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와의 대화, 평행선일 수밖에 없을까?
같은 상황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평행선을 달렸다. 아이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이야기했고, 엄마는 아이의 마음이 아닌 운동화를 바라보며 뭐가 문제냐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201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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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대화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어렸을 때는 싫은 소리를 들으면 입을 내밀고 투덜거리기는 해도 그 이상 더 반항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입만 내미는 게 아니라 눈을 희번덕대고 주먹을 부르르 떨기도 하고, 종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 방 문에 들어가서는 엄마 대신이라는 듯 부서질 듯 문을 닫기도 한다.
왜 이렇게 서로 대화가 힘들까? 내 몸보다 소중하다는 가족이고, 내 뱃속에서 열 달을 키운 자식인데. 예전에는 눈빛만 봐도 모든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고, “무-”소리만 나도 물을 떠다 주던 빛나는 일치의 시간이 분명 있었던 걸 기억하는데.
고등학생 딸아이를 키우는 친구네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친구는 신발장을 열더니 운동화를 하나 보여주며 다짜고짜 나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 이 운동화 어때?” 친구가 보여준 것은 우리 딸내미도 갖고 있는 브랜드의 운동화로 학생들이 즐겨 신는 디자인이었다.
“무슨 말이야?”
“이 운동화가 이상해 보이냐고?”
“아니. 그냥 운동화인데 뭘.”
“그렇지? 괜찮지?”
별일 아닌 것 같은데 친구는 몇 번이고 나에게 그 운동화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했다.
“백화점에 갔다가 세일하는 운동화가 괜찮아 보여서 사 온 거야. 그런데 애가 죽어도 저 운동화를 안 신겠다는구나.”
“왜?”
“그냥 무조건 싫다는 거지. 이 운동화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느냐, 뭐가 이상해보이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도 안하고 싫다고만 고집을 부려서 어제 한바탕 했어.”
나는 다시 한 번 꼼꼼히 운동화를 살펴보았다. 특별히 싫을 만한 점도, 독특해 보이는 점도 없는 아주 무난한 스타일의 흰색 운동화였다.
“그래도 뭔가 싫은 이유를 말했겠지?”
“이렇게 말하더라. 이건 엄마 스타일이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운동화 하나에 무슨 스타일을 찾는지 내 원 참.”
그때야 나는 모녀간에 갈등을 빚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는 그 운동화의 어떤 점이 싫은 게 아니라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딸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보다는 운동화에 집중했다. 도대체 “그 운동화”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닦달한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평행선을 달렸다. 아이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이야기했고, 엄마는 아이의 마음이 아닌 운동화를 바라보며 뭐가 문제냐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나는 감자탕을 싫어한다. 왜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국물의 느끼함과 노린내 비슷한 냄새가 싫다. 친구가 맛있는 데라고 몇 번 데리고 가서 억지로 먹긴 했는데 그냥 싫어하는 음식으로 분류하고 더는 가지 않기로 했다. 하루는 남편과 산책을 하는데 24시간 감자탕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감자탕을 먹으러 온 사람으로 식당은 북적이고 있었다.
“여보, 난 감자탕이 싫은데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나봐.”
“감자탕이 왜 싫어? 얼마나 맛있는데.”
“냄새도 싫고, 맛도 모르겠던데.”
“그건 맛있는 데 안 가봐서 그래. 맛있게 하는 집에 가면 당신도 좋아할 거야.”
“유명하다는 집에 가서도 먹어 봤다고.”
“제대로 하는 데를 가야지.”
우리는 어느 새 격렬하게 논쟁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감자탕이 맛있다는 자신의 견해를 바꿀 생각이 없었고, 나는 감자탕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감자탕이 맛있는지 아닌지를 논쟁으로 정할 수 있는 건가?
“여봇! 감자탕이 나한테 맛있는지 아닌지를 왜 당신이 결정해? 내 입맛이라고!”
많은 대화가 이런 이유로 공전한다. 전하고 싶고 알아줬으면 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다. 이 식당의 불고기가 맛있는 것은 알지만 오늘은 고기가 아닌 생선이 먹고 싶다는 것이다. 미리 숙제하면 편한 것은 알지만 지금은 숙제를 하기보다 읽고 있던 소설책을 마저 읽고 싶은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한 사람은 좋아하고 한 사람은 싫어하는 어떤 것을 사이에 둔 논쟁은 서로의 마음을 보지 않으면 절대 결론이 날 수 없다.
날씨가 추우니까 속옷을 더 입으라는 엄마와 춥지 않다는 아이, 왜 이렇게 귀가시간이 늦느냐는 아내와 할 일이 많아서 어쩔 수 없다는 남편. ‘춥다 : 춥지 않다, 늦다 : 늦을 수밖에 없다’의 대립은 서로의 의도와 마음, 감정을 알아차리지 않는 한은 해결되기 어렵다. 앞으로는 ‘그 무엇’이 아닌 상대가 표현하는 ‘나’에 집중해보자.
“네가 그렇게 옷을 얇게 입고 가면 추워서 떨까봐 하루 종일 걱정이 되잖니.”
“엄마가 걱정하는 마음은 아는데, 이 나이에 내복을 입는 건 창피해요. 차라리 좀 추운 게 마음이 편해요.”
“당신이 매일 늦으니까 이야기할 시간도 없고 외롭다는 느낌이 들어요.”
“일부러 늦게 오는 건 아닌데 당신이 매일 잔소리하니까 야단맞는 것 같고 집에 오는 게 더 싫어졌어.”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이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진다. 내 생각에 좋은 것과 다른 사람 보기에 좋은 것이 서로 상반될 수도 있음을 알 때 비로소 이해와 수용이 가능해진다. 꼭 이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에게는 귀찮고 힘든 일이라는 것, 정말 걱정스럽고 말리고 싶지만 아이는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아이는 부모가 내 마음을 알아준다고 느낀다.
나는 감자탕이 정말로 싫지만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아내와 함께 가서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여보, 그래도 난 감자탕은 싫어!”
왜 이렇게 서로 대화가 힘들까? 내 몸보다 소중하다는 가족이고, 내 뱃속에서 열 달을 키운 자식인데. 예전에는 눈빛만 봐도 모든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고, “무-”소리만 나도 물을 떠다 주던 빛나는 일치의 시간이 분명 있었던 걸 기억하는데.
“네가 보기에 이 운동화 어때?” 친구가 보여준 것은 우리 딸내미도 갖고 있는 브랜드의 운동화로 학생들이 즐겨 신는 디자인이었다.
“무슨 말이야?”
“이 운동화가 이상해 보이냐고?”
“아니. 그냥 운동화인데 뭘.”
“그렇지? 괜찮지?”
별일 아닌 것 같은데 친구는 몇 번이고 나에게 그 운동화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했다.
“백화점에 갔다가 세일하는 운동화가 괜찮아 보여서 사 온 거야. 그런데 애가 죽어도 저 운동화를 안 신겠다는구나.”
“왜?”
“그냥 무조건 싫다는 거지. 이 운동화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느냐, 뭐가 이상해보이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도 안하고 싫다고만 고집을 부려서 어제 한바탕 했어.”
나는 다시 한 번 꼼꼼히 운동화를 살펴보았다. 특별히 싫을 만한 점도, 독특해 보이는 점도 없는 아주 무난한 스타일의 흰색 운동화였다.
“그래도 뭔가 싫은 이유를 말했겠지?”
“이렇게 말하더라. 이건 엄마 스타일이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운동화 하나에 무슨 스타일을 찾는지 내 원 참.”
그때야 나는 모녀간에 갈등을 빚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는 그 운동화의 어떤 점이 싫은 게 아니라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딸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보다는 운동화에 집중했다. 도대체 “그 운동화”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닦달한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평행선을 달렸다. 아이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이야기했고, 엄마는 아이의 마음이 아닌 운동화를 바라보며 뭐가 문제냐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나는 감자탕을 싫어한다. 왜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국물의 느끼함과 노린내 비슷한 냄새가 싫다. 친구가 맛있는 데라고 몇 번 데리고 가서 억지로 먹긴 했는데 그냥 싫어하는 음식으로 분류하고 더는 가지 않기로 했다. 하루는 남편과 산책을 하는데 24시간 감자탕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감자탕을 먹으러 온 사람으로 식당은 북적이고 있었다.
“여보, 난 감자탕이 싫은데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나봐.”
“감자탕이 왜 싫어? 얼마나 맛있는데.”
“냄새도 싫고, 맛도 모르겠던데.”
“그건 맛있는 데 안 가봐서 그래. 맛있게 하는 집에 가면 당신도 좋아할 거야.”
“유명하다는 집에 가서도 먹어 봤다고.”
“제대로 하는 데를 가야지.”
우리는 어느 새 격렬하게 논쟁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감자탕이 맛있다는 자신의 견해를 바꿀 생각이 없었고, 나는 감자탕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감자탕이 맛있는지 아닌지를 논쟁으로 정할 수 있는 건가?
“여봇! 감자탕이 나한테 맛있는지 아닌지를 왜 당신이 결정해? 내 입맛이라고!”
날씨가 추우니까 속옷을 더 입으라는 엄마와 춥지 않다는 아이, 왜 이렇게 귀가시간이 늦느냐는 아내와 할 일이 많아서 어쩔 수 없다는 남편. ‘춥다 : 춥지 않다, 늦다 : 늦을 수밖에 없다’의 대립은 서로의 의도와 마음, 감정을 알아차리지 않는 한은 해결되기 어렵다. 앞으로는 ‘그 무엇’이 아닌 상대가 표현하는 ‘나’에 집중해보자.
“네가 그렇게 옷을 얇게 입고 가면 추워서 떨까봐 하루 종일 걱정이 되잖니.”
“엄마가 걱정하는 마음은 아는데, 이 나이에 내복을 입는 건 창피해요. 차라리 좀 추운 게 마음이 편해요.”
“당신이 매일 늦으니까 이야기할 시간도 없고 외롭다는 느낌이 들어요.”
“일부러 늦게 오는 건 아닌데 당신이 매일 잔소리하니까 야단맞는 것 같고 집에 오는 게 더 싫어졌어.”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이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진다. 내 생각에 좋은 것과 다른 사람 보기에 좋은 것이 서로 상반될 수도 있음을 알 때 비로소 이해와 수용이 가능해진다. 꼭 이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에게는 귀찮고 힘든 일이라는 것, 정말 걱정스럽고 말리고 싶지만 아이는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아이는 부모가 내 마음을 알아준다고 느낀다.
나는 감자탕이 정말로 싫지만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아내와 함께 가서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여보, 그래도 난 감자탕은 싫어!”
3개의 댓글
필자
조선미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임상심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한국 임상심리학회 전문가 수련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으며, 임상심리학과 관련된 저서와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94년부터 아주대학교 병원에 재직하고 있으며, 아동을 대상으로 심리평가와 치료프로그램, 부모교육을 해왔다. 부모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아동 이상심리, 부모교육훈련, 행동수정을 주제로 다수의 강의를 하였다. 현재 EBS TV ‘생방송 60분 부모’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저서로, 『부모 마음 아프지 않게, 아이 마음 다치지 않게』『조선미 박사의 자녀교육특강』이 있다.
jehovah511
2012.05.04
yeunbora0821
2012.05.03
psspsshi
2012.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