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고양이, 한 번만 더 만나고 싶다
겨울에는 철거하지 않는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고 카메라를 들고 왕십리에 다시 가보니, 죄다 거짓말. 들불호프고 형제슈퍼고 왕십리 1동 사무소고 새마을금고고 뭐고 죄다 거대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2012.01.27
겨울에는 철거하지 않는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고 카메라를 들고 왕십리에 다시 가보니, 죄다 거짓말. 들불호프고 형제슈퍼고 왕십리 1동 사무소고 새마을금고고 뭐고 죄다 거대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너머로 롯데캐슬만 위풍당당했다. 거기 살 무렵에는 나무문이 달린 예쁜 한옥집들을 담 너머로 넘겨다보며 어떻게 그 안이 생겼나 매일매일 궁금했는데, 담이 모조리 무너져서 그 안을 볼 수 있었다. 울고 불고 마시고 토하던 길은 죄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목이 퉁퉁 부어올라 몹시 앓았고 꿈을 꾸었다. 옛 애인이 꿈에 나왔다. 살아야겠다는 생기만 시퍼렇게 기세등등하던 왕십리 시절,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한 나의 고양이 애인이었다. 고양이 같은 성정인 사람들은 죄다 고양이를 싫어한다는 속설에 요만큼도 변명할 수 없을 만큼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벌꿀색의 커다랗고 뚱뚱한 나의 마르코는 달랐다.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고양이가 바로 그 고양이듯이 나에게는 그 고양이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고양이였다.
크로캅(당시 좋아했던 이종격투기 선수 미르코 크로캅)의 이름을 잠시 착각하는 바람에 마르코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고양이는 과연 붙인 이름답게 덩치 크고 넉살 좋고 유들유들하고 풍채 좋은 길고양이였다. 길에서 마주치면 사뿐사뿐 걸어와 야아옹 하고 인사하고, 밥 먹었어? 요즘 잘 지내? 하고 물으면 니야아옹 하고 대답하고,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갈까? 하면 또 냐아옹 하고 대답하고, 발에 슬슬 털을 부비던 멋진 수고양이였다.
나는 마르코를 안고 집으로 데려갔고, 그러면 마르코는 태평스럽게 목을 울리며 함께 갔고, 씻겨준 다음 고양이 먹이를 대접하면 여유롭게 먹고 집안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늘어지게 잤다. 그러고 서너 시간이 지나면 깨서는 집안을 여유롭게 거닐며 야옹야옹 창문을 열어달라고 재촉했고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집 고양이가 되어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한사코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던 마르코는 이사 가기 며칠 전 만났을 때 보니 눈에 띄게 마르고 얼굴 한쪽에 큰 상처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묻는데 야아옹 하는 소리는 여전히 유들유들했다. 집에 가지 말고 우리랑 살자, 하고 애걸복걸해도 마르코는 평소보다 훨씬 오래 잔 다음 창문을 열어달라고 느긋하게 재촉했다. 나는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게 사람들이 매혹되는 고양이의 자존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폐허가 된 왕십리에 다녀온 그날 밤, 꿈에 나온 마르코는 마르지도 않고 통통한 몸집에, 벌꿀색 털에는 윤기가 잘잘 흐르고 있었고, 상처라곤 하나도 없이 포동포동했다. 나는 그때보다 여섯 살 더 먹었는데 마르코는 여섯 살 더 어려진 것처럼 싱싱한 채로 야옹 하고 울면서 다리에 몸을 비볐다.
― 마르코, 마르코, 잘 있었어? 어떻게, 살아 있었네?
― 야아옹.
대답하는 마르코를 번쩍 안아올리며 나는 미니슈퍼로 뛰어 들어갔다. 전날 봤을 때 시뻘건 스프레이 칠이 되어 있고 안이 다 무너져 있던 미니슈퍼는 꿈에서는 멀쩡하게 영업 중이었고, 나는 허겁지겁 아줌마한테서 어육 소시지를 사서는 껍질을 벗겨 마르코에게 주고 주고 또 주었다. 마르코는 어육 소시지를 한가롭게 먹고 먹고 또 먹었고, 나는 끝없이 어육 소시지를 사고 사고 또 샀다. 나의 야옹이, 소시지를 카드로 긁어서라도 좋아하는 걸 한 번만 더 먹여주고 싶은 나의 마르코. 그래도 꿈에서 본 마르코가 젊고 싱싱하고 튼튼해서 좋았다. 마르코야, 아마 너는 지금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을 거야, 그렇지? 나중에 또 만나게 되면, 소시지든 생선이든 얼마든지 주고 싶어.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어. 나중에 다시 만나,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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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목이 퉁퉁 부어올라 몹시 앓았고 꿈을 꾸었다. 옛 애인이 꿈에 나왔다. 살아야겠다는 생기만 시퍼렇게 기세등등하던 왕십리 시절,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한 나의 고양이 애인이었다. 고양이 같은 성정인 사람들은 죄다 고양이를 싫어한다는 속설에 요만큼도 변명할 수 없을 만큼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벌꿀색의 커다랗고 뚱뚱한 나의 마르코는 달랐다.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고양이가 바로 그 고양이듯이 나에게는 그 고양이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고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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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캅(당시 좋아했던 이종격투기 선수 미르코 크로캅)의 이름을 잠시 착각하는 바람에 마르코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고양이는 과연 붙인 이름답게 덩치 크고 넉살 좋고 유들유들하고 풍채 좋은 길고양이였다. 길에서 마주치면 사뿐사뿐 걸어와 야아옹 하고 인사하고, 밥 먹었어? 요즘 잘 지내? 하고 물으면 니야아옹 하고 대답하고,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갈까? 하면 또 냐아옹 하고 대답하고, 발에 슬슬 털을 부비던 멋진 수고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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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르코를 안고 집으로 데려갔고, 그러면 마르코는 태평스럽게 목을 울리며 함께 갔고, 씻겨준 다음 고양이 먹이를 대접하면 여유롭게 먹고 집안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늘어지게 잤다. 그러고 서너 시간이 지나면 깨서는 집안을 여유롭게 거닐며 야옹야옹 창문을 열어달라고 재촉했고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집 고양이가 되어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한사코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던 마르코는 이사 가기 며칠 전 만났을 때 보니 눈에 띄게 마르고 얼굴 한쪽에 큰 상처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묻는데 야아옹 하는 소리는 여전히 유들유들했다. 집에 가지 말고 우리랑 살자, 하고 애걸복걸해도 마르코는 평소보다 훨씬 오래 잔 다음 창문을 열어달라고 느긋하게 재촉했다. 나는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게 사람들이 매혹되는 고양이의 자존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폐허가 된 왕십리에 다녀온 그날 밤, 꿈에 나온 마르코는 마르지도 않고 통통한 몸집에, 벌꿀색 털에는 윤기가 잘잘 흐르고 있었고, 상처라곤 하나도 없이 포동포동했다. 나는 그때보다 여섯 살 더 먹었는데 마르코는 여섯 살 더 어려진 것처럼 싱싱한 채로 야옹 하고 울면서 다리에 몸을 비볐다.
― 마르코, 마르코, 잘 있었어? 어떻게, 살아 있었네?
― 야아옹.
대답하는 마르코를 번쩍 안아올리며 나는 미니슈퍼로 뛰어 들어갔다. 전날 봤을 때 시뻘건 스프레이 칠이 되어 있고 안이 다 무너져 있던 미니슈퍼는 꿈에서는 멀쩡하게 영업 중이었고, 나는 허겁지겁 아줌마한테서 어육 소시지를 사서는 껍질을 벗겨 마르코에게 주고 주고 또 주었다. 마르코는 어육 소시지를 한가롭게 먹고 먹고 또 먹었고, 나는 끝없이 어육 소시지를 사고 사고 또 샀다. 나의 야옹이, 소시지를 카드로 긁어서라도 좋아하는 걸 한 번만 더 먹여주고 싶은 나의 마르코. 그래도 꿈에서 본 마르코가 젊고 싱싱하고 튼튼해서 좋았다. 마르코야, 아마 너는 지금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을 거야, 그렇지? 나중에 또 만나게 되면, 소시지든 생선이든 얼마든지 주고 싶어.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어. 나중에 다시 만나,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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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다산책방
필자
김현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스스로를 도시빈민이라 부르는 그녀는 대구 출생에 목회자인 부친의 모든 희망에 어긋나게 성장하였고 기어코 말 안 듣다가 고등학교를 두 달 만에 퇴학에 준하는 자퇴를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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