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그릇된 선택이 부른 아이들의 슬픔
작가 페터 반 게스텔은 전쟁의 비극이나 유대인 학살의 끔찍함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한 어조로 아이들이 겪은 이별들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 아픔을 이겨내고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작가는 처음부터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모른다.
글ㆍ사진 박희라
201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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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이별에 마주한다.
그 이별은 때로는 가족의 것이기도 하고, 친구의 것이기도 하며, 사물이기도 하고, 추억이기도 하다.
『그 해 봄은 더디게 왔다』는 바로 이러한 이별에 관한 이야기이다.


1년 반 전에 엄마가 죽었다. 꼭 집어 말하자면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 p.17



토마스는 엄마를 잃었다. 소년의 아빠는 엄마를 묻고 난 뒤 한 주일 내내 밤마다 거리를 헤매고 다녔고, 물을 넣지 않은 주전자를 가스 불 위에 얹어 놓거나, 얼어붙은 수도꼭지에 말을 걸었다. 엄마의 언니인 피 이모는 토마스를 돌보아 주고, 토마스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소년과 아빠가 엄마의 죽음을 외면하던 겨울, 토마스는 학교에서 피에트 츠반과 그의 사촌 누나 베트를 만난다. 유대인인 소년과 소녀는 전쟁의 과정에서 부모를 혹은 아버지를 잃었다. 어느 날 부모님은 독일로 끌려갔고 수용소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그 상황을 피해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마주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이 정작 아이들을 덮쳤을 때, 어른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이겨내야 하고, 자신을 정리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토마스의 아빠는 아들에게 그 죽음을 애도할 시간을 주지 못한다.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그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이 겪고 있는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토마스의 감정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는 정확히 정리되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그저 붙잡고 있게 된다. 유대인인 아버지를 전쟁에서 잃은 베트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소녀의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집을 꾸려나가는 것은 아이의 몫이 된다. 베트는 그러한 엄마를 비난하고, 아빠를 잃게 만든 세상을 미워한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수용소에서 돌아오지 못한 친척들의 사진을 가득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과거에 가두려 한다. 그리고 부모님 모두를 잃은 츠반은 부모의 추억을 물어볼 이가 아무도 없고, 스스로도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린다.

어른들이 자신의 상처를 추리기 위해 필사적인 동안, 아이들 또한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추억을 더듬고, 기억을 회상한다.


“우리 엄마는 손이 언제나 젖어 있었어.”
“어떻게 알아?”
“우라지게 자주 내 코를 꼬집었거든.”
“내가 엄마를 마지막으로 밨을 때 난 여섯 살도 채 안 됐어. 그래, 우리 아빠, 아빠 손은 아직도 기억이 나. 손가락이 길고 검은 털이 나 있었어. 아빠는 언제나 짙은 색 양복을 입었고 엄격해지고 싶을 때면 아주 나지막하게 말했지.” --- p.207

우리는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둘 다 던 턱스 거리의 환한 방이랑 거기서 열린 생일잔치랑 이제는 다 죽어버린, 웃고 즐거워하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 p.208



작가 페터 반 게스텔은 전쟁의 비극이나 유대인 학살의 끔찍함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한 어조로 아이들이 겪은 이별들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 아픔을 이겨내고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작가는 처음부터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그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사람들은 꿋꿋이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책을 덮으며, 한가지 아픈 질문이 남는다.

아이들이 겪었던 그 슬픔이, 아픔이, 어른들의 올바른 선택이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을지 모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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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은 더디게 왔다 페터 반 게스텔 저/이유림 역 | 돌베개

전쟁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194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유난히 춥고 길었던 겨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아이의 우정과 사랑, 만남과 이별 이야기이다. 이 책은 많은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소설과는 다르게 전쟁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세 아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상처에 눈을 돌린다. 아이들은 가슴 깊이 응어리진 아픔을 서로에게 털어놓으면서 친구가 되고 사랑에 눈떠 간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마음속과 세상의 얼음이 녹아내리기를 함께 기다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봄이 찾아온다...

 




#그 해 봄은 더디게 왔다 #페터 반 게스텔 #2차 대전 #청소년 문학
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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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k1226

2012.05.09

어쩌면 전쟁이 주는 참혹한 현실보다 그 상황가운데 개인이 겪어야하는 다양한 이별을 그려낸 모습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다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희망을 나누는 과정이 바로 삶 가운데 성장하는.. 그들의, 또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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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ve

2012.04.09

아픔이 가슴에 깊이 남아 있으면, 그런 것 같아요. 봄이 와도 별 느낌이 없다거나 아주 더디게 오는 것 같은. 아이들은 아직 치유할 시간 기회가 많은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더딜 수도 있네요.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어느새 봄은 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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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북

2012.04.08

전쟁이나 사고 몸이 아파서 우리는 언젠가 가야하고 보내야해요 죽음은 외면해도 안되는 일..아이들은 어느순간 알게 되겠지요 슬픔을 받아들여야 한다는걸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래서 사랑하고 아끼는 일만 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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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라

극단적인 애교와 극단적인 무뚝뚝함을 달리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웃어 넘기는 대인배가 되고 싶지만 추운 날씨에도 화가 나는 소인배입니다. 빨간머리 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열광하고 보들보들한 촉감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