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과 캄보디아와 중동을 공부하는 시간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베트남을 만났다. 마치 호치민의 호젓한 카페골목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맞닥뜨린 기분이다. 스크랩 제9권(1973년1월~1974년12월)을 열자마자 베트남전 휴전협정을 말하는 아버지의 글귀를 읽는다.
201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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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남쪽에서 서서히 북상을 한 적이 있다. 호치민(사이공)에서 나짱(나트랑)으로, 나짱에서 뚜이호아로, 뚜이호아에서 퀴논으로, 퀴논에서 쿠앙응아이로, 쿠앙응아이서 호이안으로, 호이안에서 다낭으로, 다낭에서 하노이로 올라갔다. 먼 거리는 비행기로 날았고, 짧은 거리는 렌트카를 빌려 달렸다. 엉뚱하게도,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호텔 객실 미니바의 캔맥주 가격이다. 다낭까지 올라갈 때마다, 가격이 내려갔다. 나짱에서 캔당 10,000동(우리돈 1,000원쯤)이었다면, 뚜이호아는 8,000동이었고, 쿠앙응아이에서는 7,000동이었으며, 다낭 쯤 가서는 5,000동으로 내려갔다. 물론 북쪽 하노이에 도착하자 남쪽 호치민보다 더 비싼 12,000동쯤으로 올라갔지만 말이다.
베트남을 열 세 번 갔다. 한두 번을 제외하면 모두 출장이었다. 그 출장이란 것이 죄다 전쟁 때문이었다. 베트남전 말이다. 10여 년 전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을 만들 때 베트남전 캠페인을 담당했다. 그 캠페인이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작전 결과와 관계된 내용이었다. 피해자들의 끔찍한 증언과 원한을 기사화했고, 이와 관련한 신문사의 여러 평화사업에 관여했다. 그래서 나에게 베트남이란 나라는 특별하다.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베트남을 만났다. 마치 호치민의 호젓한 카페골목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맞닥뜨린 기분이다. 스크랩 제9권(1973년1월~1974년12월)을 열자마자 베트남전 휴전협정을 말하는 아버지의 글귀를 읽는다.
1973년이면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다. 그해 어느 날의 풍경이 떠오른다. 여느 때처럼 학교를 파한 뒤 책가방을 메고 논둑길을 지나 20여분을 걸어 집까지 돌아왔다. 점심 나절이었다.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며 “엄마”하고 불렀으나 답이 없었다. “아빠”하고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정적이 집안을 감쌌다. 예고 없는 부재가 서먹하고 수상했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농촌마을의 주택이었다. 열 번을 넘게 불러도 반응이 없자, 어린 마음에 무서움이 몰려왔다.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옷장 속에서 엄마와 아빠가 “짠” 하고 나타났다. “놀랐지”하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아버지의 천진스러운 장난이 기억나는 건 딱 그 무렵까지다. 스크랩에 적힌 글은 아버지의 생소한 이면이다. 전쟁의 무상, 민족의 화해…. 마치 대학의 정외과나 사학과 신입생이 ‘1973년 베트남전 휴전에 관하여 논하시오’라는 제목으로 리포트를 쓴 느낌이랄까.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전쟁은 끝났다- 다만 조인식이 끝났다는 것이다.” 무난한 정세판단이지만 말이다.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위 글의 소재가 된 신문기사를 보자.
오늘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와 중동을 공부하는 시간이다. 왜 하필 이 세 나라일까. 아버지의 스크랩 9, 10권(1973년1월~1976년10월)에 있는 국제뉴스 중에서 가장 눈에 띄기 때문이다.
1973년은 베트남전이 파리 휴전협정으로 중대한 쉼표를 찍고, 종전 국면으로 치닫던 고비다. 베트남에서 한 발짝 물러난 미국은 그 옆에 있는 캄보디아에서만은 변함없이 ‘전쟁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공산 저항군이던 크메르 루주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 2월부터 B-52기로 고성능 폭탄을 마구 투하했다. 하루 평균 81회 출격하며 6개월간 25만7천톤을 쏟아 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크메르 루주는 독이 오르기 시작했다. ‘킬링필드’를 부르는 ‘킬링필드’였다. 중동에서는 10월6일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둘러싸고 이집트-시리아 2개국과 이스라엘간에 육해공 전면전이 벌어졌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이에 격분한 아랍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 생산량을 1/4로 줄였다. 미국으로의 석유 선박출항도 전면금지했다. 1973년 한 해 동안 기름값이 4배로 뛰었다. 1차 오일쇼크다.
베트남, 캄보디아, 중동 순으로 뉴스를 훑어본다. 각각 세 가지씩 요점정리를 해 본다.
먼저 베트남. 파리에서 열린 위의 베트남전 휴전협정은 1972년에 본격화한 미-소, 미-중 화해무드의 결과물이었다. 파리 휴전협정을 통해 미국은 남아있는 병력을 60일 이내로 철수할 것을 약속했다. 북베트남은 수백 명의 미군 포로를 석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두 배인 700만톤의 포탄을 베트남을 퍼부었지만, 국내외의 반전여론에 부닥친 닉슨 행정부는 이 전쟁을 계속 끌고 갈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의 후원을 얻어 휴전협정을 성사시켜야 했다.
8년간 연인원 32만명(전투병력은 5만명)을 파병한 한국군도 철수했다. 1973년3월21일치 신문은 파월 장병들의 귀국풍경을 사진으로 전한다. 따뜻한 환영 물결이다. 별 세 개 달린 아빠의 볼에 여고생이 뽀뽀하는 사진은 눈에 익다. 설명을 보니 “주월군사령관 이세호 중장의 2녀 이진희양(16?중경고1)”이다.
아버지가 “울렁거린다”고 하니 아들의 속도 울렁거린다.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시 같으니. ‘전쟁은 괴로운 대화’ 맞다. 휴전을 했으나 괴로운 대화는 계속되었다. 남베트남은 안에서 들끓었다. 북베트남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맨 앞에서 나는 10여 년 전의 베트남 북상 경험을 적었다.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휴전 2년 뒤인 1975년3월10일부터 거꾸로 남하를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조여들어왔다.
다낭을 함락시킨 뒤 호이안으로, 호이안에서 쿠앙응아이로, 쿠앙응아이에서 퀴논으로, 퀴논에서 뚜이호아로, 뚜이호아에서 나짱(나트랑)으로, 나짱에서 호치민(사이공)으로 내려갔다. 그때의 캔맥주 값은 얼마였을까. 한 1,000동(우리돈 100원으로 쳐보자)쯤 했을까? 왠지 내려올 때마다 가격이 더 싸지지 않았을까 싶다. 술 마실 겨를도 없이 도망가는 사람이 많았을 테니.^^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닉슨은 1973년1월 파리 휴전협정 당시 응웬 반 티우 대통령에게 “북베트남이 협정을 위반할 경우 B-52기를 보내 월남군을 지원하겠다”는 친서를 전달한 바 있지만, 그는 1974년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을 당한 뒤였다. 후임 포드 대통령은 남베트남의 SOS요청에 따라 ‘월남긴급군사원조안’을 의회에 요청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미국인이라면 다시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고 싶었을까? 미 의회는 1975년4월19일 이를 부결시켰다.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4월21일 미국에 섭섭함을 전하는 사임성명을 발표한 뒤 금괴를 챙겨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대만과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응웬 카오 키 부통령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들이 떠난 뒤 대통령직을 떠안았던 즈엉 반 민은 1975년4월30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사이공 함락을 반공체제 강화의 계기로 활용했다. 스크랩엔 1975년5월11일치 <한국일보>의 ‘백40만의 함성…서울시민 안보궐기대회’라는 제목의 기사가 붙어있다. 임택근 MBC 전무(그 유명한 아나운서 임택근, 임재범의 아버지)의 사회로 5월10일 상오10시 여의도 5.16광장에서 열렸다. 문화계 대표로는 시인 조병화가, 종교계 대표로는 조용기 목사 등이 참여했다. 이날 대회에서 허정 대회장(전 내각수반)은 개회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에게는 ‘공포’가 학습되었다. 텔레비전에선 바다를 떠도는 보트피플의 영상이 무한 반복되었다. 월남패망의 교훈은 곡해되어 유포됐다. “국민의 신임을 얻어야 정권이 유지된다”가 아니라 “말 안 듣고 까불면 저렇게 된다”였다. 베트남을 세 가지로 요점정리 해본다.
1. ‘떡’
베트남전은 대한민국의 ‘떡’이었다. ‘횡재’였다는 뜻이다. 미국은 1966년3월 브라운 각서를 통해 방위협조는 물론 군사장비 현대화, 차관 제공과 대월남물자 및 용역의 조달 등을 한국 쪽에 약속했다. 연인원 32만명을 파병한 피의 대가로 한국은 해외전투수당과 지원금을 받았고, 각종 현지 공사의 입찰권을 따냈다. 이 결과 베트남전이 종전되던 1975년을 기점으로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추월했다. 물론 진짜 ‘떡’은 박정희가 챙겼다. 대군을 파병하는 충성심을 과시함으로써 3선과 긴급조치 등의 집권연장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그 어떤 견제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2. ‘보호’가 아니라 ‘공격’
미국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대략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선 미국이 남베트남을 ‘보호’했다고 말한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공격’했다.” 본질을 흐리는 언어의 함정에 관한 예리한 지적이다.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도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과연 남베트남을 ‘보호’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패한 기득권세력만을 ‘보호’한 것은 아닐까?
베트남 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남부 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5천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희생당했다. 한국군은 남베트남을 ‘공격’했다.
3. ‘속물주의’
베트남은 전쟁으로 처참히 파괴됐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한국의 GDP(국내총생산)는 20,757달러, 베트남은 1,224달러로 20배 차이다.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 건너와 3D업종에서 일한다.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혼인율도 늘고 있다. 중국 다음으로 많다. 2010년 외국인과의 혼인율을 보면 전체 3만4,200건 중 중국, 베트남인과의 혼인율이 73.2%다. 이중 중국 여성과의 혼인은 감소세이고, 베트남 여성과의 결혼은 증가 추세다. 한국 남성들은 베트남을 얕잡아본다. 흔히들 말한다. “세계 최강국 미국을 이겼다고? 그러면 뭘해. 그래서 지들이 우리보다 잘 살아?” 이 말은 속물주의의 백미다. 베트남은 한국인들의 속물주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제 캄보디아로 넘어간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은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에서도 멀지 않다. 버스를 타고 육로로 6시간이면 갈 수 있다. 베트남은 자주 갔지만, 캄보디아 땅은 밟아보지 못했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을 여행하려는 계획을 잡았다가 포기한 적은 있다. 캄보디아는 한국인들에게 ‘킬링필드’와 ‘앙코르와트’로 기억된다. 전자는 정치상품, 후자는 관광상품이다.
‘킬링필드’는 고약한 기억이다. 아버지의 스크랩에도 고약한 제목으로 붙어있다. 딱 두 페이지에 걸쳐서다.
일단 사진효과가 출중하다. ‘파리-마치誌’로 출처가 적힌 이 사진은 ‘총알 아까워 곡괭이로’라는 제목을 달았다. 설명을 보자.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크메르 루즈가 곡괭이로 한 농민을 처형하고 있다. 왼쪽 끝에 총을 든 크메르 루즈가 도망가지 못하게 지냅고 있다.”
이 사진은 진짜일까. <한겨레21>에 근무하던 2001년이었다. 베트남-캄보디아 분쟁에 관한 기사를 편집하면서 바로 위 사진을 사용했다가 필자에게 항의를 들었다. 나는 이 사진을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생각했다. 국제분쟁 전문기자였던 그 필자는 “장난이 심한 조작사진”이라고 단정했다. 1976년이면 국경 난민촌에서 유엔의 인도적인 구호품 보급까지 차단하며 크메르 루주 정권을 압박하던 CIA와 MI5(영국 정보기관)이 조작사진을 뿌려댈 시점이라고 했다. 캄보디아 내부에서도 가장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던 시절이라 현장에 들어간 종군기자가 확인된 적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1976년4월은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한 지 딱 1년 되는 때였다. 1975년4월17일, 크메르 루주는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로 집권했던 론놀 정권을 뒤엎었다.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점령하기 보름여 전이었다. 아버지의 스크랩에는 프놈펜 점령에 관한 기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위 기사에 따르면, 1년 만에 50만~60만 명이 죽었다. 크메르 루즈는, 1979년1월의 베트남군 침공에 의해 물러나기까지 총 3년7개월간 집권했다. 이 기간의 참상을 보여주는 여러 통계가 있다. 100만 명 이상이 처형과 고문, 굶주림, 강제노동으로 죽었으며 그중 50만 명이 처형당했다는 추정이 있다. 심지어 진 라코처라는 사람은 <이어 제로>(Year Zero>라는 책에서 200만명 이상이 학살당했다는 주장을 폈다. 캄보디아 3대 요점정리로 바로 직행해본다.
1. 너네가 더 죽였어 임마
미국이 더 죽였을까, 크메르 루주가 더 죽였을까.
크메르 루주가 집권했던 1975~1979년 기간의 킬링필드 앞에는 ‘제2기’라는 수식이 붙어 마땅하다. 제1기 킬링필드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1969~1973년의 일이다. 미군은 이 기간에 캄보디아를 지나는 베트콩들의 물자보급로인 호치민루트를 봉쇄한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캄보디아에 5년 동안 투하한 53만9129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폭탄 16만톤의 3배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캄보디아 폭격은 미국 내에서도 비극을 불렀다. 1970년5월4일 폭격을 반대하며 사흘간 거칠게 시위를 하던 오하이오주 켄트대 학생들에게 주방위군이 총격을 가해 4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캄보디아 연구자인 데이비드 챈들러와 마이클 비커레이는 1969~73년간 40만~80만 명의 캄보디아 민간인이 죽었다고 추산한다.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의 추산은 60만 명이다. 데이비드와 마이클은 이러한 미국의 제1기 킬링필드에 이어, 크메르 루주가 자행한 제2기 킬링필드 때 처형당한 인원을 각각 10만 명과 15만~30만 명으로 추산한다. 기아?질병?중노동으로 사망한 이들은 75만 명이다.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사형과 질병, 기아로 사망한 이들을 합해 약 100만 명으로 밝힌다.
크메르 루주에게 죄가 없지는 않다. 다만 미국과 책임을 나눠 가져야 공정하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2007년11월부터 법정 심리가 열리기 시작한 크메르루주 국제전범재판소의 피고석에 미국 쪽 인사(예를 들면 키신저 당시 대통령 안보고문)도 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2. 크메르 루주는 역대 최고의 ‘소개팅 정권’이었다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 루주의 병사들은 집집마다 돌며 “2~3일내로 프놈펜을 떠나라”고 시민들에게 명령했다. 2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의료시설과 교통수단, 식량지원에 대한 보장도 받지 못한 채 혼잡한 도시 밖으로 모조리 소개(疏開)되었다. 재앙의 시작이었다. 위 기사 끝머리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소개’는 폭격을 피한다는 명분이었다. 더불어 크메르 루주가 꿈꾸던 이상사회와도 맞닿아 있었다. 크메르 루주 지도자인 폴 포트가 이끈 캄푸치아 공산당은 완전히 ‘새로운 공산주의자’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마오쩌뚱의 문화대혁명이나, 북한의 인간개조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당시 폴 포트가 내세운 대통령 키우 삼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도 정신적 사유재산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혁명세력이 되려면 머릿속을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도시에서 소개시킨 인민들을 지방의 집단농장에서 일하게 하면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를 완벽하게 없애려고 했던 정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기아와 질병으로 죽게 하거나, 처형한 정권. 그들은 최악의 ‘소개팅’(?) 정권이자 극단적인 ‘청소 정권’이 아니었을까.
3. 친중반소와 전세계 진보진영의 분열
캄보디아는 전통적으로 베트남의 숙적이었다. 크메르 루주는 크메르 순혈주의에 기반한 반베트남 인종주의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1975~1979년에 2만여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는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 침공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캄보디아에 쳐들어와 10년간 머문 베트남 정권이 소련의 후원을 받았다면, 크메르 루주의 친구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10년 동안 크메르루주에 10억 달러어치의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중국에게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소련의 권력팽창을 막아줄 유일한 나라였다. 이념 때문이 아니라 현실정치의 이해 때문이었다. 캄보디아-중국의 연대는 미국으로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말, 미국은 크메르 루주를 비난하면서도 그들이 유엔에서 의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외교적 지원을 다했다. 카터 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내가 중국에게 폴포트를 지원하라고 권했다. 폴포트는 정말 혐오스러워 우리가 지원할 수 없었지만, 중국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같은 사회주의권인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분쟁은, 전세계 진보진영의 논쟁을 불렀다. 친베트남공산당과 친캄보디아공산당계로 갈려 설전을 벌였다. 한쪽에선 “미국도 나쁜 놈이지만 크메르루주도 정말 나쁜 놈”이라는 데 반해, 또 다른 한편에선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몹쓸 짓을 했다”고 맞섰다. 여기서 한국사회도 자유롭지 않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관한 일부 전문가들의 글에서 관찰할 수 있다. 베트남 문제에 깊이 천착한 작가들의 글에선 캄보디아인들의 아픔이 대수롭지 않게 묘사된다. 캄보디아 역사를 파고든 작가들은 베트남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마지막으로 중동이다. 중동국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중동 하면 이슬람 국가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이슬람 국가 중엔 동남아에 있는 말레이시아를 여행해봤다. 앞에서 언급한 캔맥주 이야기를 이어가면, 이슬람 신자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선 결코 술을 팔지 않는다. 대신 “밖의 슈퍼마켓에서 사다가 먹으라”고 안내를 해준다. 그들의 친절함과 순박함을 떠올리면 빙그레 웃음이 나올 정도다.
이 기사 옆에는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물씬 풍긴다. 마치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한 뒤에 쓴 글 같다.
엘리야는 ‘기돗발’ 세기로 유명한 구약시대의 위대한 선지자였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합심하여 두손모아 이스라엘의 승리를 간구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지리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 기도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미국의 후원 덕분이었을까. ‘4차 중동전쟁’이라 불리는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다. 1973년10월6일 소련과 외교관계를 지닌 이집트와 시리아가 본래 자신의 땅이었던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공격하자, 이스라엘은 거센 반격을 가했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고 이집트군을 포위했다. 2주 뒤 시리아군이 골란고원에서 물러났다. 아랍국가들은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을 문제삼았다. 그들의 무기는 석유1)였다.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1948년 5월15일 터진 ‘1차’를 시작으로 2차(1955년)와 3차(1967년)를 거쳐 4차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유대는 끈끈해졌다. 여기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운동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등을 통해 조직화되면서 납치와 비행기 하이재킹 등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아버지는 이스라엘 편을 들었지만, 이스라엘의 승리는 한국인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중동국가들은 석유 생산을 줄였고 가격을 올렸다. 세계경제가 휘청거렸다. 당연히 국내 기름값도 뛰었다. 그 유명한 ‘오일쇼크’였다. 1973년10월16일 원유값은 70%나 올랐다. 12월23일엔 다시 128% 인상됐다. 국재 원자재 가격도 함께 뛰었다. 이 파동의 영향으로 1974년 물가는 42.4%나 뛰었다. 거리의 가로등과 상점의 네온사인은 물론 각 가정마다 절전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내 기억에도 아버지를 비롯해 그 세대의 어른들은 불필요한 전등을 찾아 끄는 데 귀신이었다. 기름, 기름, 기름, 기름전쟁이었다.
스크랩에 붙어있는 만평들은 기름에 목을 맨 서민들의 상황을 잘 드러낸다. 박정희 정부도 오죽했으면 이런 외무부 성명을 발표했을까.
언제부터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반이스라엘 친팔레스타인이었단 말인가. 어쩌면 이념이란 생존 앞에서 덧없는지 모른다. 중동의 복잡한 정치구도는 생략한다. 인류의 생존이 달린 석유문제로 좁혀 요점정리를 해본다.
1. 다 그놈의 ‘석유’ 때문이다.
제4차 중동전쟁은 미국에게, 석유가 풍부한 이슬람국가들을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교훈을 주었다. 미국의 석유생산은 1970년에 정점에 도달했다. 친미든 반미든 어마어마한 석유 생산능력을 보유한 아랍국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미국경제가 위험했다. 국제무대에서 지배력을 상실할 수도 있었다. 미국의 전쟁터는 60년대 인도차이나에서 70년대 중동으로 급이동했다. 바야흐로 석유전쟁 시대의 도래였다.
미국의 모든 외교적 선택은 석유와 결부돼 있다. 2001년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도 그랬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을 카불에서 축출하고 허수아비 정권을 세운 이유도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 통제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 이어 석유매장량 3위인 이라크를 침공한 것도, 이란을 ‘깡패국가’로 비난하며 괴롭히는 속내도 결국은 석유다. 친미연합전선을 중심으로 중동질서를 재편해 중앙아시아의 원유 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려는 의도다. 그리하여 이 지역의 석유를 장악하고 OPEC의 정책에도 개입하려는.
2. 그놈의 석유, 이젠 펑펑 안 나온다.
석유는 산업화된 나라에 사는 사람 한 명에게 100명의 노예를 마음대로 계속 부리는 것과 맞먹는 능력을 제공했다는 말이 있다. 앞으로도 인류는 이 편리함을 계속 누리게 될까? 전 세계 석유수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복구와 개발도상국의 공장, 도로 건설, 자동차 이용 과정에서 엄청나게 치솟았다. 1960년 하루 1,900만 배럴에서, 1972년 4,400만 배럴로 올랐다. 석유수요는 공급을 따라잡았다.
석유는 유한한 자원이다. 우리는 그 석유를 펑펑 쓰는 시대에 사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세계 전체의 액체 상태 석유 언장량은 약 2조 배럴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중 상당량이 지난 50년 안에 소비되었다. 한해의 소비량을 270억 배럴 수준으로 본다면, 남은 석유는 세계가 겨우 37년만 쓸 수 있다는 게 미국의 사회비평가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견해다.
환경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은 앞으로 석유가 비싸고 귀한 자원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세기 남짓 석유 노다지의 시대를 산 사우디인들은 현대에 이런 속담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내 아버지는 낙타를 탔고, 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 아들은 제트기를 타고, 아들의 아들은 낙타를 탈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밖에 안타는 승용차이지만, 가끔 주유소에 들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비싸다, 비싸다, 비싸다. 희망은 접는 게 좋겠다. 싸다, 싸다, 싸다, 그런 노래를 부를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3. 그래서 어쩌자고?
자동차를 포기해야 하나, 유류세가 비싼 항공기도 타지 말아야 하나, 한 달에 20만원이 넘게 나오는 아파트 난방을 포기해야 하나, 폴리에틸렌 같은 석유화학 섬유제품은 입지 말아야 하나, 현대식 농업시스템으로 생산된 농산물을 먹지 말아야 하나. 일상에서 쉽게 실천이 가능한 일은 ‘내복입기’ 정도인 듯 하다. 석유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대에서 석유와의 이별은 불가능하다. 아, 구차하게 이러지 않아도 된다. 좋은 방법이 있다. 한반도 근해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석유를 채취하면 된다. 그럴 뻔한 적도 있다.
대한민국 역사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신문만평 안의 군중들 속에서 단군과 세종과 이순신이 웃고 있다. “배달민족이 이렇게 웃기는 처음…”이란다. 4컷만화 속의 밤손님은 불을 켜놓고 밤을 새워 ‘석유’꽃을 피우는 사람들 때문에 도둑질을 할 수가 없다. 기사 밑에 아버지는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는 “불신의 세계에 태어난 미련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산다”라고 썼다. 거짓 보도에 흥분하지 않았다. 눈치를 채셨을까? ‘포항석유’는 뻥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뻥이었다.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간다. 대학생 리포트 같은 베트남전 휴전소감을 작성하던 아버지의 그 진지한 표정을 상상해 본다. 아닌게아니라, 아들인 나의 이 글도 거의 리포트 수준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썼던 글 중에 가장 재미없을 듯싶다. 공부하며 쓴 글이기 때꺹이다. 워낙 방대한 분야였다. 이 복잡한 국제상황들을 한 줄로 정리하면 무엇이 될까. 아버지의 시 속에 그 정답이 있다. 바로 이 구절이다.
◆ 참고한 책
『한국근현대사 산책-1970년대편2』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2)
『미국사 산책10』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10)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지음, 한겨레신문사, 2003)
『폴포트 평전』 (필립 쇼트 지음, 이혜선 옮김, 실천문학사, 2004)
『중동은 불타고 있다』 (유달승 지음, 나무와 숲, 2011)
『장기비상시대』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지음, 이한중 옮김, 갈라파고스, 2011)
『굿 워크』 (E.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느린걸음, 2011)
1) 천연산출되는 것을 원유(原油)라고 하며, 이를 정제한 석유제품에는 휘발유?등유?경유?중유?나프타?LPG 등이 있다. 흔히 가정에서는 등유를 석유라 부르기도 한다. 원유의 주성분은 탄소 84∼87%, 수소 11∼14% 정도이고 이외에도 황?질소?산소 등을 소량 함유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베트남을 열 세 번 갔다. 한두 번을 제외하면 모두 출장이었다. 그 출장이란 것이 죄다 전쟁 때문이었다. 베트남전 말이다. 10여 년 전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을 만들 때 베트남전 캠페인을 담당했다. 그 캠페인이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작전 결과와 관계된 내용이었다. 피해자들의 끔찍한 증언과 원한을 기사화했고, 이와 관련한 신문사의 여러 평화사업에 관여했다. 그래서 나에게 베트남이란 나라는 특별하다.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베트남을 만났다. 마치 호치민의 호젓한 카페골목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맞닥뜨린 기분이다. 스크랩 제9권(1973년1월~1974년12월)을 열자마자 베트남전 휴전협정을 말하는 아버지의 글귀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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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식은 끝났다. 전쟁은 끝났다. 근세 역사상 가장 지리하고 참담했던 전쟁은 끝난 것이다. 바로 조인식이 끝난 것이다. 인류의 최악으로 일컬어지는 월남전은 멀리는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에서 又한 월남정권에 대한 도전에서 그의 기원을 찾을 수가 있다 이 도전세력에는 중공과 소련의 팽창정책이 연결되었고 월남정부에 대해서는 미국이 그 후원국으로 등장하면서 전쟁은 미국과 월맹의 정면대결로 번져갔다 실로 12년의 세월- 이 전쟁은 어느 쪽에도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월맹이나 베트콩은 끝내 사이공 정부를 넘어트리지 못했고 미국이나 월남정부도 공산군을 몰아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이 지리한 세월을 외면한 체 그 막을 내렸으니 전쟁은 무상한 것이리라 명분도 실리도 찾을 수 없는 이전투구의 싸움은 끝났다 그러나 포성이 멎었다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다 오직 ‘미지의 불안 속에서’ 세월은 더 방황할 것이다 ‘민족의 화해’도 아무것도 실속은 없으니- 보이지 않는 전쟁은 더 계속될 것이 뻔하다 전쟁은 끝났다- 다만 조인식이 끝났다는 것이다 전쟁은 미치광이의 놀음- 우리나라 형편을 생각하니- 더욱 불안하구나 |
1973년이면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다. 그해 어느 날의 풍경이 떠오른다. 여느 때처럼 학교를 파한 뒤 책가방을 메고 논둑길을 지나 20여분을 걸어 집까지 돌아왔다. 점심 나절이었다.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며 “엄마”하고 불렀으나 답이 없었다. “아빠”하고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정적이 집안을 감쌌다. 예고 없는 부재가 서먹하고 수상했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농촌마을의 주택이었다. 열 번을 넘게 불러도 반응이 없자, 어린 마음에 무서움이 몰려왔다.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옷장 속에서 엄마와 아빠가 “짠” 하고 나타났다. “놀랐지”하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아버지의 천진스러운 장난이 기억나는 건 딱 그 무렵까지다. 스크랩에 적힌 글은 아버지의 생소한 이면이다. 전쟁의 무상, 민족의 화해…. 마치 대학의 정외과나 사학과 신입생이 ‘1973년 베트남전 휴전에 관하여 논하시오’라는 제목으로 리포트를 쓴 느낌이랄까.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전쟁은 끝났다- 다만 조인식이 끝났다는 것이다.” 무난한 정세판단이지만 말이다.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위 글의 소재가 된 신문기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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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은 끝났다 휴전 오늘 상오 9시 발효 1973년 1월 27일 하오7시(한국시간) 평화협정 역사적조인 파리국제회의센터서【파리27일=정종식특파원】 미국사상 최장의 전쟁이며 동서진영의 신예무기의 실험장이 되어오기도 했던 월남전을 끝맺기 위한 역사적인 월남전휴전협정이 27일 상오 11시6분 (한국시간 하오7시6분) 전쟁당사자인 미?월남?월맹?‘베트콩’의 외상들에 의해 ‘파리’ 개선문이 바라보이는 국제회의‘센터’에서 18분만에 조인을 끝냈다. 월남 땅에는 28일 상오8시(한국시간 상오9시)를 기해 휴전이 발효되어 모든 적대행위가 종식되고 비록 불안하기는 하나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27일 1차조인식에서 ‘윌럼?로저스’ 미국무장관, ‘트란?반?람’ 월남외상, ‘구엔?두이?트린’ 월맹외상, ‘구엔?티?빈’ ‘베트콩’(월남임시혁명정부)외상은 총9장23조로 된 협정문과 “휴전합동군사위” “포로?정치범석방” “국제휴전감시위원단”등 3개의 부대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길고 지리했던 월남전과 4년8개월간의 험난했던 ‘파리’협정의 막을 내렸다. 또한 이날 하오3시45분(한국시간 하오11시45분)에 거행된 2차조인식에는 ‘로저스’ 미국무장관과 ‘트린’ 월맹외상만이 제4의 부대의정서인 “기뢰봉쇄해제에 관한 의정서”에 조인했다. 이날 협정조인시간보다 15분 먼저 도착한 4개 전쟁 당사자 측의 외상들은 아무런 의식절차없이 국제회의 ‘센터’의 1층 회의실에 있는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첫 페이지에는 미국과 월남 두 번째 페이지에는 월맹과 ‘베트콩’이 각각 따로 이중복합서명을 끝냈다. 조인식과 때를 같이하여 월맹측은 미국 측에 미군포로명단을 수교했다. 조인식을 끝낸 4당사자 측 외상들은 ‘샴페인’을 나누면서 서로를 치하했다. 제2차조인식에는 미국과 월맹만이 서명했는데 월맹은 ‘베트콩’의 동의를 얻어, 미국은 월남의 동의를 얻어 각각 서명하는 절차를 택한것이다. (1973년1월28일치 <한국일보>) |
오늘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와 중동을 공부하는 시간이다. 왜 하필 이 세 나라일까. 아버지의 스크랩 9, 10권(1973년1월~1976년10월)에 있는 국제뉴스 중에서 가장 눈에 띄기 때문이다.
1973년은 베트남전이 파리 휴전협정으로 중대한 쉼표를 찍고, 종전 국면으로 치닫던 고비다. 베트남에서 한 발짝 물러난 미국은 그 옆에 있는 캄보디아에서만은 변함없이 ‘전쟁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공산 저항군이던 크메르 루주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 2월부터 B-52기로 고성능 폭탄을 마구 투하했다. 하루 평균 81회 출격하며 6개월간 25만7천톤을 쏟아 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크메르 루주는 독이 오르기 시작했다. ‘킬링필드’를 부르는 ‘킬링필드’였다. 중동에서는 10월6일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둘러싸고 이집트-시리아 2개국과 이스라엘간에 육해공 전면전이 벌어졌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이에 격분한 아랍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 생산량을 1/4로 줄였다. 미국으로의 석유 선박출항도 전면금지했다. 1973년 한 해 동안 기름값이 4배로 뛰었다. 1차 오일쇼크다.
베트남, 캄보디아, 중동 순으로 뉴스를 훑어본다. 각각 세 가지씩 요점정리를 해 본다.
먼저 베트남. 파리에서 열린 위의 베트남전 휴전협정은 1972년에 본격화한 미-소, 미-중 화해무드의 결과물이었다. 파리 휴전협정을 통해 미국은 남아있는 병력을 60일 이내로 철수할 것을 약속했다. 북베트남은 수백 명의 미군 포로를 석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두 배인 700만톤의 포탄을 베트남을 퍼부었지만, 국내외의 반전여론에 부닥친 닉슨 행정부는 이 전쟁을 계속 끌고 갈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의 후원을 얻어 휴전협정을 성사시켜야 했다.
8년간 연인원 32만명(전투병력은 5만명)을 파병한 한국군도 철수했다. 1973년3월21일치 신문은 파월 장병들의 귀국풍경을 사진으로 전한다. 따뜻한 환영 물결이다. 별 세 개 달린 아빠의 볼에 여고생이 뽀뽀하는 사진은 눈에 익다. 설명을 보니 “주월군사령관 이세호 중장의 2녀 이진희양(16?중경고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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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피를 이국에서 뿌리면 죽어간 용사들 |
아버지가 “울렁거린다”고 하니 아들의 속도 울렁거린다.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시 같으니. ‘전쟁은 괴로운 대화’ 맞다. 휴전을 했으나 괴로운 대화는 계속되었다. 남베트남은 안에서 들끓었다. 북베트남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맨 앞에서 나는 10여 년 전의 베트남 북상 경험을 적었다.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휴전 2년 뒤인 1975년3월10일부터 거꾸로 남하를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조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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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越)데모 유혈화 가톨릭교도?경찰 충돌 40명중경상 야당 의원들은 대법원 건물 점거 【사이공31일로이터합동=특약】월남가톨릭교도의 ‘반부패운동’을 중심으로하는 반정부시위자들은 31일 사이공중심가로 행진해 들어가던 도중 이를 저지하던 수백명의 경찰들과 2시간동안의 충돌을 벌여 4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이 충돌에서 가톨릭반부패운동지도자인 트란?후?탄신부와 도?심?투의원도 부상했다고 반부패운동 대변인이 이날 밝혔다. 이날 일찍 약5천명의 가톨릭교도들은 사이공 교외에 있는 한 교회에 운집했으며 트란?후?탄신부는 교회에 모인 2천명의 군중 앞에서 티우 대통령은 사임하고 국민에게 권력을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한편 월남불교도의 ‘민족화해운동’ 의장인 부?반?마우 상원의원이 거느리는 일단의 야당의원들은 철조망바리케이드를 뚫고 대법원건물을 점령했다고 소식통들이 말했다. (1973년11월1일치 <한국일보>) |
다낭 실함(失陷)으로 북반부 상실 월남 최대위기에 -티우 어제 계엄령선포 난민수송중단, 퀴논?나트랑까지 위험 유엔이 휴전주선?구호 호소 【사이공30일로이터UPI=종합】월맹군을 주축으로 한 공산군은 29일 밤 월남 제2의 대도시이자 월남군의 유일한 북부거점 다낭시를 마침내 완전점령 입성하여 중부고지대에 이어 북부 해안지대마저 석권, 월남북반부를 모두 장악함으로써 이제 티우 대통령의 월남정부관할지는 수도 사이공 일원과 메콩삼각주의 일부 지역으로 크게 축소되어 월남정부자체의 존립이 위기에 처했다. 탱크를 앞세운 월맹군과 베트콩은 계속 여세를 몰아 남쪽의 퀴논과 나트랑을 공략하기 시작함으로써 월남정부의 운명을 최악의 위기에 몰아넣었다. 다남실함은 사이공에서 판?쾅?당부수상에 의해 공식 발표됐는데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다낭에 남은 1백50만 피난민과 10만 정부군 소개(疏開)를 위해 유엔이 베트콩과의 임시휴전을 주선해 줄것을 요청했다. 군소식통들은 공산군이 이날 밤늦게 탱크를 앞세워 다낭에 진입, 치열한 시가전 끝에 시를 점령하고 미 영사관건물에 베트콩기를 게양한뒤 24시간 통금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공산군은 이로써 2주간의 전 격작전을 통해 월남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북부지방을 완전장악, 10만 명의 정부군을 퇴각케 했으며 이들은 공세를 늦추지 않고 다낭남쪽 1백92km 퀴논과 2백92km의 나트랑에 압력을 가중, 정부군이 긴급구축한 나트랑북방의 주저항선 마저 붕괴시키기 시작했으며 퀴논항은 이미 실함설이 들리는 가운데...(하략) (1975년4월1일치 <한국일보>) |
다낭을 함락시킨 뒤 호이안으로, 호이안에서 쿠앙응아이로, 쿠앙응아이에서 퀴논으로, 퀴논에서 뚜이호아로, 뚜이호아에서 나짱(나트랑)으로, 나짱에서 호치민(사이공)으로 내려갔다. 그때의 캔맥주 값은 얼마였을까. 한 1,000동(우리돈 100원으로 쳐보자)쯤 했을까? 왠지 내려올 때마다 가격이 더 싸지지 않았을까 싶다. 술 마실 겨를도 없이 도망가는 사람이 많았을 테니.^^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닉슨은 1973년1월 파리 휴전협정 당시 응웬 반 티우 대통령에게 “북베트남이 협정을 위반할 경우 B-52기를 보내 월남군을 지원하겠다”는 친서를 전달한 바 있지만, 그는 1974년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을 당한 뒤였다. 후임 포드 대통령은 남베트남의 SOS요청에 따라 ‘월남긴급군사원조안’을 의회에 요청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미국인이라면 다시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고 싶었을까? 미 의회는 1975년4월19일 이를 부결시켰다.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4월21일 미국에 섭섭함을 전하는 사임성명을 발표한 뒤 금괴를 챙겨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대만과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응웬 카오 키 부통령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들이 떠난 뒤 대통령직을 떠안았던 즈엉 반 민은 1975년4월30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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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정부 무조건 항복 1975년 4월30일 상오11시???30년 전쟁에 종지부 독립군에 베트콩기 월맹군, 민 대통령 연행 【사이공30일=외신종합】월남정부는 30일 공산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곧 이어 소제(蘇製)탱크를 앞세운 공산군은 점령군으로서 사이공에 입성, 월남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에 청홍색 베트콩기를 게양했다. 이로써 월남정부는 고?딘?디엠전대통령의 공화국 선포이후 20년 만에 멸망했고 인도차이나의 대량학살극도 막을 내렸다. 30일상오11시(한국시간) 두옹?반?민월남대통령은 월남정부의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고 정부군에게 전투를 중지하라고 명령하면서 평화적인 정권인수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베트콩측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5분간에 걸친 짤막한 방송에서 민 대통령은 평화, 민족의 단합, 국민의 생명을 보전하고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베트콩에게도 적대행위를 중지하라고 호소했다. 곧 이어 월남정부군 합참의장대리인 구엔후?칸대장은 방송을 통해 모든 월남군장성들은 민 대통령의 명령을 이행하라고 촉구하면서 월남군에 조용히 그들의 무기를 베트콩에 인계하라고 명령했다. 민 대통령의 항복연설후 2시간 만에 20여대의 소제탱크를 앞세운 공산군들은 사이공에 입성, 독립궁을 점령하고 국기게양대에 청홍색 베트콩기를 게양했다. 이와 함께 사이공국제방속국은 공산군이 독립궁에 진입했다는 짤막한 뉴스를 끝으로 방송을 중단했다. 30여년에 걸친 지리한 전쟁에서 벗어난 수천 명의 사이공 시민들은 앞서 월남정부가 선포한 24시간통금령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쏟아져 나와 녹색유니폼의 점령군을 환영했다. 한편 사이공시내의 모든 경찰서에는 백기가 게양되었고 미국인 철수작전을 막끝 낸 주월미대사관에는 약탈이 자행된 후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미국은 월남정부가 항복하기 불과 2시간 전에 1천여 명의 미국인과 친미 월남인및 제3국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극적인 철수작전을 성공리에 끝냈었다. 한 월남정부관리는 “미국인 철수작전으로 월남군 고위 장성 및 관리들이 함께 국외로 탈출함으로써 사이공은 공산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무원의 상태였기 때문에 항복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1975년5월1일치 <한국일보>) |
박정희 정부는 사이공 함락을 반공체제 강화의 계기로 활용했다. 스크랩엔 1975년5월11일치 <한국일보>의 ‘백40만의 함성…서울시민 안보궐기대회’라는 제목의 기사가 붙어있다. 임택근 MBC 전무(그 유명한 아나운서 임택근, 임재범의 아버지)의 사회로 5월10일 상오10시 여의도 5.16광장에서 열렸다. 문화계 대표로는 시인 조병화가, 종교계 대표로는 조용기 목사 등이 참여했다. 이날 대회에서 허정 대회장(전 내각수반)은 개회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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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국가의 안보를 남에게만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으며 인지(印支, 인도차이나- 필자 주)의 비극은 국론이 되지 못하고 총화단결을 이루지 못한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전략에 말려들어 패망한 것이다…일단 유사시에는 모두 최전선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멸공통일하자…미국정부는 월남의 교훈을 명심, 한국의 방위공약을 보강,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
한국인들에게는 ‘공포’가 학습되었다. 텔레비전에선 바다를 떠도는 보트피플의 영상이 무한 반복되었다. 월남패망의 교훈은 곡해되어 유포됐다. “국민의 신임을 얻어야 정권이 유지된다”가 아니라 “말 안 듣고 까불면 저렇게 된다”였다. 베트남을 세 가지로 요점정리 해본다.
1. ‘떡’
베트남전은 대한민국의 ‘떡’이었다. ‘횡재’였다는 뜻이다. 미국은 1966년3월 브라운 각서를 통해 방위협조는 물론 군사장비 현대화, 차관 제공과 대월남물자 및 용역의 조달 등을 한국 쪽에 약속했다. 연인원 32만명을 파병한 피의 대가로 한국은 해외전투수당과 지원금을 받았고, 각종 현지 공사의 입찰권을 따냈다. 이 결과 베트남전이 종전되던 1975년을 기점으로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추월했다. 물론 진짜 ‘떡’은 박정희가 챙겼다. 대군을 파병하는 충성심을 과시함으로써 3선과 긴급조치 등의 집권연장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그 어떤 견제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2. ‘보호’가 아니라 ‘공격’
미국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대략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선 미국이 남베트남을 ‘보호’했다고 말한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공격’했다.” 본질을 흐리는 언어의 함정에 관한 예리한 지적이다.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도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과연 남베트남을 ‘보호’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패한 기득권세력만을 ‘보호’한 것은 아닐까?
베트남 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남부 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5천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희생당했다. 한국군은 남베트남을 ‘공격’했다.
3. ‘속물주의’
베트남은 전쟁으로 처참히 파괴됐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한국의 GDP(국내총생산)는 20,757달러, 베트남은 1,224달러로 20배 차이다.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 건너와 3D업종에서 일한다.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혼인율도 늘고 있다. 중국 다음으로 많다. 2010년 외국인과의 혼인율을 보면 전체 3만4,200건 중 중국, 베트남인과의 혼인율이 73.2%다. 이중 중국 여성과의 혼인은 감소세이고, 베트남 여성과의 결혼은 증가 추세다. 한국 남성들은 베트남을 얕잡아본다. 흔히들 말한다. “세계 최강국 미국을 이겼다고? 그러면 뭘해. 그래서 지들이 우리보다 잘 살아?” 이 말은 속물주의의 백미다. 베트남은 한국인들의 속물주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제 캄보디아로 넘어간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은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에서도 멀지 않다. 버스를 타고 육로로 6시간이면 갈 수 있다. 베트남은 자주 갔지만, 캄보디아 땅은 밟아보지 못했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을 여행하려는 계획을 잡았다가 포기한 적은 있다. 캄보디아는 한국인들에게 ‘킬링필드’와 ‘앙코르와트’로 기억된다. 전자는 정치상품, 후자는 관광상품이다.
‘킬링필드’는 고약한 기억이다. 아버지의 스크랩에도 고약한 제목으로 붙어있다. 딱 두 페이지에 걸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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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캄보디아 1년…드러난 비밀살육 2단계로 60만학살…다시 숙청선풍 가족단위로 몰살 불도저 생매장도 지난해 4월17일 캄보디아를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이 외부세계와는 철저하게 차단한 채 1년동안 잔혹한 대학살을 자행해온 끔찍한 사실이 최근 피난민들의 입을 통해 잇달아 드러나고 있다. 본사 파리주재 김성우 특파원이 긴급 입수, 공수해온 파리?마치誌 최근호는 일가몰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생지옥 같은 캄보디아를 가까스로 탈출해 나온 피난민들과 극소수의 외교관의 목격담을 그들이 몰래 찍어온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했다. 미국의 권위시사주간지 타임 역시 4월28일자 표제기사로서 공산캄보디아의 참상을 보도했다. 이들 보도에 의하면 공산화 이후 캄보디아 전인구의 약12분의 1에 해당하는 50만내지 60만이 정치적 보복과 질병, 기아로 죽어갔다. 남자31세?여자25세까지 결혼금지 탈출한 피난민들 참상 처음 폭로 캄보디아에는 ‘혁명의 노래나 표어도 없고’ 대중이 따라갈 혁명의 목적과 이념을 설명해주는 재교육기관도 없는 가운데 과거 정권과 사소한 관련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강제이주명령에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차없이 학살하고 있다. 이달초 사아누크공을 밀어내고 국가원수직에 오른 키우?삼판(44)에 의해 주로 진행되어온 캄보디아의 대량 살육으로 지난해 6월에 이어 12월까지 각각 2단계 집단처형을 끝내고 현재는 3단계 숙청 선풍이 휩쓸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피난민들은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의 잔혹한 처형방식에 대해 특히 몸서리를 치고 있는데 그들은 가족단위로 몰살을 하는가 하면 탄환을 아끼기 위해 나무곡괭이로 타살하거나 불도저로 생매장까지 했다. 총검을 앞세운 강제이주로 한때 2백70만에 이른 프놈펜에는 이제 겨우 4만의 인구뿐인 죽음의 공동처럼 변했는데 전문가들은 진정한 승리자라고 할수 있는 크메르?루주 10만 핵심분자들이 대부분 등을 돌리고 있는 일반국민을 장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강제이주를 강행하고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또한 남자는 32세 여자는 25세까지 결혼을 금지시키는 한편 젊은 처녀들을 뽑아 생산품 생산에 부분품처럼 동원되는 노동자 가운데 실적이 좋은 사람과 무턱대고 강제결혼까지 시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1976년4월23일치 <한국일보>) |
일단 사진효과가 출중하다. ‘파리-마치誌’로 출처가 적힌 이 사진은 ‘총알 아까워 곡괭이로’라는 제목을 달았다. 설명을 보자.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크메르 루즈가 곡괭이로 한 농민을 처형하고 있다. 왼쪽 끝에 총을 든 크메르 루즈가 도망가지 못하게 지냅고 있다.”
이 사진은 진짜일까. <한겨레21>에 근무하던 2001년이었다. 베트남-캄보디아 분쟁에 관한 기사를 편집하면서 바로 위 사진을 사용했다가 필자에게 항의를 들었다. 나는 이 사진을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생각했다. 국제분쟁 전문기자였던 그 필자는 “장난이 심한 조작사진”이라고 단정했다. 1976년이면 국경 난민촌에서 유엔의 인도적인 구호품 보급까지 차단하며 크메르 루주 정권을 압박하던 CIA와 MI5(영국 정보기관)이 조작사진을 뿌려댈 시점이라고 했다. 캄보디아 내부에서도 가장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던 시절이라 현장에 들어간 종군기자가 확인된 적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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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4월은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한 지 딱 1년 되는 때였다. 1975년4월17일, 크메르 루주는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로 집권했던 론놀 정권을 뒤엎었다.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점령하기 보름여 전이었다. 아버지의 스크랩에는 프놈펜 점령에 관한 기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위 기사에 따르면, 1년 만에 50만~60만 명이 죽었다. 크메르 루즈는, 1979년1월의 베트남군 침공에 의해 물러나기까지 총 3년7개월간 집권했다. 이 기간의 참상을 보여주는 여러 통계가 있다. 100만 명 이상이 처형과 고문, 굶주림, 강제노동으로 죽었으며 그중 50만 명이 처형당했다는 추정이 있다. 심지어 진 라코처라는 사람은 <이어 제로>(Year Zero>라는 책에서 200만명 이상이 학살당했다는 주장을 폈다. 캄보디아 3대 요점정리로 바로 직행해본다.
1. 너네가 더 죽였어 임마
미국이 더 죽였을까, 크메르 루주가 더 죽였을까.
크메르 루주가 집권했던 1975~1979년 기간의 킬링필드 앞에는 ‘제2기’라는 수식이 붙어 마땅하다. 제1기 킬링필드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1969~1973년의 일이다. 미군은 이 기간에 캄보디아를 지나는 베트콩들의 물자보급로인 호치민루트를 봉쇄한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캄보디아에 5년 동안 투하한 53만9129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폭탄 16만톤의 3배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캄보디아 폭격은 미국 내에서도 비극을 불렀다. 1970년5월4일 폭격을 반대하며 사흘간 거칠게 시위를 하던 오하이오주 켄트대 학생들에게 주방위군이 총격을 가해 4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캄보디아 연구자인 데이비드 챈들러와 마이클 비커레이는 1969~73년간 40만~80만 명의 캄보디아 민간인이 죽었다고 추산한다.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의 추산은 60만 명이다. 데이비드와 마이클은 이러한 미국의 제1기 킬링필드에 이어, 크메르 루주가 자행한 제2기 킬링필드 때 처형당한 인원을 각각 10만 명과 15만~30만 명으로 추산한다. 기아?질병?중노동으로 사망한 이들은 75만 명이다.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사형과 질병, 기아로 사망한 이들을 합해 약 100만 명으로 밝힌다.
크메르 루주에게 죄가 없지는 않다. 다만 미국과 책임을 나눠 가져야 공정하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2007년11월부터 법정 심리가 열리기 시작한 크메르루주 국제전범재판소의 피고석에 미국 쪽 인사(예를 들면 키신저 당시 대통령 안보고문)도 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2. 크메르 루주는 역대 최고의 ‘소개팅 정권’이었다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 루주의 병사들은 집집마다 돌며 “2~3일내로 프놈펜을 떠나라”고 시민들에게 명령했다. 2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의료시설과 교통수단, 식량지원에 대한 보장도 받지 못한 채 혼잡한 도시 밖으로 모조리 소개(疏開)되었다. 재앙의 시작이었다. 위 기사 끝머리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3백만 수도가 강제퇴거로 5만 명 뿐 프놈펜방송은 연일 노동의 영광됨을 선전하고 있다. 투쟁 공격 등의 용어가 가장 빈번히 사용된다. 밭을 갈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고 논을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또한 수확을 위해 공격해야하고 수로를 만들기 위해 공격해야 한다. 캄보디아는 이제 모든 사람이 노동해야하는 거대한 작업장이 되었다. 크메르?루주에 의해 의심받는 도시사람들은 모두 농촌으로 옮겨져, 일종의 “전쟁포로”로 취급되고 있다. 새로운 마을이 도처에 세워지고 있어 이나라의 지도역시 다시 만들어야할 형편이다. 새로 생긴 농촌에서는 10개의 가정이 한단위로 집단생활을 하고있다. 그 속에서는 어린이들도 “메트”(동무)로 불리고 있다. 8세가 되면 소년과 소녀들은 가족들로부터 격리된다. 당으로부터 교육을 받기위해서다. 그러나 그들 역시 노동에 참가해야하기 때문에 교육을 받는 시간은 하루 중 절반뿐이다. 식량배급은 저녁에 이뤄진다. 인구를 새로 융합하고 구 체제의 유물을 모조리 없애기 위해 크메르?루주는 젊은 남녀들을 강제결혼시키기도 한다. 부르좌출신의 처녀 이전의 여학생들은 농부 혹은 크메르?루즈 군인들과 결혼해야만 한다. 피난민들은 프놈펜이 함락된 후 처음으로 현정권에 항거하는 반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아직 이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외부의 지원을 받고 있지는 않은듯 하다.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들은 론?놀정권 당시의 장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
‘소개’는 폭격을 피한다는 명분이었다. 더불어 크메르 루주가 꿈꾸던 이상사회와도 맞닿아 있었다. 크메르 루주 지도자인 폴 포트가 이끈 캄푸치아 공산당은 완전히 ‘새로운 공산주의자’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마오쩌뚱의 문화대혁명이나, 북한의 인간개조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당시 폴 포트가 내세운 대통령 키우 삼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도 정신적 사유재산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혁명세력이 되려면 머릿속을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도시에서 소개시킨 인민들을 지방의 집단농장에서 일하게 하면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를 완벽하게 없애려고 했던 정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기아와 질병으로 죽게 하거나, 처형한 정권. 그들은 최악의 ‘소개팅’(?) 정권이자 극단적인 ‘청소 정권’이 아니었을까.
3. 친중반소와 전세계 진보진영의 분열
캄보디아는 전통적으로 베트남의 숙적이었다. 크메르 루주는 크메르 순혈주의에 기반한 반베트남 인종주의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1975~1979년에 2만여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는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 침공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캄보디아에 쳐들어와 10년간 머문 베트남 정권이 소련의 후원을 받았다면, 크메르 루주의 친구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10년 동안 크메르루주에 10억 달러어치의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중국에게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소련의 권력팽창을 막아줄 유일한 나라였다. 이념 때문이 아니라 현실정치의 이해 때문이었다. 캄보디아-중국의 연대는 미국으로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말, 미국은 크메르 루주를 비난하면서도 그들이 유엔에서 의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외교적 지원을 다했다. 카터 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내가 중국에게 폴포트를 지원하라고 권했다. 폴포트는 정말 혐오스러워 우리가 지원할 수 없었지만, 중국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같은 사회주의권인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분쟁은, 전세계 진보진영의 논쟁을 불렀다. 친베트남공산당과 친캄보디아공산당계로 갈려 설전을 벌였다. 한쪽에선 “미국도 나쁜 놈이지만 크메르루주도 정말 나쁜 놈”이라는 데 반해, 또 다른 한편에선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몹쓸 짓을 했다”고 맞섰다. 여기서 한국사회도 자유롭지 않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관한 일부 전문가들의 글에서 관찰할 수 있다. 베트남 문제에 깊이 천착한 작가들의 글에선 캄보디아인들의 아픔이 대수롭지 않게 묘사된다. 캄보디아 역사를 파고든 작가들은 베트남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마지막으로 중동이다. 중동국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중동 하면 이슬람 국가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이슬람 국가 중엔 동남아에 있는 말레이시아를 여행해봤다. 앞에서 언급한 캔맥주 이야기를 이어가면, 이슬람 신자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선 결코 술을 팔지 않는다. 대신 “밖의 슈퍼마켓에서 사다가 먹으라”고 안내를 해준다. 그들의 친절함과 순박함을 떠올리면 빙그레 웃음이 나올 정도다.
중동전 전면전???공방치열 埃?시리어 선공 이스라엘반격 휴전6년만에 시나이반도?골란고원?수運서 【베이루트7일로이터?AFP?AP?UPI=종합】‘이집트’-‘시리어’와 ‘이스라엘’은 6일 하오1시30분 (한국시간하오8시30분) 육?해?공군을 동원, 전면전쟁에 돌입했다. 지난 1967년의 이른바 ‘6일전쟁’이후 6년만에 재발된 중동전쟁은 전투가 개시된 지 40여 시간이 지난 8일 하오 현재 ‘이스라엘’측과 ‘아랍’측 쌍방이 각각 약 1백대의 전투기와 1백여 대의 ‘탱크’및 수척의 군함을 상실한 가운데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수에즈’운하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다. 전투는 ‘탱크’ 4백대를 앞세운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를 도하, ‘시나이’반도의 ‘이스라엘’ 군 기지로 진격하고 ‘시리어’, ‘모로코’ 연합군이 역시 ‘탱크’ 1천대와 항공기를 투입, ‘이스라엘’ 점령의 ‘골란’고원으로 진출함으로써 시작됐다. 埃, 수운하 넘어 교두보확보 이軍, 부교폭파 제공권장악 모로코지상군?이라크공군기도 지원 양측은 한때 개전의 책임을 서로 전가했으나 ‘모하메드?엘?자야트’ ‘이집트’ 외상이 7일 ‘뉴요크’에서 ‘이집트’쪽의 선제공격을 시인함으로써 이번 전선은 ‘이집트’ ‘시리어’군의 對 ‘이스라엘’ 양면작전으로 열린것임이 확인됐다. 개전초 ‘이집트’군은 ‘수에즈’운하에 11개의 도하용 부교를 가설 , 보병과 기갑부대를 ‘수에즈’ 동안(東岸)에 상륙시킨 뒤 공군기 및 ‘이라크’기의 지원을 얻어 ‘이스라엘’ 군전진요새 수개처를 점령했고 ‘시리어’군도 ‘모로코’군 2천명과 ‘팔레스타인?게릴라’의 3자연합전을펴 ‘골란’ 고원내 수km까지 진격, 유리한 전세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곧 총동원령으로 전투력을 긴급강화하고 공군기로 남북2개전선의 ‘아랍’군 진격을 저지하는 한편 ‘수에즈’운하의 부교 대부분을 폭파, ‘이집트’군을 고립시키는등 67년 ‘6일전쟁’ 당시와 유사한 제공권을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는 ‘리비어’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국들이 ‘시리어’ ‘이집트’를 전력지원할것을 선언한 가운데 ‘골란’고원, ‘시나이’반도, ‘수에즈’운하 휴전선 부근의 3개 전선에서 혈전이 계속되고 있다. 전황은 쌍방이 서로 전과를 과장발표,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하략) (1973년10월9일치 <한국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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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옆에는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물씬 풍긴다. 마치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한 뒤에 쓴 글 같다.
1973. 10. 6 하오 1시30분 중동전쟁(한국시간 하오 8시30분) |
엘리야는 ‘기돗발’ 세기로 유명한 구약시대의 위대한 선지자였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합심하여 두손모아 이스라엘의 승리를 간구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지리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 기도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미국의 후원 덕분이었을까. ‘4차 중동전쟁’이라 불리는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다. 1973년10월6일 소련과 외교관계를 지닌 이집트와 시리아가 본래 자신의 땅이었던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공격하자, 이스라엘은 거센 반격을 가했다.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고 이집트군을 포위했다. 2주 뒤 시리아군이 골란고원에서 물러났다. 아랍국가들은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을 문제삼았다. 그들의 무기는 석유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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욾랍 원유 매달 5% 감산 산유10국석유상, 이 점령지 철수때까지 75년5월엔 생산중단 美 의 대이스라엘 지원중지 요구 【쿠웨이트17일AP=합동】 ‘이집트’ ‘시리어’ ‘사우디아라비아’등 ‘아랍’ 석유수출국기구(OAPEC)의 10개 ‘아랍’산유국들은 17일 ‘이스라엘’이 ‘아랍’점령지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9월부터 매월 5%씩 원유를 감산할 것이며 20개월째가 되는 1975년 5월1일까지는 원유생산을 완전중단키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원유값 사실상 70% 올린셈 ‘쿠웨이트’ ‘이라크’ ’시리어‘ 이집트’ ‘리비어’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아부다비’ ‘카타르’ 및 ‘바레인’의 OAPEC10개국 석유상들은 17일 ‘쿠웨이트’에서 ‘이스라엘’과의 투쟁에서 석유의 정치무기화문제를 협의한 뒤 공동성명을 통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공식발표했다. 그러나 이날 성명은 ‘이스라엘’이 67년 6월의 중동전쟁 중 점령한 모든 ‘아랍’영토에서 철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OAPEC 10개국 석유상들은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스라엘’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수에즈’운하를 봉쇄함으로써 ‘유럽’에 경제적 곤란을 야기시켰고 이번 중동전쟁중 ‘시리어’의 유류저장소를 파괴했다고 비난했다. 산유국 석유상들은 또 “우리의 원유감산조치가 ‘유럽’을 곤경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으나 ‘아랍’의 친구국가들을 괴롭히는데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석유상들은 또 ‘유럽’제국이 미국을 설득, 對 ‘이스라엘’지원을 중지하도록 노력해줄것을 희망한다고 밝히고 이 회의에 참석한 OAPEC10개국은 원유감산결정을 이행하고 ‘아랍’영토를 외국이 점령하는 것을 방지해야할 모든 책임을 지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OAPEC10개국은 9월중 매일 약1천8백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했는데 10월중에는 매일 이보다 5%가 적은 1천7백10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석유전문가들은 이번 ‘아랍’석유수출국기구의 감산조치가 수출의 즉각적인 감축은 아니므로 적어도 수주일이 지나야 세계에 대한 ‘아랍’국들의 원유공급에 감산의 효과가 미칠것이라고 내다보았다. (1973년10월19일치 <한국일보>) |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1948년 5월15일 터진 ‘1차’를 시작으로 2차(1955년)와 3차(1967년)를 거쳐 4차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유대는 끈끈해졌다. 여기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운동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등을 통해 조직화되면서 납치와 비행기 하이재킹 등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아버지는 이스라엘 편을 들었지만, 이스라엘의 승리는 한국인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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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중동국가들은 석유 생산을 줄였고 가격을 올렸다. 세계경제가 휘청거렸다. 당연히 국내 기름값도 뛰었다. 그 유명한 ‘오일쇼크’였다. 1973년10월16일 원유값은 70%나 올랐다. 12월23일엔 다시 128% 인상됐다. 국재 원자재 가격도 함께 뛰었다. 이 파동의 영향으로 1974년 물가는 42.4%나 뛰었다. 거리의 가로등과 상점의 네온사인은 물론 각 가정마다 절전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내 기억에도 아버지를 비롯해 그 세대의 어른들은 불필요한 전등을 찾아 끄는 데 귀신이었다. 기름, 기름, 기름, 기름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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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에 붙어있는 만평들은 기름에 목을 맨 서민들의 상황을 잘 드러낸다. 박정희 정부도 오죽했으면 이런 외무부 성명을 발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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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이 점령지 철수 촉구 외무부대변인 어제 대중동정책 중대 성과 67년 전쟁 이전으로 정부는 15일 중동사태에 관해 “‘이스라엘’은 67년 전쟁시 점령한 영토로부터 철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외무부 대변인이 이날 밝힌 ‘대한민국 정부의 중동지역 평화성취에 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① 국제분쟁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해결돼야 하며 무력에 의한 영토획득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② ‘이스라엘’은 67년 전쟁시 점령한 영토로부터 철수해야 한다. ③ ‘팔레스타인’인의 정당한 주장은 존중돼야 한다. ④ 모든 국가는 그 독립영토 보존과 생존권이 인정되고 보장돼야 한다. (1973년12월16일치 <한국일보>) |
언제부터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반이스라엘 친팔레스타인이었단 말인가. 어쩌면 이념이란 생존 앞에서 덧없는지 모른다. 중동의 복잡한 정치구도는 생략한다. 인류의 생존이 달린 석유문제로 좁혀 요점정리를 해본다.
1. 다 그놈의 ‘석유’ 때문이다.
제4차 중동전쟁은 미국에게, 석유가 풍부한 이슬람국가들을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교훈을 주었다. 미국의 석유생산은 1970년에 정점에 도달했다. 친미든 반미든 어마어마한 석유 생산능력을 보유한 아랍국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미국경제가 위험했다. 국제무대에서 지배력을 상실할 수도 있었다. 미국의 전쟁터는 60년대 인도차이나에서 70년대 중동으로 급이동했다. 바야흐로 석유전쟁 시대의 도래였다.
미국의 모든 외교적 선택은 석유와 결부돼 있다. 2001년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도 그랬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을 카불에서 축출하고 허수아비 정권을 세운 이유도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 통제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 이어 석유매장량 3위인 이라크를 침공한 것도, 이란을 ‘깡패국가’로 비난하며 괴롭히는 속내도 결국은 석유다. 친미연합전선을 중심으로 중동질서를 재편해 중앙아시아의 원유 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려는 의도다. 그리하여 이 지역의 석유를 장악하고 OPEC의 정책에도 개입하려는.
2. 그놈의 석유, 이젠 펑펑 안 나온다.
석유는 산업화된 나라에 사는 사람 한 명에게 100명의 노예를 마음대로 계속 부리는 것과 맞먹는 능력을 제공했다는 말이 있다. 앞으로도 인류는 이 편리함을 계속 누리게 될까? 전 세계 석유수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복구와 개발도상국의 공장, 도로 건설, 자동차 이용 과정에서 엄청나게 치솟았다. 1960년 하루 1,900만 배럴에서, 1972년 4,400만 배럴로 올랐다. 석유수요는 공급을 따라잡았다.
석유는 유한한 자원이다. 우리는 그 석유를 펑펑 쓰는 시대에 사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세계 전체의 액체 상태 석유 언장량은 약 2조 배럴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중 상당량이 지난 50년 안에 소비되었다. 한해의 소비량을 270억 배럴 수준으로 본다면, 남은 석유는 세계가 겨우 37년만 쓸 수 있다는 게 미국의 사회비평가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견해다.
환경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은 앞으로 석유가 비싸고 귀한 자원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세기 남짓 석유 노다지의 시대를 산 사우디인들은 현대에 이런 속담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내 아버지는 낙타를 탔고, 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 아들은 제트기를 타고, 아들의 아들은 낙타를 탈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밖에 안타는 승용차이지만, 가끔 주유소에 들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비싸다, 비싸다, 비싸다. 희망은 접는 게 좋겠다. 싸다, 싸다, 싸다, 그런 노래를 부를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3. 그래서 어쩌자고?
자동차를 포기해야 하나, 유류세가 비싼 항공기도 타지 말아야 하나, 한 달에 20만원이 넘게 나오는 아파트 난방을 포기해야 하나, 폴리에틸렌 같은 석유화학 섬유제품은 입지 말아야 하나, 현대식 농업시스템으로 생산된 농산물을 먹지 말아야 하나. 일상에서 쉽게 실천이 가능한 일은 ‘내복입기’ 정도인 듯 하다. 석유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대에서 석유와의 이별은 불가능하다. 아, 구차하게 이러지 않아도 된다. 좋은 방법이 있다. 한반도 근해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석유를 채취하면 된다. 그럴 뻔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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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석유발견 박대통령 연두회견 박정희대통령은 15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작년 12월초 영일만부근 지하 1천5백m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우리의 기술진에 의해 양질의 석유가 발견되었으며 앞으로 4~5개월후면 매장량과 경제성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이날 상오10시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최규하 국무총리 서리를 비롯 전 국무위원과 이효상 공화당 의장, 백두진 유정회장등 여당간부들이 배석한 가운데...(하략) (1976년1월16일치 <한국일보>) |
대한민국 역사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신문만평 안의 군중들 속에서 단군과 세종과 이순신이 웃고 있다. “배달민족이 이렇게 웃기는 처음…”이란다. 4컷만화 속의 밤손님은 불을 켜놓고 밤을 새워 ‘석유’꽃을 피우는 사람들 때문에 도둑질을 할 수가 없다. 기사 밑에 아버지는 이렇게 적었다.
1976년의 새 아침이 밝았다 |
아버지는 “불신의 세계에 태어난 미련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산다”라고 썼다. 거짓 보도에 흥분하지 않았다. 눈치를 채셨을까? ‘포항석유’는 뻥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뻥이었다.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간다. 대학생 리포트 같은 베트남전 휴전소감을 작성하던 아버지의 그 진지한 표정을 상상해 본다. 아닌게아니라, 아들인 나의 이 글도 거의 리포트 수준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썼던 글 중에 가장 재미없을 듯싶다. 공부하며 쓴 글이기 때꺹이다. 워낙 방대한 분야였다. 이 복잡한 국제상황들을 한 줄로 정리하면 무엇이 될까. 아버지의 시 속에 그 정답이 있다. 바로 이 구절이다.
“역사는 조용히 용솟음치고 |
◆ 참고한 책
『한국근현대사 산책-1970년대편2』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02)
『미국사 산책10』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10)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지음, 한겨레신문사, 2003)
『폴포트 평전』 (필립 쇼트 지음, 이혜선 옮김, 실천문학사, 2004)
『중동은 불타고 있다』 (유달승 지음, 나무와 숲, 2011)
『장기비상시대』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지음, 이한중 옮김, 갈라파고스, 2011)
『굿 워크』 (E.F 슈마허 지음, 박혜영 옮김, 느린걸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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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연산출되는 것을 원유(原油)라고 하며, 이를 정제한 석유제품에는 휘발유?등유?경유?중유?나프타?LPG 등이 있다. 흔히 가정에서는 등유를 석유라 부르기도 한다. 원유의 주성분은 탄소 84∼87%, 수소 11∼14% 정도이고 이외에도 황?질소?산소 등을 소량 함유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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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호
2012.05.31
천사
2012.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