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으로 읽는 플라스틱 연대기』
배진영, 라병호 저 | 자유아카데미
구한말, 서울에도 극장이 생겨서 연극이나 음악 공연을 하는 곳들이 하나 둘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곳 중에는 이제 막 시작된 영화 산업을 발 빠르게 따라 가는 곳도 있었다. 영사기를 가져다 놓고 짤막한 필름을 상영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때부터 대중 매체를 이용한 영상 산업이 한국에서도 시작된 셈이다. 그러니 그럭저럭 한국에서 극장이 생기고 관객을 받기 시작한 지도 백 수 십 년에 달하는 역사를 갖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20세기 초 아주 초창기의 극장 풍경을 다룬 글이나 자료를 가만 보다 보면 무척 독특한 풍경 한 가지를 볼 수 있다. 바로 극장 입구의 사람이 드나드는 곳에 꽤 많은 물을 준비해 놓은 곳이 많았다는 것이다. 주로 우물을 설치해 두는 식으로 물을 준비해 두었던 것 같다.
요즘 극장에서 팝콘과 음료를 파는 것처럼 물을 팔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옛 시대의 극장 입구에 준비해 놓은 물은 팔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마실 물로 쓸 수 있을 만큼 깨끗한 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극장 입구에 물을 가져다 놓은 것일까? 나는 이 기록을 찾아 읽어 보지 않은 현대인은 그 누구도 20세기 초 서울 거리의 극장 입구에 있는 물의 용도를 추측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문화라고만 말하면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시대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배경이 되는 물질 문명의 수준은 지금과 전혀 다른 시대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서울 거리 극장 입구에 많은 물을 준비해 놓은 이유는 당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신발 없이 맨발로 다니며 작업하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대 사람들이라고 해서 신발 한 켤레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모두가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하면서 별로 편하지도 않고 쉽게 닳아 빠지는 짚신을 신기는 싫고 그렇다고 비싼 가죽신이나 구두를 작업용으로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신발을 신지 못한 채 일을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아마 좀 더 많은 숫자가 아예 신발을 신지 못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는 대중을 위한 예술이기에 이렇게 일을 하던 사람들이 저녁에 극장에 들어와야 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흙먼지가 묻은 발로 극장 마루나 의자를 디딜 수가 있기에 아예 극장 입구에 발을 씻는 곳을 마련해 둔 것이다.
한국인들이 튼튼하고 오래 가는 신발을 누구나 쉽게 신을 수 있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고무신이 대중화되면서 부터라고 봐야 한다. 한국의 고무신은 한국의 과학기술인들이 직접 설계하고 발명해 대량 제조한 최초의 근대적인 공업 생산품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다. 이병두 사장을 비롯한 1920년 전후의 몇몇 발명가들은 일본인들이 유통하던 고무신을 보고 한국인의 취향에 맞게 넓적한 짚신을 닮은 검정 고무신을 설계해서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제품이 실제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하면서 소비자 제품의 대량 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고무 가공 기술은 보다 다양한 소재를 복합적으로 활용하는 더욱 발전된 신발 산업으로 커 나갔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합성 고무와 여러 가지 인조 가죽 재료, 폴리우레탄수지, 나일론 계통의 각종 합성 섬유까지 여러 가지 새로 개발된 재료들이 신발 산업을 이끌었다. 세월이 흘러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면, 부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신발 공장에서 생산된 신발들이 한국의 대표 수출 상품이 되기도 했다. 부산시민공원 근처에 있는 황금신발 거리에 황금빛이 나는 신발 조형물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는 것도 그 시대의 영광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는 이 신발의 주재료는 넓게 보면 대개 플라스틱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스틱은 합성 고분자로 분류되는 재료를 통틀어 일컬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모양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재료라는 의미로 플라스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그 다양한 플라스틱 중에서도 실 같은 모양으로 뽑아 낼 수 있는 종류는 나일론과 같은 합성 섬유, 즉 옷감이 되고, 질감을 가죽에 가깝게 가공할 수 있는 재료는 PVC 합성 피혁과 같은 인조 가죽이 되었다. 말랑말랑하고 탄성이 강하게 가공한 플라스틱 제품은 곧 합성 고무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 다양한 플라스틱들을 값싸게 많이 만들어 낼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품질이 좋고 오래 가는 신발을 싼 값에 많이 만들어 낼 수가 있게 되었다. 만약 지금도 가죽신이나 나막신을 만들어 신어야만 하는 시대였다면 결코 일할 때 신기 편한 값싼 신발을 지금처럼 쉽게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개발도상국, 저소득국가에서 지금 사람들이 맨발로 다니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결국 플라스틱 재료를 쉽게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플라스틱은 싼 값에 좋은 성질을 지닌 재료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기에 유리해서 수많은 공업 제품 생산에 대단히 큰 도움이 되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당구공이 대량 생산되기 전에 사람들은 코끼리를 잡아 그 상아를 깎아 당구공을 만들곤 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안경테가 대량 생산되기 전에 사람들은 ‘대모’라고 부르던 바다거북 등껍질을 가공해 안경테를 만들곤 했다. 인조 가죽이 나오기 전에는 소, 양, 심지어 캥거루 같은 동물의 가죽을 벗겨 가방이나 의자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플라스틱의 등장 덕분으로 코끼리, 바다거북, 소, 양, 캥거루의 희생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생태계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널리 퍼져 있는 상식 같은 이야기다.
게다가 좋은 플라스틱 재료 덕분에 누구나 싼 값에 신발을 신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듯이 우리는 좋은 플라스틱 재료 덕분에 누구나 값 싼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일론은 비단 보다 훨씬 더 저렴하면서도 더 가공하기 편리하고 양털이나 알파카 털로 털옷을 만드는 것 보다는 아크릴 계통의 합성 섬유를 이용하는 쪽이 더 싸고 쉽게 옷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적어도 구한 말 같은 옛 시대에 비해서 전 세계의 누구라도 헐벗음을 쉽게 피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플라스틱의 개발과 활용 덕분이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는 “플라스틱이 환경에 문제다”라는 이야기를 굉장히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정확히 무슨 플라스틱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흔히 “플라스틱은 썩지 않아서 문제다”라는 이야기를 무척 많이 한다. 그렇지만 물질이 썩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반대로 보면 오래 가고 수명이 길며 오염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썩지 않는 물질로 만든 제품은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고 위생적인 제품이라는 뜻도 된다. 즉, 썩지 않는 제품은 더 믿을 수 있는 제품이고 물자를 절약할 수 있는 제품이다. 아닌 게 아니라 대부분의 대형 쓰레기 매립지에는 쓰레기를 묻기 전에 맨 밑바닥에 튼튼하게 플라스틱 막을 깔아서 썩은 쓰레기에서 나오는 오염 물질이 땅 밑으로 스며들거나 주변으로 퍼지지 못하도록 막기도 한다. 그래야 그 플라스틱이 오래 동안 썩지 않고 튼튼히 오염 물질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지금도 플라스틱을 이용해서 환경을 보호하고 있다.
따져 보면 볼 수록 플라스틱과 환경 오염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렇기에 나는 플라스틱이 애초에 어떻게 개발된 소재이고 어떻게 생산되고 있는 물질인지를 아는 것이 환경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이끌어 내는 데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한국은 화학 산업이 발달한 나라로 대단히 많은 양의 플라스틱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나라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으로 흔히 반도체와 자동차를 꼽곤 하는데 바로 그 다음으로 자주 지목하는 품목은 석유 화학 산업의 생산품이고 그 석유 화학 산업 생산품 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플라스틱이다. 이렇게 보면 플라스틱은 한국의 산업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물질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한국인이라면 조금 더 플라스틱에 대해 깊이 알고 있어도 좋지 않을까? 이탈리아인들이 파스타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여기고, 프랑스인들이 포도주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고들 생각하듯이, 한국인이라면 대체로 플라스틱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화학으로 읽는 플라스틱 연대기』는 바로 이런 지식의 부족을 채워 줄 수 있는 책이다. 교과서와 같은 느낌으로 간결히 핵심만 짚는 부분이 많은 책이기에 약간은 어렵고 딱딱하게 여길 수도 있을 만한 내용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정말로 플라스틱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차근차근 플라스틱이 개발된 역사를 따라 가며 주요 플라스틱 재료를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많은 것을 배워 볼 수 있는 책이다. 플라스틱의 어떤 점이 환경 문제의 원인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지, 그 대책으로는 무엇이 제안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두루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도 보통 교과서에는 잘 나오지 않는 한국의 어느 회사가 어떤 플라스틱을 만들고 있는가 하는 현실 경제의 이야기 거리들도 곳곳에 설명하고 있어서 보다 가깝게 플라스틱 산업을 느끼게 해 준다.
현대는, 말하자면, 누구나 신발을 신고 다니는 시대다. 그리고 플라스틱은 바로 그런 현대를 이끌어 준 물질이다. 플라스틱의 출현과 활용 덕분에 인류의 문명은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느끼고 있는 바로 이 질감으로 변화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플라스틱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나 양자 이론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현대에 큰 영향을 끼친 거대한 대상에 대해 아는 일이다. 그런 만큼 어려움을 감수하고 라도 이해하는 데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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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으로 읽는 플라스틱 연대기
출판사 | 자유아카데미

곽재식(작가)
작가이자 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 KAIST에서 원자력 및 양자 공학 학사 학위와 화학 석사 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각종 대중매체에서 과학 지식으로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패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