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여신들이 건네는 여자 이야기, 우리 이야기
1000번째 수요집회 풍경. (출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000/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시위가 작년 12월 14일로 1000회를 맞았다. 1992년 1월 8일부터 할머니들은 비가오나 눈이오나 20년째 그곳에 모여 일본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했다. 1000번의 집회. 손으로 꼽아도 아득한 숫자. 할머니들은 여전히 수요일마다 그곳에 모여 풀꽃처럼 시위한다.
61/ 지난 3월 12일. 배복남 할머니가 타계하면서 남은 일본인 위안부 피해 여성 생존자는 61명이다. 이 숫자는 점점 줄어갈 것이다. 우리는 ‘위안부 피해 여성’에 관한 문제가 붉어질 때마다 그 자리에서는 발끈하지만, 이들이 수요일마다 싸우고, 하나씩 사그라드는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다.
18/ 18명의 홍대 여신들이 모였다. 송은지, 시와, 소히, 이상은, 오지은, 황보령…… 21세기에 음악으로 소통하는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에 관해, 여성의 몸에 관해, 평화에 관해 이야기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외침과 속삭임” 컴필레이션 음반 <이야기해주세요> 제작발표를 겸한 공연이 4월 26일(KT&G 상상마당), 28일(홍대 클럽 씨클라우드) 열린다.
1/ “이 프로젝트를 제안한 송은지 씨의 말이 내게 파문을 일으켰던 것처럼, 우리들의 노래가, 이야기가 한 사람에게 소중한 계기, 의미 있는 파문이 되었으면 좋겠다.”(시와) 공연에 앞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송은지, 시와, 소히, 이 프로젝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는 안혜룡 감독, 영화 <레드마리아>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홍혜림 씨가 홍대 한 카페에 모였다.
송은지 씨를 시작으로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거기서 시작한 이야기는 지금의 사회에서 다뤄지는 여성 문제로, 내가 겪은 삶의 문제로 확장되고 깊어졌다. 당신도 공감할 이들의 이야기. 당신 한 사람부터 귀와 마음을 기울여주길 고대하는 이 프로젝트에, 이 날의 대화에 당신을 초대한다.
우리 할머니들의 이야기처럼 할 수는 없을까?
왼쪽부터 안혜룡 감독, 뮤지션 시와, 소히, 송은지
홍혜림(이하 ‘홍’): 이 시점에 왜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일단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얘기해보자. 송은지 씨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송은지(이하 ‘송’): 2006년 쯤,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 할머니에 관한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를 잃고 슬퍼하던 시기였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대로 다 돌아가시면 나중에 어마어마한 후회를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홍: 할머니 이야기가 위안부 할머니로 이어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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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까지 위안부 할머니에 관해 조금 더 쉽게, 조금 더 가깝게 얘기한 사람이 없었을까 싶었다. 연구하시는 분들도 위안부 할머니 얘기를 어렵게 생각하시더라. 우리 할머니 생각에서 그렇게 가깝게 불러일으켜지는 존재들인데, 우리 할머니들의 얘기처럼 할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을 계속 해왔고, 소히랑 ‘릴리스의 시선’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 문제를 공부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여성 뮤지션들의 존재가 이전보다 많이 알려졌고, 수요집회도 1000회를 넘은 때라 이 때에 여성 뮤지션들이 모여 위안부 할머니들 얘기하기에 좋은 때가 아닐까 싶었다.
소히: 위안부 문제는 전쟁과 색슈얼리티가 결합되어 있어서 잘못 말하면 파장이 커진다. 그래서 더 어려운 문제 같더라. 이번 곡 작업을 하면서도, 행여 할머니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자꾸 검열을 하게 되더라.
성폭력 피해는 왜 쉬쉬 감춰야만 하나?
홍: 소히 씨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
그런데 그날 모인 사람들 모두 성추행이나 비슷한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더라. 그날 위로를 많이 받았고, 여성학자 정희진 씨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 왜 강도나 폭행과 달리 성폭력은 우리가 눈물지으면서 말하고 쉬쉬해야 하나. 아직도 이런 얘기할 때면 떨린다. 이게 지금 우리의 사회 분위기인 것 같고, 변화가 필요한 것 같다.
할머니들이 이대로 다 돌아가시면 우리가 되게 부끄럽지 않겠냐는 말에 공감했고, 노래를 통해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공유하고 기억하는 게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지금도 같이 살고 있는 한 인간, 한 여성으로 이야기하고 싶었고, 나 역시 할머니가 되어간다는 맥락에서 노래하고 싶었다. 그래야 그 문제를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쉽진 않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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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자기 경험에 살을 붙여가면서 위안부 문제, 여성의 몸, 이 시대 여성이 살아간다는 것까지 연결이 되었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연출한 안혜룡 감독님은 어떤가? 유일한 홍일점인데, 오랫동안 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안혜룡(이하 ‘안’): 할머니가 지금 갖고 있는 느낌이나 감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 사실 남성으로 피혜 사례를 듣거나 말을 꺼내는 건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할머니에겐 이미 그런 질문의 반복이 수십, 수백 번 있었을 거예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에 위안부 재판에서 지고 나서 사람들이 우울해하고 있으니까 송신도 할머니가 ‘너네들, 그러지 말고 내 노래를 들어봐’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그 노래가 좌중을 휘어잡고 분위기를 바꾼다. 할머니도 여전히 아픔과 슬픔이 있을 텐데, 10년의 재판 과정을 통해 송신도 할머니는 개인의 피해를 이야기하기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피해, 죄악, 두려움 속에서 인간이 상실되어가는 것을 얘기하더라.
지원하려고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폭력의 경험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자신이 체험한 경험을 송신도 할머니를 통해 세상에 문제제기를 하고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젊은 여성 뮤지션들이 현재의 감성으로 이 문제와 만난다니 흥미롭다. 송신도 할머니 같은 경우 집회 때 꼭 부르는 노래가 두 곡이 있다. 두 곡을 넘기면 옛날의 상처들이 드러나는 몸동작이 나오는데, 그럼에도 노래하고 춤추는 할머니의 힘. 그 힘이 이 앨범을 준비하는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더라.
“위안부 문제, 내 경험에 살을 붙여가면서 접근한 프로젝트” (홍혜림)
“과거의 피해사례 증언 넘어서 할머니들이 지금의 감정, 행복, 삶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안혜룡)
홍: 그런데 감독님은 왜 하필 위안부 할머니에 꽂혔나?
안: 93년도쯤, 정대협에서 한 위안부 할머니 장례식을 용산역에서 치른 적이 있다. 피해 여성들이 헌화하고, 영구차가 역을 빠져나가는데, 장식했던 꽃들이 버려진 채 용산역 광장에 남아 있는 거다. 그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촌구석에 정수재 할머니는 군위안부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50년 동안 한국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할머니를 만나서 ‘우리 말 기억하시는 거 있어요?’ 물었더니, 아무 말없이 눈물을 주륵 흘리시더라. 순간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던 거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이름. 마지막으로 돌아갈 자기집 주소를 기억하시더라. 그것 외에는 모든 말을 잊었다. 그때 할머니 인상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힘으로 지금까지 작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우연하게 할머니 집회나 사진을 찍게 됐고, 정대협 식구들이 위안부 할머니 비디오 증언집 작업을 부탁했다. 그 작업 중에 많은 증언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건 사적인 기록이라 오픈 할 수 없었다. 그걸 공개적으로 알릴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
송: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성폭력 반대 목소리를 내는 단체에서 친구들과 함께 관람했다. 그 영화에서 송신덕 할머니가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고 전쟁은 안 된다’고 얘기를 마무리한다. 그때 본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가 성폭력 피해자라고 얘기하면 사람들이 불편해하니까, 그 개인의 아픔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사람을 슬프고 불편하게 하니까 다른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감: 절대 그렇지 않다 .송신덕 할머니 같은 경우는 처음 피해 당한 일에 관한 기억이 아예 없다. 재판 과정에서는 그게 굉장히 중요해서, 여러 차례 얘기를 들으려고 했으나 계속 딴 얘기만 하신다. 의도적으로 지운 거다. 할머니들의 얘기를 그렇게 이론적으로 분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학자들이 할머니들의 상처를 헤집으며 공격적으로 질문을 해댈 때면, 옆에 있는 나까지 불편해질 때가 있다. 할머니와의 유대관계가 중요하다. 자연스러운 사이 속에서 신뢰감 있는 얘기를 들어야 하는데 학자들은 빨리 이야기 꺼내는 데 급하다.
소희: 나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런 질문 하지 말라고. 세밀하게 들어가면 말하기 싫다. 말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상상한다.
전세계 모든 여성, ‘그런 경험’ 하나씩 갖고 있을지도
홍: 음반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나? 이 문제와 음악이 어떤 접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송: 저는 사실 아직 곡을 못 만들었다.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모임을 가지면서 정리하고 있다. 내 경험이 주변의 경험들과 만나면서 계속 확장되는 거다.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안부 할머니와 직접 관계가 없을 수도 있고, 직접적인 성폭력이나 전쟁 얘기는 아닐지라도 여성의 어떤 결핍에 관한 노래가 될 것 같다.
소히: 제 노래는 직접적으로 성추행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성추행을 겪는 일은 사실 정말 흔한 일이다. 남자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대체 누가 그런 일을 당하냐고 되묻는데, 주변에는 정말 많은 거야.(웃음) 바바리맨을 만났다거나 누구나 그런 경험 있잖나.
한번은 좌석버스에서 어떤 사람이 내 옆구리에 손을 얹고 있더라. 겨울이고 옷도 두꺼웠는데 뭐가 좋은지.(좌중 웃음) 그런데 그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욕하고 도망도 못 갔다. 이것 또한 위안부 할머니와 직접적인 관계는 아닐지 모르겠는데, 요즘 일어나는 흉흉한 사건이나 군대에서 벌어지는 위계적인 폭력도 이 문제와 다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곡을 앨범에 싣게 되었다.
시와: 소히씨 얘기를 들으니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전 세계 모든 여성이 얘기를 하면, 모두가 다 그런 경험 하나씩 꺼낼지도 모른다. 내가 은지나 소히씨 얘기에 금방 반응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여성으로 살아왔고, 폭력적인 상황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여성이 공감능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사실 비슷한 입장이어서 더 잘 공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피해자로서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더 크게 평화를 얘기하고 싶고, 그렇게 이 프로젝트를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다.
소히: 어떻게 그 남자가 내 옆구리에 손을 얹고 갈 수 있는 건가 생각하다 보면 그런 사회 분위기가 있는 거고 그런 사회가 있다는 거다. 그런 일이 어느 정도의 피해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고. 그렇게 전쟁으로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홍: 이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한 고민을 할 것 같다. 어떻게 선정적이지 않고 공격적이지 않게 이 문제를 알릴 수 있을까? 영화 <레드마리아>의 할머니는, 50대 할머니가 돼서야 10대에 겪었던 전쟁의 폭력에서 자유로워진다. 그 동안에는 아이들이 일본에 가서 일해야 하니까, 남편들의 체면을 지켜줘야 하니까, 내가 몸을 지키지 못한 여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니까.
사회적 약자들이 말하지 못하고 책임을 묻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도록 용인된 사회적 분위기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싶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슬픔이나 증언에 그치는 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이 이슈를 자신과 연결 짓는 과정이 가장 흥미로운 것 같다.
송: 폭넓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으로만은 부족할 것 같다. 불편함을 모면하고자 다른 방식을 차용하는 게 아니라, 불편함을 넘어서서 더 큰 걸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와: 그래서 우리 음악이 좋아야 된다!(웃음) 어느 한 사람에게 감상이나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면 된다.
“할머니들이 일본 노래 부르면, 일본 사람들 우울해진다더라”
홍: 시와 씨 노래 얘기를 더 해달라.
시와: 제목은 <아무도 묻지 않았네>다. 사실 할머니를 만나지 않고 만든 곡이다. 혹시 내가 할머니를 직접 만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네. 내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나의 꿈이 무언지 묻지 않고서 내 어깨를 두드리고 가네. 멈춰있는 시계는 나의 것이 아니네.’ 이런 가사다. 사람들이 우리를 토닥이고 감싸 안아주지만 지금의 나의 행복보다는 옛날을 증언해야 하는 역할로서만 대하는 건 아닐까. 할머니 입장에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송: 아마 직접 만나보면, 너무 걱정했구나, 다행이다 생각할 거다. 나도 처음에는 뵙거나 뵙지 않아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뵙고 나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할머니의 입장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오히려 안도가 되었달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뭔가를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가서 노래방 기계로 잠깐 노래를 불러도 즐거워하신다. 춘희 할머니라고, 빅밴드로 30년을 떠돌아다닌 분이 계신데, 나이가 아흔이시다. 러시아 사람 만난 얘기를 하면서 러시아 노래를 부르고, 중국 노래를 부르는데 어찌나 이야기가 재미있는지.(웃음)
안: 할머니들이 일본 노래 하는 걸 보면 일본 사람들이 갑자기 우울해진다더라. 그 정도로 상처를 주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단다. 할머니들은 일본 노래를 부른다. 어렸을 때 기억일수록 지워지지 않으니까. 아무리 신곡이 나와도 옛날 노래를 그대로 기억하더라.
송: 노래는 정말 신기한 것 같다.
안: 내 노래도 9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노래는 입력이 안 된다.
“무엇보다 음악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희)
“한 사람에게라도 나와 같은 파문이 일었으면” (시와)
“이효리, 호란 씨도 참여하기로… 프로젝트 확장되길” (송은지)
홍: 이미 많이 얘기가 된 것 같지만 여전히 묻히고 있는 이 얘기를 영화로 음악으로 하고 있다. 작업하면서 이랬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이 있다면?
송: 이 얘기가 사실 그렇게 먼 얘기가 아닐 수 있다는 정도의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그 정도다. 음악이 좋을 거기 때문에 음악을 즐기셨으면 좋겠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소히: 이번 작업을 하면서 힘을 얻고 나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가장 큰 바람은 더 이상 이런 일들을 쉬쉬하지 않고 오픈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시와: 이제까지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불렀다.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노래를 한 거라 나 개인적으로 작업 영역을 넓힌 의미가 있고, 이 음반에 실리는 모든 노래가, 마치 은지씨가 나에게 작은 돌 하나의 파문을 일으켰던 것처럼 어떤 계기, 좋은 실마리가 되길 바란다.
송: 음반을 많이 사주셨으면 좋겠다.(웃음) 처음 이 작업을 시작할 때 <레드마리아>에서 연락이 왔고, 다른 위안부 문제 관련 작업을 하는 그림책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고, 에니메이션을 만드는 분에게 연락이 오더라.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의 계기로 만나게 되는 거, 굉장히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
홍: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지금 열여덟 명이고, 더 늘어날 예정이라고?
송: 이효리 씨가 연락해서, 본인이 곡을 만들어서 참여하고 싶다고 하더라. 호란 씨도 참여할 것 같고. 그렇게 두 번째 음반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권진원 씨, 장필순 씨. 몇 분에게 더 연락을 해볼 참이다.
양: 할머니를 계기로 만났고, 프로젝트 팀을 꾸리고 서로 삶을 나누게 된 거잖나. 그러다 보면 앞으로 작업을 해나갈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중요한 거 하나만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hong90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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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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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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