특히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연산군의 모성애를 연상의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예컨대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왕이 아무리 노했다가도 녹수만 보면 기뻐서 웃었으므로, 상 주고 벌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라는 『실록』의 기록은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으면서 행복해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다 자란 성인인 연산군의 이런 행동이 정신 장애로 보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여인에게서 모성애를 갈구하는 가엾은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실제로 장녹수의 영향력이 가장 높았던 것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복수하겠다고 갑자사화를 일으킨 시점이었다.

그런데 장녹수는 왕의 총애로 얻은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무절제하게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으며, 유별나게 재산에 욕심을 부려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던 것이다. 그것이 장녹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만 보면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할 수도 있다. 노비의 신분에서 왕의 후궁까지 올랐으니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녹수가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권력을 쥐자 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했다. 이름 없는 노비일 때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왕을 좌우하는 권력자가 된 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절제하고 왕의 권력을 절제시켜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는 이런 점에 전혀 무신경했거나 무능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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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신명호 저 | 시공사

드라마 「여인천하」 「다모」에서 「대장금」 「동이」, 최근에는 영화 「후궁, 제왕의 첩」까지.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 다양한 작품에서 무수한 궁중 여인들을 만나왔다.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만나볼 수 없었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많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열광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궁녀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장녹수 #연산군 #가비 #궁녀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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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여신

2012.08.29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하기에는..따로 뭐 작품이나 그러한게 아무것도 없지 않나요?
그냥 그 시대에 뛰어났다는 이야기밖에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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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h0122

2012.07.09

어쩐지 쓸쓸한 연인이었군요. 연산군과 장녹수. 비록 왕과 후궁의 지위를 얻었지만 차라리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원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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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

2012.07.07

장녹수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총애를 얻어 권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왕이 빠질만큼의 매력이 있던 것이군요. 점점 이 책에 관심이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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