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실린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허구? -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
‘선진 일류 국가’를 주야장천 부르짖는 통치자가 있다. 부국강병도 그의 수사다. 그 통치자에 들러붙은 기득권은 ‘그 밥에 그 나물’ 레시피만 거듭 내놓는다.
201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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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만 부유한 나라보다 다수 백성이 부유한 나라가 강국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수 백성을 잘살게 하자는 민생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정치가의 단골 메뉴지만 많은 경우 현안 회피용에 불과했다. 어떤 정치 세력이 진정 국가를 생각하고 민생을 걱정하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민생을 위한 법제화에 찬성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2권, p.103)
‘선진 일류 국가’를 주야장천 부르짖는 통치자가 있다. 부국강병도 그의 수사다. 그 통치자에 들러붙은 기득권은 ‘그 밥에 그 나물’ 레시피만 거듭 내놓는다. 말끝마다 서민을 거론하며 민생을 챙기는 척 행보를 하지만, 그 행보에 붙은 껌 딱지를 많은 이들은 알아챈다. 지금 그 나라는 지배층만 부유한 나라다. 그 나라에서 어떤 정치 세력이 진정 국가를 생각하고 민생을 걱정하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종이는 의무(무상)급식이 아닐까. 그 기득권들은 법제화에 찬성하지 않는다.
앞선 인용은 조선을 말한 경우인데, 지금 그 나라라고 다르진 않다. 역사는 면면히 흐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기득권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개혁입법이 만들어지고, 활기를 띠는 경우가 있어도, 이내 고꾸라지고 말았다. 기득권의 저항 때문이다. 『조선 왕을 말하다』(이덕일 지음|역사의아침 펴냄)은 종종 그것을 말한다.
지난 8일 서울 정독도서관, 『조선 왕을 말하다』의 저자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독자와 만났다. 이날의 주제는 ‘누가 왜, 그들의 승패를 뒤집었는가?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조선 왕들의 역사’. 이른바 사대부들의 ‘붕당 정치’에 의해 휘둘렸던 조선(의 왕들)과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
이덕일 소장은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사림의 분열부터 인조반정과 소현세자의 독설로 야기된 조선 후기 비극의 뿌리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서인에서 갈라진 분파인 노론의 장기집권과 그에 따른 부작용 등을 현재까지 대입시켜 흥미를 자아냈다.
이날, 정독도서관 강의실을 가득채운 열기는, 그것이 조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말하고, 미래를 조망했기 때문이었다.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에서 교과서를 벗어났고,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냈다. 이날 강의에서 언급된 역사 모두가 ‘사실’이라고 장담할 순 없지만, 역사에서 현재를 찾아야 할 이유는 명백하게 보여줬다.
사대부의 허위의식, 언행 불일치
왕조 국가의 기본 의리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이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란 뜻이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은 당론의 시각으로 광해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고 광해군은 그 신하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불충한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이 충성이란 해괴한 논리가 쿠데타 명분으로 성립되었다. (1권, p.181)
인조반정이 그랬다. 유학자들이, 즉 신하들이 광해군을 내쫓았다. 왕조국가에서 역적질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역적질을 할 때도 명분은 있어야 하는 법. “우리 임금은 명나라 황태자고, 조선의 임금은 제후에 지나지 않는다. 제후는 사대부와 같이 신하들이다. 제후(신하)에 지나지 않는 광해군이 명?청이 싸울 때, 청나라 편을 들었다. 명에 대한 불충을 저지른 왕을 내쫓는 것은 올바르다. 이런 주장이었다. 못 들어봤지? 자기들한테 불리한 얘기는 안 하지.”
인조반정은 특정 당파가 당론으로 국왕을 갈아 치울 수 있는 상태까지 왔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왕조 정치의 파탄이었다. (1권, p.186)
이 소장은 사대부의 허위의식을 꼬집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특히 서인의 ‘말로만 북벌론’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말로는 북벌을 주창했으나, 실제로는 어떤 행동에도 나서지 않고 되레 하지 말자는 쪽이었다. 그들의 명분은 ‘민생이 더 중요하다’였고, 북벌을 고려했던 효종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았다는 것.
“효종이 말년에 송시열과 독대하면서 이야기한다. 내가 경에게 다 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대신 북벌하자. 당시 송시열이 북벌의 발목 잡았다. 그런데 지금은 송시열이 북벌론자로 뜨고 있지. 잘못된 거다. 송시열을 좋게 쓰려면 북벌보다 민생에 힘썼다고 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쓰긴 어렵다.”
효종은 재위 10년 3월 11일 송시열과 담판을 지었다. 이른바 기대독대己亥獨對다.… 이날의 독대는 송시열에게 ‘더 큰 권력’을 약속했지만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2권, p.45, 48)
인조반정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었다. 국왕도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 중의 제1사대부에 불과할 뿐 초월적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국왕이 아닌 사대부가 나라의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효종은 북벌을 가능한 목표로 여겼으나 사대부는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사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였다. (2권, p.42)
개혁입법에 사는 나라, 사대부에 죽는 나라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신뢰를 받는 방법은 간간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이다. 로마의 파비우스 가문처럼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모두 목숨을 바치는 가문을 어찌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자기희생은커녕 군역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았다. 지배층이 군대에 가지 않는 나라의 피지배층이 전쟁 때 종군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1권, p.161)
이 소장은 이것을 대한민국의 현주소라고 꼬집었다. 그 당시, 사대부들은 군역의 의무가 없다. 1년에 군포 두 필을 내는 군역의 의무. 종중 때, 사대부들은 군포를 내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법제화 됐다. 합법적인 면제. “현재 고위공직자들 중에 군대 안 간 사람이 많은데, 다 여기서 비롯됐다. 병역 의무를 상놈의 것으로 생각하는 거지. 조선 후기에 사대부도 병역 의무를 수행하자고 하면, 어찌 상놈과 같이 군포를 내느냐 그랬던 거다.”
중종 때 군적수포제가 실시되면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고 일반 백성들만 납부의 의무를 지게 된 것이 주요인이었다. 지배층의 군역이 면제된 판국에 피지배층이 목숨 걸고 체제를 위해 싸울 이유가 없었다. (1권, p.163)
사대부들의 지질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라의 위상을 일으킨 것이 개혁입법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도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난리가 일어나자, 백성들은 노비를 관할하는 부서인 장예원을 불태우는 등 격하게 반응했다. 선조는 당시 조선이 끝났다고 봤단다. 실록에는 선조가 우리 백성이 적병에 가담했다는데 사실이냐고 묻는다. 백성들이 실제로 그렇게 한 기록이 있다고 이 소장은 전한다.
이 와중에 류성룡의 재기가 빛났다. ‘면천법(免賤法)’이라는 개혁입법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천민을 면하게 하는 법이었다. 일본군 머리 하나를 베면, 천민에서 양인으로, 세 개를 베면 벼슬을 줬다. 일본군에 붙었던 노비들, 이 나라 망하길 바랐던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고, 의병에 가담했다. 임진왜란의 전세는 그렇게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런 전세의 역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의병들이었다. 의병 기의起義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일부 사람의 솔선수범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정 겸 도제사찰사 류성룡이 주도한 개혁입법이었다. (1권, p.169)
하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전쟁이 끝나고 류성룡이 제거되자, 조선은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십만양병설을 만들어서 퍼트렸는데, 전혀 있지 않았던 얘기다. 십만양병을 하려면, 당시 정규군이 8천인데, 국방비를 열배 증액해야 하는 거지. 율곡은 변방에 3년간 자원 근무를 하면 노비는 양인으로 신분상승을 시켜주고, 서얼은 과거 응시할 자격을 주자면서 신분제 틀을 흔들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돈 안들이고 신분상승하고 싶은 노예나 서얼이 자원복무할 거 아니냐. 그러나 이것 다 조정에서 부결됐다. 율곡은 1만 양병도 얘기한 적이 없다.”
그는, 율곡이 임란이 발발하기 10년 전, 십만양병을 주장했다가 임금은 물론 류성룡의 반대에 부딪혀 안 됐다는 ‘십만양병설’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임란 극복의 두 영웅을 꼽자면, 무장에선 이순신, 문신 중에는 류성룡이다. 헌데, 류성룡의 자리를 율곡으로 대체하고 조작한 것이 십만양병설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십만양병설은, 실은 없는 이야기다. 임란 극복은 류성룡의 개혁정책 덕분인데, 십만양병을 반대한 죽일 놈으로 가르치고 있다.”
류성룡은 조세제도도 혁명적으로 개혁했다. 류성룡이 주장하는 혁명적 세제개혁안이 훗날 대동법이라고 부르는 작미법作米法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거꾸로 많이 납부하고 부유한 사람이 적게 납부하던 공납의 폐단을 조세정의에 맞게 개혁하자는 법안이었다.… 류성룡은 이런 개혁 입법들이 실시되지 못하면 조선은 회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과연 면천법으로 노비들을 의병으로 끌어들이고, 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조선은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1권, p.172~173)
예송논쟁, 당파싸움의 격전장
유능한 지배층과 무능한 지배층을 가르는 기준 중의 하나가 현실인식 문제이다. 유능한 지배층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지만 무능한 지배층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그렇게 머릿속의 바람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동안 나라는 깊숙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1권, p.154)
사대부들의 기득권 사수로 개혁입법은 생명이 짧았고, 조선은 다시 사대부의 나라로 돌아갔다. 효종이 죽고 예송논쟁이 발생한다.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벌어진 사대부들의 당파 싸움질이었다. “서인과 남인이 예송논쟁에서 입장이 갈라진다. 서인은 무조건 왕실에게 박하게 했다. 남인은 3년복을 주장했고, 서인은 1년복을 주장한다. 서인은 결과적으로 왕권을 무시한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에 의한 절대적 존재에서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의 권력 강화냐, 사대부의 권력 균점이냐 하는 문제였다. 그런 양자의 시각이 충돌한 것이 1차 예송 논쟁이다. (2권, p.49)
1차 예송논쟁(1659) 후 15년이 지나 2차 예송논쟁(1674)도 있었다. 효종의 부인인 왕대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기년복(1년)과 대공복(9개월)이 붙었다. 남인은 1년복을 주창했고, 서인은 9개월복이었다.
“서인이 볼 때, 조선의 임금은 왕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신하니까, 사대부의 예법을 적용해야 한다. 남인 입장은, 왕가의 예법은 사대부의 예법과 다르다는 거였고. 어떤 게 맞는 거 같나. 왕조 국가에서 국왕이 떠났는데, 사대부와 예법이 같다? 말이 안 되는 거지. 송시열이 1차 예송논쟁에서 1년복을 주장했는데, 장례법에 대한 책부터 다시 봐야 하는 사람이다. 일반 평민의 것을 들이대다니. 예송논쟁, 복잡한 것 같지만, 핵심은 인조반정의 논리, 즉 우리의 진정한 군주는 명 황제고, 조선 임금은 신하에 지나지 않는다와 맥락이 닿는다.”
이렇게 예송논쟁이 벌어진 현종시대. 왕위에 오를 때, 십대 후반이었던 현종은 1차 예송논쟁에선 서인의 주장대로 1년복으로 갔다. 하지만, 2차 때는 확실히 견해가 정립되면서 정권을 갈아치웠다.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꿨고, 서인을 향해 ‘경들은 선왕(효종)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데… 임금에게 이렇게 박하게 하면서 어느 곳에 후하게 하려는 것인가’라고 화를 냈다. ‘어느 곳’은 송시열이었다.
서인에게 효종은 둘째 아들이었고, 인선왕후도 중자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이 송시열의 뜻이자 당론이었으므로 김수흥은 “지금 예조가 대공복으로 의정해 올린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거듭 답했다.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서인이 계속 대공복을 고집하자 드디어 현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2권, p.88)
그러나 정권을 갈아치우는 와중에 현종이 세상을 떠났다. 청나라에서 보기엔 예송논쟁 등이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사신들에게 너의 나라엔 왜 이리 임금이 빨리 죽느냐.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해서, 백성이 고생이 많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기근에 시달리던 현종 12년(1671년) 2월 북경에 다녀온 동지사 복선군 이남은 “청나라 황제가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 없이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는 신하가 강하기(臣强) 때문이라고 한다 돌아가 이 말을 전하라’고 말했다”(『현종실록』12년 2월 20일)고 산해관에서 보고했다.… 청에서 보기에는 국왕이 승하했는데 신하들이 3년복이니 1년복이니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이상 현상이었다. (2권, p.83)
북벌론, 서인들의 아킬레스
군사를 기르는 양병보다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양만養民과 안민安民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로 사실상 북벌을 반대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었다. 이때 표면적으로 가장 강하게 북벌을 주창한 세력이 숭명崇明 의리를 당론으로 삼은 산림, 즉 산당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효종의 군비 증강 계획에는 안민을 내세워 반대하는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세력이었다. (2권, p.43)
이 소장, 다시 북벌론으로 돌아온다.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했을 때(1659)의 이야기를 전한다. 효종이 송시열에게 말하기를, “기회가 되면 포병 십만을 키워서 치고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한족들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효종 14년, 실제로 명나라 장수중에 청나라가 승리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 있었다는 것.
“효종이 15년만 더 살았으면 동아시아 역사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남부의 운남성, 광동성 등 남부지역은 한족 출신의 장수였다가 청나라에 항복한 사람들이 왕이 돼서 다스렸는데, 이를 삼번이라고 한다. 청 강희제가 (청나라 남부에 있는 일종의 자치 왕국인) 삼번을 철폐하겠고 하니까, 삼번은 반란을 일으키고, 삽시간에 중국 남부는 전쟁터로 변한다. 효종이 살아있었으면 바로 치고 올라갔을 거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모르지.”
효종이었으면 비축미를 풀어 당장 압록강을 건넜을 상황이지만 북벌 대의를 외치던 집권 서인은 조용했다. (2권, p.99)
이런 상황, 이 소장에 의하면 윤휴가 상소문 올렸다. 치고 올라가자. 그는 진정한 북벌론자로 윤휴를 지목했다. 서인들은 뜨금 했다. 그들의 이중성 때문이라는 것. 그들은 말로만 북벌론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북벌론은 효종이 사망한 동시에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현종 14년(1673년) 청나라가 삼번三藩 철폐 문제로 내전에 휩싸이자 조선에서 다시 북벌론이 등장했다. 이때의 북벌론은 예송 논쟁 때 우암 송시열과 대립한 백호 윤휴가 주창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지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역사의 붓대를 잡은 자가 미래인의 뇌리를 지배하는 사례다. (2권, p.97)
윤휴는 준비된 북벌론자였다. 북벌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민생 안정이라고 봤다. 이에 세금을 내지 않는 양반의 세금을 거둬야 한다며 주창했다. 신분에 따라 다른 호패를 지닌 호패제를 철패하고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종이에 이름을 쓰게 하는 지패제를 만들자고 했다. 이는 지금의 주민증과 비슷한 것이었다.
윤휴가 구상한 것은 사대부도 똑같이 군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大變通(급진 개혁론)이었으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양역 부담을 균등히 하려 했다.… 지패법이 양반 사대부의 반발을 산 이유는 반상班常의 구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호포법은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오가통 내의 모든 호戶에서 군포를 걷는 법이었다. 양반 사대부는 백성이 불편해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발했다. (2권, p.107)
지패법의 가장 핵심은, 세금이었다. 즉, 양반, 상놈 가리지 말고 다 내게 하자. “당시 죽은 사람이나 갓난아기의 군포까지 씌웠는데, 자기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이걸 못 견뎌서 도망을 가는 거다. 그러면 가족에게 대신 부과되는 족징(族徵)이 씌워지고. 그러니 가족을 데리고 도망을 가면 옆집에 씌우는 인징(隣徵)이 가해지고. 그러니 온 마을이 텅 비었다. 윤휴가 대변한 것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그가 속한 청남은 개혁정당인데, 당세가 약했다. 결국은 세금을 공평하게 거둬 북벌하자는 거였는데, 지패법은 호패법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사대부는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윤휴의 지패법은 호패법으로 대체되었다.… 호포제도 사대부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사대부는 기득권을 양보해 국력을 키울 생각이 없었고, 효종이 바라 마지않던 천재일우의 기회도 그렇게 흘러갔다. (2권, p.110)
윤휴의 개혁정책이 무산됐고,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은 윤휴를 죽였다. 서인의 꼼수는, 계속 됐다. 윤휴의 북벌론이었는데, 윤휴의 자리에 송시열을 넣었고, 대한민국의 교과서는 그렇게 계속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장의 탄식이다.
“윤휴가 사대부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는 망과 때문이었다. 망과는 아무나 다 응시할 수 있는 과거제로, 망과를 실시해서 많은 과거 급제자를 뽑았다. 윤휴는 이 사람들을 북벌에 쓰고자 했다. 하지만 북벌을 안 하니 쓸 수가 없었고, 이들은 졸병으로 강등돼서 군적에 들어가면 군포를 내야했다. 과거 급제를 했는데, 녹봉을 받기는커녕 군포를 내라니 소동이 일어났다. 윤휴는 정권이 서인으로 바뀌고 사형을 당하고 만다.”
사대부들, 왕권을 뒤흔들고 기득권에 매달리다
진정한 권력 강화는 반대 당파의 탄압이 아니라 반대 당파의 인정을 통해 이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타협과 화해를 통해 권력 강화의 길을 선택한 정치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1권, p.259)
왕권은 사대부들에 의해 좌우됐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조선왕 독살사건』은 단순히 흥미위주의 책이 아닌데, 그 책을 보면 인조반정 이후, 계유정란 이후에 국왕이 (사대부들에) 맞서기 시작하면 세상을 떠난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지류가 노론으로 가고, 서인이나 노론 세력과 국왕이 충돌하거나 충돌 직전에 갑자기 국왕이나 세자가 사라지는 패턴이 반복된다. 효종, 숙종, 경종, 사도세자, 정조, 순조가 다 그렇게 반복됐다. 후기엔 ‘노론이 내 정당’이라고 한 왕은 오래갔다.”
그는 실례를 들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노론에서 왕이 돼선 안 될 사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6품의 하위관료가 아들도 없는 경종에게 후사를 책봉하라고 상소를 올렸단다. 문제는, 그 하위관료가 상소를 올린 시간. 지금으로 치면 6시 퇴근직전인 5시55분경에 이를 올렸다. 그것도 노론만 퇴근을 안 하고 있다가, 반대파들이 퇴근하고 난 뒤 우르르 몰려와서 오늘 중 해야 한다고 땡깡을 부렸다. 그들이 왕으로 삼고 싶은 인물이 연잉군(영조)이었다.
“경종이 좋다고 했는데, 이들은 경종의 말만 갖고 안 되겠다며 대비마마 소견도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기록들을 보면, 촛불만 일렁이고 경종이 대비마마의 방에서 나오질 않자, 이들도 불안했다. 이게 뒤집어지면 사형이고, 역적질인걸 아니까. 새벽 무렵에 경종이 나와서 봉서 2장을 주는데, 연잉군이라 쓰여 있었고,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임금과 ‘삼종의 혈맥’이 누가 있느냐. 삼종의 혈맥은 인조부터가 아니라, 효종부터 쳐서 현종, 숙종, 세 임금의 피를 타고 난 왕실 사람을 뜻한다. 소현세자 자리를 효종이 차지해서다. 경종이 그런다. 효종부터 삼종의 혈맥이 금상(경종)과 연잉군 외에 누가 있느냐. 하룻밤사이 무혈쿠데타가 성공한 거다.”
조선 후기에는 효종-현종-숙종의 피를 이은 삼종 혈맥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뜻하는 핏줄이 된다. 쿠데타를 일으켜 화가위국化家爲國한 인조에서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소현세자가 아닌 둘째 효종이 왕위를 이은 것을 중시하기 위함이다. (2권, p.50)
게임 끝이었다. 다음날, 소론 대신들이 출근하니, 이미 후사가 결정됐고, 한 달 뒤 노론 관료가 왕세비에게 대리청정을 시켜야 한다며 주장했다. 경종은 노론에 의해 무력화됐다. 노론의 역적질이 계속 됐으나 윤휴가 사형 당한 뒤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김일경이었고, 그는 7명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옛날 사람들의 상소를 읽어보면 재밌다. 김일경의 상소문에는 ‘노론이 역적질 한 것은 길가의 돌도 다 압니다’, 라고 돼 있다. 노론 쪽에선 난리가 나서 김일경을 죽여야 된다고 한다. 노론 얘기에 오케이만 했던 경종이, 그땐 김일경이 무슨 잘못이냐고 화를 내면서,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으로 바꿔치기 했다. 신하들이 하자는 대로 ‘Yes’만 해서 자기 속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칼을 뽑아 휘두르면서 바꿔친 거다. 속을 감추고 있다가 어느 순간 드러낸 거지.”
당파적 기록에 의한 영조 치세
‘영?정조 시대’라는 용어가 있다. 영조와 정조의 치세를 아울러 설명하는 것인데 두 임금의 시호를 묶어 시대를 구분한 유일한 예다.… 영?정조시대라는 시기 구분도 사실은 존재할 수 없는 몰역사적 용어다. 영?정조시대라는 용어 자체가 노론 후예 학자들이 당파적 시각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정조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영조의 부속인물처럼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2권, p.4~6)
경종도 재위 4년 만에 독살 당했다. 영조가 즉위했다. 이른바 조선후기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시대가 도래. 하지만 이 소장은 영조의 치세가 과장됐다고 단언한다. 영조의 탕평책도 즉위 초기, 시늉만 있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의 근거는 이렇다. 첫째, 남인은 장희빈의 죽음으로 몰락했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는데, 노론은 다 등용하고 소론에선 온건파만 등용했다. 둘째, 영조 비판서가 뜨자, 소론 강경파가 대거 암살당했다. 셋째, 반노론적 정치견해를 갖고 있다고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죽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역사 교과서에 표기된 ‘영?정조 시대’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그런 시대는 존재할 수가 없다. 태종, 세종을 ‘태?세 시대’로 표현하나? 유일하게 영조, 정조를 영?정조 시대라는데 노론 사학자들이 정조를 영조의 부속인물로 취급한 거다. 정조 붐이 일어났지만, 정조가 부각된 건 10년밖에 안 된다. 정조의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조선 후기에 세종 못잖은 임금이 있었구나 하면서 정조 붐이 일어난 거다.”
이 소장이 설명하는 세종과 정조의 차이. 세종은 부모를 잘 뒀으나 정조는 그렇지 않다. 세종은 강남에서 고액 과외를 해서 90점이라면, 정조는 막 크면서 85점을 주겠단다. 이 소장이 세종에 5점 더 준 이유는 훈민정음 때문.
“역사를 설명할 때,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 있다. 우리 같은 평범한 백성을 둔 왕들은 백성을 얼마나 위했느냐, 즉 위민(爲民)이 중요하다. 정조도 신분제를 흔들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했다. 어떤 ?별적 시스템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경쟁 체제에서 탈락하거나 낙오한 사람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더 중요한 것은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의 자식이 똑똑할 경우 국가의 공공시스템만으로 올라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에서 현재를 보고, 미래를 조망한다
역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해 중의 하나는 역사를 과거학으로만 여긴다는 점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는 과거에만 머무르는 과거학이 아니다.…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역사는 현재학이고, 이를 통해 미래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미래학이다. (p.7)
노론은 성리학 외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을 찍어 제거했다. 윤휴의 경우도 그랬다. 윤휴가, ‘천하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왜 모르겠냐. 주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내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공자는 동의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양명학자들이 강화도에 들어가 강화학파라는 지식그룹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양명학을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소론 계통이었다. 노론의 1당 독재는 정조가 죽은 뒤 세도정치로 흘렀다. 노론 독재 하에서 도 열 개 집안 정도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몇몇 집안이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이 소장은 이인직의 『혈의 누』이야기를 꺼냈다. “이인직은 1910년 나라가 망할 때, 이완용의 비서였다. 통감부 외사국장 집에 가서 망국에 대한 비밀협상을 한다. 혈의 누.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의’는 안 써도 된다. 일본어의 노(の)자인데, 이인직이 그걸 쓸 때(1906년)는 그렇게 쓰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다. 비꼬아 말하자면, 대단한 선각자는 선각자지. 내용도 청나라 군인이 조선 여인을 겁탈할 때 일본 사람이 구해줬다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지금 국어교과서에 그를 신소설의 선각자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이 소장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일본에서 후작, 백작 등 귀족작위와 은사금을 준 조선인 76명의 당파 분석을 해봤다. 그 가운데 당파를 알 수 있는 사람은 64명. 남인은 없었고, 북인 2명, 소론 6명이었는데, 나머지 56명이 노론이었단다. 그들은 이후에도 계속 후손을 통해 각 분야에서 국가 권력을 장악한다.
“노론은 시대착오적인 집단이다. 그들은 산업자본 전환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해방 이후에도 학문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정착됐다. 사학계에도 노론과 다른 얘기를 하면 학자도 아니라며 욕을 한다. 일제 식민사학과 노론사학이 뭐냐, 노론사학은 중국인의 시각으로 우릴 본 거고, 일제 식민사학은 일제의 시각으로 우리를 본다. 이게 우리 주류역사관이다.”
그는 단일민족론도 비판했다. 우리는 원래 다민족 국가였다는 것. 아울러 우리가 다른 나라를 한 번도 침략하지 않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수사도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구려 때부터 우리는 천자의 전통을 지키겠다는 사고를 갖고 있으면서 전쟁도 했고, 수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했다는 예를 들었다. 허나 식민사학은 이런 것을 감췄다는 것.
그렇다면 독립운동한 사대부는 없을까. 물론, 있었다. 전국 각지에 걸쳐서. 이들은 망명을 통해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었다. “서울엔 우당 이회영 일가, 강화에 양명학자(이건승)들, 충청 진천의 홍승헌, 안동의 이상영 일가 등이 대부분 온 가족을 이끌고 망명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매천 황현 등이 같은 그룹이다. 이들이 1910년부터 망명을 시작해 만주 횡도천이라는 마을에 모인다. 이 사실이 알려진 건 얼마 안 됐다.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이 작은 마을에 모인 것은 무슨 의미냐. 기획 망명이라는 거지.”
집권당 노론은 나라 팔아먹었고, 야당이나 재야는 횡도천에 모인 셈이었다. 1911년 4월, 수백 명이 추가가(鄒家街)라는 마을의 대보산에 모여서 노천군중대회를 열었고, 경학사라는 민간자치단체를 만들었다. 경학사는 신흥무관학교도 만드는 등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가 됐다.
“나라가 망했을 때, 망명했던 이 분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정통성의 뿌리다. 나는 노론, 소론 집안과 아무 관계가 없다. (웃음) 우리나라 왕실은 망할 때 비장미가 없다. 신라나 고려의 마지막 왕은 참 공손하게 양보했는데, 나라가 망할 땐 비장미가 있어야 한다. 명나라의 마지막 왕은 최후의 순간에, 딸에게 ‘네가 왜 내 집안에 태어났느냐’면서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왕가로 태어나는 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어야 한다. 조선도 망할 때 재야나 야당 인사들만 목숨을 끊었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에 독립운동가 집안이 1~2명밖에 없음을 꼬집었다. 40여년 일제에 의해 강점된 나라에서! 지금도 노론 일당독재의 기득권 체제가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나라가 망했을 때, 이회영 일가가 만주로 가져간 돈이 600원이다. 그 돈을 계산해봤더니, 지금 돈으로 600억원 가량이더라. 이게 타당하냐고 통계청에 물어봤더니, 타당하다더라. 급하게 팔았으니 싸게 팔았을 텐데도 말이다. 독립투사들이 한 번은 우당 이회영 집에 갔더니 굶어서 누워있었다더라. 옷가지도 없고. 그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떠났다. 대한민국 건국이 됐으면, 이런 뿌리에 정통성을 둬서 식민사관을 제거하고 이런 분들에게 정통성 줘서 역사를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다.”
Q&A
‘십만양병설’이 조작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찾아보니까 아니다.
“조작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십만양병설’이 최초로 나온, 율곡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쓸 때만 해도 연도를 확정하지 못했다. 우암 송시열이 비로소 임진왜란 10년 전 4월에 율곡이 경연(經筵)에서 말했다고 썼다. 뭣보다 율곡이 쓴 1차 사료나 율곡 생전의 행적에 나오느냐가 핵심이다. 이이가 <경연일기>를 썼는데, 거기엔 안 나온다. 핵심은 율곡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율곡이 병조판서일 때, 이판제가 난을 일으켰다. 율곡은 군사를 보충할 목적으로 자원근무를 하면 신분상승을 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을 한 개혁정치가였다. 율곡이 한 것만 갖고 평가해야지, 없는 것 갖고 평가하는 건 아니다.”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정병설 교수와 백승종 교수와 논쟁하고 있는데, 핵심이 무엇인가. 둘째, 영조, 정조 대왕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는데, 대왕을 쓰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셋째, 정조의 개혁을 놓고 논쟁을 벌였는데, 강단 사학자들 중에 지원해준 사람이 없다. 또 이병도 박사를 어떻게 봐야 하나.
“몇몇 논쟁이 있는데, 우선 『한중록』에 대해 나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입장을 옹호한 책이고, 사실도 있는 한편 과장도 있고, 사실도 아닌 것도 있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교과서엔 『한중록』만 나온다. 사도세자 건에 대해선 여러 기록이 있는데, 한중록과 180도 다르다. 사료 비판은 역사학의 기본이니, 한중록과 다른 관점도 (교과서에) 함께 실어줘야 한다. 나는 『한중록』만 실은 게 문제라고 얘기한 거다. 사료로서 검증하자는 것이 내 주장이다. 검증하자고 해서, 비판하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영조 38년(1762년)에 있었던 사도세자 살해 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하는데, 현재도 많은 이들이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홍씨의 『한중록恨中錄』이 과거 「국어교과서」에 실린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국어교과서」는 홍씨와 다른 시각의 사료는 배제시켰고,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뒤주의 비극’을 낳았다는 홍씨의 시각만 실어서 일방적으로 유통시켰다. (1권, p.298)
정조가 개혁군주냐 아니냐는, ‘For the people’을 얼마나 했나 봐야 한다. 정조가 왜 노비같이 안 했느냐고 하면 대화하기 어렵다. 국왕 입장에서 공고한 성리학, 주자학 체제에서 양명학도 용인한 ?은 개혁을 한 거 아니냐. 문체반정도 정조가 말하는 것은 유교를 죽이는 것보다 근본을 캐는 것이다. 천주교가 성행하는 것의 뿌리를 찾아보니 잘못된 문체를 쓰는데 있었던 거다. 그래서 이걸 바로 잡기 위해 문체반정이 발생한다. 시끄러웠지만, 피해 본 사람이 없다. 이옥의 과거시험 합격을 취소한 것 말고는. 그 시절로 들어가 사건이 발생하는 맥락을 바라봐야 한다.
정조가 문체반정의 당사자로 지목해 반성문을 요구한 이 상황, 김조순, 남공철 등은 모두 노론 인사였다. 문체반정은 상당히 떠들썩한 사건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부 노론 인사에게 반성문을 요구하고 반성문을 쓰면 관직을 회복시켜준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과거 시험마다 거듭해 패관 문체적 답안지를 제출한 이옥의 합격을 취소하고 잠시 동안 경상도 삼가현(합천군)의 군사로 충군시킨 것이 유일한 실형이라면 실형이었다.(2권, p.318)
대왕이라는 용어는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는 거다. 내가 안 쓰는 건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의 이야기는 장황한데, 하나만 말씀 드리겠다. 심환지와의 관계인데, 정조가 떠나자마자 남인 사냥이 시작된다. 1800~1801년, 많은 사람이 죽고 귀양을 간다. 2년 간 모든 옥사를 심환지가 주도했다. 다른 기록에는 심환지는 선왕이 떠나던 당일로, 선왕을 배신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다른 기록에선 심환지의 죄상이 많은데, 역적 의사를 어의로 만든 것이 가장 큰 죄라고 적혀있다. 정조가 죽자마자 모든 정책을 뒤엎은 많은 기록이 있다.
강단사학과 관련해서는, 영조와 정조 무렵에, ‘백학파’라는 파가 형성됐다. 지금의 파고다공원 부근에 박지원 등 서자들이 모여 학파를 이룬 건데, 강단이냐 아니냐는 역사학을 하는 입장에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양주시 초청강연을 갔을 때, 어머니들이 많기에 이런 얘기를 했다. 남양주가 낳은 최고의 인물이 다산 정약용인데, 그처럼 살라고 하면 동의할 사람 없을 거라고. 귀양 가고 그러잖나. 그런 게 역사의 음양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이병도 박사 개인에 대해선 감정이 없다. 단, 우리나라의 문제점이 있다. 뭐냐면 40여년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면 해방이 된 뒤 과거 일본 통치에 대해 재검토했어야 한다. 일본 통치가 남긴 국어학, 언어학, 역사학적인 문제를 재검토해서, 일본 사람이 한 것이 100% 다 나쁘진 않지만, 나쁜 것을 극복했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조선총독부는 사라졌지만,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사관과 역사이론이 살아남았다. 만약 노비가 아닌데, 노비의 자식이라고 했으면 바로 잡아야 하지 않느냐. 우리나라는 이걸 바로잡자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든 나라다.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오고. 핵심은 두 가지다. 왜 노론 비판하느냐. 왜 일제 식민사관 비판하느냐. 이병도 박사는 내가 생각하기로, 단 한 번도 일제 식민사관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은 분이다.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거다. 분명 이병도 박사의 학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학설을 말하면 넌 죽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내 학설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하면 누가 뭐라고 하나. 나도 어떻게 다 알겠나. 그런데 넌 왜 다른 학설을 말하느냐고 공격한다. 이건 도그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선 타협하긴 어렵다.”
이병도 박사 사관이 왜 하나의 사관이 아닌, 절대적 가치를 부여받았는지 궁금하다. 이병도 박사가 조선사편수회 활동을 한 것으로 아는데, 친일인명사전에 왜 없나.
“(친일인명사전에) 처음에 없었다가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병도 학설이 왜 도그마가 됐냐면, 해방이후 곧 분단이 되고 냉전체제가 수립되면서 사회경제 사학자들이 월북하거나 역사학자들이 잡혀갔다. 불가피하게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사람을 쓰게 됐는데, 그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했다. 그들이 교원양성소를 통해서 주요 대학의 역사학과에서 식민사관을 전파하면서 일본 식민사학의 구도가 전파된 거지. 예를 들어, 나와 비슷한 또래는 한사군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이순신, 을지문덕 등 긍정적인 부분부터 배우고 나이 들어서 비판적인 부분을 배워도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사군을 줄기차게 가르쳤다. 나는 이런 구조의 문제점에 대해 말한 거다.”
나는 평범한 시민인데, 송시열과 관련해 왜곡됐음이 다른 기록이나 가문에서 발견됨에도, 지난 세월을 고치려는 사학자가 덜 있는 게 실망스럽다. 이병도 박사가 옳든 아니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건 간에, 앞을 두고 나아가는 것이 사학의 근간인데, 그걸 못하는 것이 무슨 사학자냐.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가 앞으로 해야 할 과제 같은데.
“강연을 다녀보면 옛날과 많이 다르다. 3년 전과 비교해도 다르다. 또 한 편에선 교류가 없었는데도, 나와 같은 역사관을 지닌 분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을 발견하고 힘이 된다. 역사학과 외의 다른 과에서는 상당히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더라. 살아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여러분과 같은 분들이 있어서 제대로 된 역사학자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 혼자 할 것이 아니고 같이 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화냥녀라는 개념이, 평안도에서 청나라의 노략질로 끌려 간 여성들이 돌아오면 그리 불렀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지.
“우리나라 남자들이 나라를 못 지켜서 많은 여자들이 끌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는데, 상당히 사례가 많았다. 그 분들은 잘못이 없음에도 그렇게 매도당했다. 청나라 때도 궁녀로 가거나 청나라 섭정왕의 의녀로 가는 등 역사엔 다양한 사례가 있다. 그 주제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다시 말씀 드리겠다.”
‘선진 일류 국가’를 주야장천 부르짖는 통치자가 있다. 부국강병도 그의 수사다. 그 통치자에 들러붙은 기득권은 ‘그 밥에 그 나물’ 레시피만 거듭 내놓는다. 말끝마다 서민을 거론하며 민생을 챙기는 척 행보를 하지만, 그 행보에 붙은 껌 딱지를 많은 이들은 알아챈다. 지금 그 나라는 지배층만 부유한 나라다. 그 나라에서 어떤 정치 세력이 진정 국가를 생각하고 민생을 걱정하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종이는 의무(무상)급식이 아닐까. 그 기득권들은 법제화에 찬성하지 않는다.
앞선 인용은 조선을 말한 경우인데, 지금 그 나라라고 다르진 않다. 역사는 면면히 흐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기득권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개혁입법이 만들어지고, 활기를 띠는 경우가 있어도, 이내 고꾸라지고 말았다. 기득권의 저항 때문이다. 『조선 왕을 말하다』(이덕일 지음|역사의아침 펴냄)은 종종 그것을 말한다.
지난 8일 서울 정독도서관, 『조선 왕을 말하다』의 저자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독자와 만났다. 이날의 주제는 ‘누가 왜, 그들의 승패를 뒤집었는가?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조선 왕들의 역사’. 이른바 사대부들의 ‘붕당 정치’에 의해 휘둘렸던 조선(의 왕들)과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
이덕일 소장은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사림의 분열부터 인조반정과 소현세자의 독설로 야기된 조선 후기 비극의 뿌리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서인에서 갈라진 분파인 노론의 장기집권과 그에 따른 부작용 등을 현재까지 대입시켜 흥미를 자아냈다.
이날, 정독도서관 강의실을 가득채운 열기는, 그것이 조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말하고, 미래를 조망했기 때문이었다.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에서 교과서를 벗어났고,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냈다. 이날 강의에서 언급된 역사 모두가 ‘사실’이라고 장담할 순 없지만, 역사에서 현재를 찾아야 할 이유는 명백하게 보여줬다.
사대부의 허위의식, 언행 불일치
왕조 국가의 기본 의리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이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란 뜻이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은 당론의 시각으로 광해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고 광해군은 그 신하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불충한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이 충성이란 해괴한 논리가 쿠데타 명분으로 성립되었다. (1권, p.181)
인조반정이 그랬다. 유학자들이, 즉 신하들이 광해군을 내쫓았다. 왕조국가에서 역적질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역적질을 할 때도 명분은 있어야 하는 법. “우리 임금은 명나라 황태자고, 조선의 임금은 제후에 지나지 않는다. 제후는 사대부와 같이 신하들이다. 제후(신하)에 지나지 않는 광해군이 명?청이 싸울 때, 청나라 편을 들었다. 명에 대한 불충을 저지른 왕을 내쫓는 것은 올바르다. 이런 주장이었다. 못 들어봤지? 자기들한테 불리한 얘기는 안 하지.”
인조반정은 특정 당파가 당론으로 국왕을 갈아 치울 수 있는 상태까지 왔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왕조 정치의 파탄이었다. (1권, p.186)
이 소장은 사대부의 허위의식을 꼬집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특히 서인의 ‘말로만 북벌론’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말로는 북벌을 주창했으나, 실제로는 어떤 행동에도 나서지 않고 되레 하지 말자는 쪽이었다. 그들의 명분은 ‘민생이 더 중요하다’였고, 북벌을 고려했던 효종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았다는 것.
“효종이 말년에 송시열과 독대하면서 이야기한다. 내가 경에게 다 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대신 북벌하자. 당시 송시열이 북벌의 발목 잡았다. 그런데 지금은 송시열이 북벌론자로 뜨고 있지. 잘못된 거다. 송시열을 좋게 쓰려면 북벌보다 민생에 힘썼다고 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쓰긴 어렵다.”
효종은 재위 10년 3월 11일 송시열과 담판을 지었다. 이른바 기대독대己亥獨對다.… 이날의 독대는 송시열에게 ‘더 큰 권력’을 약속했지만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2권, p.45, 48)
인조반정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었다. 국왕도 자신들과 같은 사대부 중의 제1사대부에 불과할 뿐 초월적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국왕이 아닌 사대부가 나라의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효종은 북벌을 가능한 목표로 여겼으나 사대부는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사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였다. (2권, p.42)
개혁입법에 사는 나라, 사대부에 죽는 나라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신뢰를 받는 방법은 간간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이다. 로마의 파비우스 가문처럼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모두 목숨을 바치는 가문을 어찌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자기희생은커녕 군역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았다. 지배층이 군대에 가지 않는 나라의 피지배층이 전쟁 때 종군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1권, p.161)
이 소장은 이것을 대한민국의 현주소라고 꼬집었다. 그 당시, 사대부들은 군역의 의무가 없다. 1년에 군포 두 필을 내는 군역의 의무. 종중 때, 사대부들은 군포를 내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법제화 됐다. 합법적인 면제. “현재 고위공직자들 중에 군대 안 간 사람이 많은데, 다 여기서 비롯됐다. 병역 의무를 상놈의 것으로 생각하는 거지. 조선 후기에 사대부도 병역 의무를 수행하자고 하면, 어찌 상놈과 같이 군포를 내느냐 그랬던 거다.”
중종 때 군적수포제가 실시되면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고 일반 백성들만 납부의 의무를 지게 된 것이 주요인이었다. 지배층의 군역이 면제된 판국에 피지배층이 목숨 걸고 체제를 위해 싸울 이유가 없었다. (1권, p.163)
사대부들의 지질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라의 위상을 일으킨 것이 개혁입법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도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난리가 일어나자, 백성들은 노비를 관할하는 부서인 장예원을 불태우는 등 격하게 반응했다. 선조는 당시 조선이 끝났다고 봤단다. 실록에는 선조가 우리 백성이 적병에 가담했다는데 사실이냐고 묻는다. 백성들이 실제로 그렇게 한 기록이 있다고 이 소장은 전한다.
이 와중에 류성룡의 재기가 빛났다. ‘면천법(免賤法)’이라는 개혁입법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천민을 면하게 하는 법이었다. 일본군 머리 하나를 베면, 천민에서 양인으로, 세 개를 베면 벼슬을 줬다. 일본군에 붙었던 노비들, 이 나라 망하길 바랐던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고, 의병에 가담했다. 임진왜란의 전세는 그렇게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런 전세의 역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의병들이었다. 의병 기의起義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일부 사람의 솔선수범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정 겸 도제사찰사 류성룡이 주도한 개혁입법이었다. (1권, p.169)
하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전쟁이 끝나고 류성룡이 제거되자, 조선은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십만양병설을 만들어서 퍼트렸는데, 전혀 있지 않았던 얘기다. 십만양병을 하려면, 당시 정규군이 8천인데, 국방비를 열배 증액해야 하는 거지. 율곡은 변방에 3년간 자원 근무를 하면 노비는 양인으로 신분상승을 시켜주고, 서얼은 과거 응시할 자격을 주자면서 신분제 틀을 흔들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돈 안들이고 신분상승하고 싶은 노예나 서얼이 자원복무할 거 아니냐. 그러나 이것 다 조정에서 부결됐다. 율곡은 1만 양병도 얘기한 적이 없다.”
그는, 율곡이 임란이 발발하기 10년 전, 십만양병을 주장했다가 임금은 물론 류성룡의 반대에 부딪혀 안 됐다는 ‘십만양병설’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임란 극복의 두 영웅을 꼽자면, 무장에선 이순신, 문신 중에는 류성룡이다. 헌데, 류성룡의 자리를 율곡으로 대체하고 조작한 것이 십만양병설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십만양병설은, 실은 없는 이야기다. 임란 극복은 류성룡의 개혁정책 덕분인데, 십만양병을 반대한 죽일 놈으로 가르치고 있다.”
류성룡은 조세제도도 혁명적으로 개혁했다. 류성룡이 주장하는 혁명적 세제개혁안이 훗날 대동법이라고 부르는 작미법作米法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거꾸로 많이 납부하고 부유한 사람이 적게 납부하던 공납의 폐단을 조세정의에 맞게 개혁하자는 법안이었다.… 류성룡은 이런 개혁 입법들이 실시되지 못하면 조선은 회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과연 면천법으로 노비들을 의병으로 끌어들이고, 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조선은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1권, p.172~173)
예송논쟁, 당파싸움의 격전장
유능한 지배층과 무능한 지배층을 가르는 기준 중의 하나가 현실인식 문제이다. 유능한 지배층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지만 무능한 지배층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그렇게 머릿속의 바람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동안 나라는 깊숙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1권, p.154)
사대부들의 기득권 사수로 개혁입법은 생명이 짧았고, 조선은 다시 사대부의 나라로 돌아갔다. 효종이 죽고 예송논쟁이 발생한다.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벌어진 사대부들의 당파 싸움질이었다. “서인과 남인이 예송논쟁에서 입장이 갈라진다. 서인은 무조건 왕실에게 박하게 했다. 남인은 3년복을 주장했고, 서인은 1년복을 주장한다. 서인은 결과적으로 왕권을 무시한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에 의한 절대적 존재에서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의 권력 강화냐, 사대부의 권력 균점이냐 하는 문제였다. 그런 양자의 시각이 충돌한 것이 1차 예송 논쟁이다. (2권, p.49)
1차 예송논쟁(1659) 후 15년이 지나 2차 예송논쟁(1674)도 있었다. 효종의 부인인 왕대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기년복(1년)과 대공복(9개월)이 붙었다. 남인은 1년복을 주창했고, 서인은 9개월복이었다.
“서인이 볼 때, 조선의 임금은 왕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신하니까, 사대부의 예법을 적용해야 한다. 남인 입장은, 왕가의 예법은 사대부의 예법과 다르다는 거였고. 어떤 게 맞는 거 같나. 왕조 국가에서 국왕이 떠났는데, 사대부와 예법이 같다? 말이 안 되는 거지. 송시열이 1차 예송논쟁에서 1년복을 주장했는데, 장례법에 대한 책부터 다시 봐야 하는 사람이다. 일반 평민의 것을 들이대다니. 예송논쟁, 복잡한 것 같지만, 핵심은 인조반정의 논리, 즉 우리의 진정한 군주는 명 황제고, 조선 임금은 신하에 지나지 않는다와 맥락이 닿는다.”
이렇게 예송논쟁이 벌어진 현종시대. 왕위에 오를 때, 십대 후반이었던 현종은 1차 예송논쟁에선 서인의 주장대로 1년복으로 갔다. 하지만, 2차 때는 확실히 견해가 정립되면서 정권을 갈아치웠다.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꿨고, 서인을 향해 ‘경들은 선왕(효종)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데… 임금에게 이렇게 박하게 하면서 어느 곳에 후하게 하려는 것인가’라고 화를 냈다. ‘어느 곳’은 송시열이었다.
서인에게 효종은 둘째 아들이었고, 인선왕후도 중자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이 송시열의 뜻이자 당론이었으므로 김수흥은 “지금 예조가 대공복으로 의정해 올린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거듭 답했다.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서인이 계속 대공복을 고집하자 드디어 현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2권, p.88)
그러나 정권을 갈아치우는 와중에 현종이 세상을 떠났다. 청나라에서 보기엔 예송논쟁 등이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사신들에게 너의 나라엔 왜 이리 임금이 빨리 죽느냐.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해서, 백성이 고생이 많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기근에 시달리던 현종 12년(1671년) 2월 북경에 다녀온 동지사 복선군 이남은 “청나라 황제가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 없이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는 신하가 강하기(臣强) 때문이라고 한다 돌아가 이 말을 전하라’고 말했다”(『현종실록』12년 2월 20일)고 산해관에서 보고했다.… 청에서 보기에는 국왕이 승하했는데 신하들이 3년복이니 1년복이니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이상 현상이었다. (2권, p.83)
북벌론, 서인들의 아킬레스
군사를 기르는 양병보다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양만養民과 안민安民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로 사실상 북벌을 반대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었다. 이때 표면적으로 가장 강하게 북벌을 주창한 세력이 숭명崇明 의리를 당론으로 삼은 산림, 즉 산당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효종의 군비 증강 계획에는 안민을 내세워 반대하는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세력이었다. (2권, p.43)
이 소장, 다시 북벌론으로 돌아온다.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했을 때(1659)의 이야기를 전한다. 효종이 송시열에게 말하기를, “기회가 되면 포병 십만을 키워서 치고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한족들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효종 14년, 실제로 명나라 장수중에 청나라가 승리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 있었다는 것.
“효종이 15년만 더 살았으면 동아시아 역사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남부의 운남성, 광동성 등 남부지역은 한족 출신의 장수였다가 청나라에 항복한 사람들이 왕이 돼서 다스렸는데, 이를 삼번이라고 한다. 청 강희제가 (청나라 남부에 있는 일종의 자치 왕국인) 삼번을 철폐하겠고 하니까, 삼번은 반란을 일으키고, 삽시간에 중국 남부는 전쟁터로 변한다. 효종이 살아있었으면 바로 치고 올라갔을 거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모르지.”
효종이었으면 비축미를 풀어 당장 압록강을 건넜을 상황이지만 북벌 대의를 외치던 집권 서인은 조용했다. (2권, p.99)
이런 상황, 이 소장에 의하면 윤휴가 상소문 올렸다. 치고 올라가자. 그는 진정한 북벌론자로 윤휴를 지목했다. 서인들은 뜨금 했다. 그들의 이중성 때문이라는 것. 그들은 말로만 북벌론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북벌론은 효종이 사망한 동시에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현종 14년(1673년) 청나라가 삼번三藩 철폐 문제로 내전에 휩싸이자 조선에서 다시 북벌론이 등장했다. 이때의 북벌론은 예송 논쟁 때 우암 송시열과 대립한 백호 윤휴가 주창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지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역사의 붓대를 잡은 자가 미래인의 뇌리를 지배하는 사례다. (2권, p.97)
윤휴는 준비된 북벌론자였다. 북벌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민생 안정이라고 봤다. 이에 세금을 내지 않는 양반의 세금을 거둬야 한다며 주창했다. 신분에 따라 다른 호패를 지닌 호패제를 철패하고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종이에 이름을 쓰게 하는 지패제를 만들자고 했다. 이는 지금의 주민증과 비슷한 것이었다.
윤휴가 구상한 것은 사대부도 똑같이 군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大變通(급진 개혁론)이었으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양역 부담을 균등히 하려 했다.… 지패법이 양반 사대부의 반발을 산 이유는 반상班常의 구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호포법은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오가통 내의 모든 호戶에서 군포를 걷는 법이었다. 양반 사대부는 백성이 불편해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발했다. (2권, p.107)
지패법의 가장 핵심은, 세금이었다. 즉, 양반, 상놈 가리지 말고 다 내게 하자. “당시 죽은 사람이나 갓난아기의 군포까지 씌웠는데, 자기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이걸 못 견뎌서 도망을 가는 거다. 그러면 가족에게 대신 부과되는 족징(族徵)이 씌워지고. 그러니 가족을 데리고 도망을 가면 옆집에 씌우는 인징(隣徵)이 가해지고. 그러니 온 마을이 텅 비었다. 윤휴가 대변한 것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그가 속한 청남은 개혁정당인데, 당세가 약했다. 결국은 세금을 공평하게 거둬 북벌하자는 거였는데, 지패법은 호패법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사대부는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윤휴의 지패법은 호패법으로 대체되었다.… 호포제도 사대부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사대부는 기득권을 양보해 국력을 키울 생각이 없었고, 효종이 바라 마지않던 천재일우의 기회도 그렇게 흘러갔다. (2권, p.110)
윤휴의 개혁정책이 무산됐고,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은 윤휴를 죽였다. 서인의 꼼수는, 계속 됐다. 윤휴의 북벌론이었는데, 윤휴의 자리에 송시열을 넣었고, 대한민국의 교과서는 그렇게 계속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장의 탄식이다.
“윤휴가 사대부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는 망과 때문이었다. 망과는 아무나 다 응시할 수 있는 과거제로, 망과를 실시해서 많은 과거 급제자를 뽑았다. 윤휴는 이 사람들을 북벌에 쓰고자 했다. 하지만 북벌을 안 하니 쓸 수가 없었고, 이들은 졸병으로 강등돼서 군적에 들어가면 군포를 내야했다. 과거 급제를 했는데, 녹봉을 받기는커녕 군포를 내라니 소동이 일어났다. 윤휴는 정권이 서인으로 바뀌고 사형을 당하고 만다.”
사대부들, 왕권을 뒤흔들고 기득권에 매달리다
진정한 권력 강화는 반대 당파의 탄압이 아니라 반대 당파의 인정을 통해 이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타협과 화해를 통해 권력 강화의 길을 선택한 정치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1권, p.259)
왕권은 사대부들에 의해 좌우됐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조선왕 독살사건』은 단순히 흥미위주의 책이 아닌데, 그 책을 보면 인조반정 이후, 계유정란 이후에 국왕이 (사대부들에) 맞서기 시작하면 세상을 떠난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지류가 노론으로 가고, 서인이나 노론 세력과 국왕이 충돌하거나 충돌 직전에 갑자기 국왕이나 세자가 사라지는 패턴이 반복된다. 효종, 숙종, 경종, 사도세자, 정조, 순조가 다 그렇게 반복됐다. 후기엔 ‘노론이 내 정당’이라고 한 왕은 오래갔다.”
그는 실례를 들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노론에서 왕이 돼선 안 될 사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6품의 하위관료가 아들도 없는 경종에게 후사를 책봉하라고 상소를 올렸단다. 문제는, 그 하위관료가 상소를 올린 시간. 지금으로 치면 6시 퇴근직전인 5시55분경에 이를 올렸다. 그것도 노론만 퇴근을 안 하고 있다가, 반대파들이 퇴근하고 난 뒤 우르르 몰려와서 오늘 중 해야 한다고 땡깡을 부렸다. 그들이 왕으로 삼고 싶은 인물이 연잉군(영조)이었다.
“경종이 좋다고 했는데, 이들은 경종의 말만 갖고 안 되겠다며 대비마마 소견도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기록들을 보면, 촛불만 일렁이고 경종이 대비마마의 방에서 나오질 않자, 이들도 불안했다. 이게 뒤집어지면 사형이고, 역적질인걸 아니까. 새벽 무렵에 경종이 나와서 봉서 2장을 주는데, 연잉군이라 쓰여 있었고,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임금과 ‘삼종의 혈맥’이 누가 있느냐. 삼종의 혈맥은 인조부터가 아니라, 효종부터 쳐서 현종, 숙종, 세 임금의 피를 타고 난 왕실 사람을 뜻한다. 소현세자 자리를 효종이 차지해서다. 경종이 그런다. 효종부터 삼종의 혈맥이 금상(경종)과 연잉군 외에 누가 있느냐. 하룻밤사이 무혈쿠데타가 성공한 거다.”
조선 후기에는 효종-현종-숙종의 피를 이은 삼종 혈맥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뜻하는 핏줄이 된다. 쿠데타를 일으켜 화가위국化家爲國한 인조에서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소현세자가 아닌 둘째 효종이 왕위를 이은 것을 중시하기 위함이다. (2권, p.50)
게임 끝이었다. 다음날, 소론 대신들이 출근하니, 이미 후사가 결정됐고, 한 달 뒤 노론 관료가 왕세비에게 대리청정을 시켜야 한다며 주장했다. 경종은 노론에 의해 무력화됐다. 노론의 역적질이 계속 됐으나 윤휴가 사형 당한 뒤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김일경이었고, 그는 7명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옛날 사람들의 상소를 읽어보면 재밌다. 김일경의 상소문에는 ‘노론이 역적질 한 것은 길가의 돌도 다 압니다’, 라고 돼 있다. 노론 쪽에선 난리가 나서 김일경을 죽여야 된다고 한다. 노론 얘기에 오케이만 했던 경종이, 그땐 김일경이 무슨 잘못이냐고 화를 내면서,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으로 바꿔치기 했다. 신하들이 하자는 대로 ‘Yes’만 해서 자기 속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칼을 뽑아 휘두르면서 바꿔친 거다. 속을 감추고 있다가 어느 순간 드러낸 거지.”
당파적 기록에 의한 영조 치세
‘영?정조 시대’라는 용어가 있다. 영조와 정조의 치세를 아울러 설명하는 것인데 두 임금의 시호를 묶어 시대를 구분한 유일한 예다.… 영?정조시대라는 시기 구분도 사실은 존재할 수 없는 몰역사적 용어다. 영?정조시대라는 용어 자체가 노론 후예 학자들이 당파적 시각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정조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영조의 부속인물처럼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2권, p.4~6)
경종도 재위 4년 만에 독살 당했다. 영조가 즉위했다. 이른바 조선후기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시대가 도래. 하지만 이 소장은 영조의 치세가 과장됐다고 단언한다. 영조의 탕평책도 즉위 초기, 시늉만 있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의 근거는 이렇다. 첫째, 남인은 장희빈의 죽음으로 몰락했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는데, 노론은 다 등용하고 소론에선 온건파만 등용했다. 둘째, 영조 비판서가 뜨자, 소론 강경파가 대거 암살당했다. 셋째, 반노론적 정치견해를 갖고 있다고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죽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역사 교과서에 표기된 ‘영?정조 시대’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그런 시대는 존재할 수가 없다. 태종, 세종을 ‘태?세 시대’로 표현하나? 유일하게 영조, 정조를 영?정조 시대라는데 노론 사학자들이 정조를 영조의 부속인물로 취급한 거다. 정조 붐이 일어났지만, 정조가 부각된 건 10년밖에 안 된다. 정조의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조선 후기에 세종 못잖은 임금이 있었구나 하면서 정조 붐이 일어난 거다.”
이 소장이 설명하는 세종과 정조의 차이. 세종은 부모를 잘 뒀으나 정조는 그렇지 않다. 세종은 강남에서 고액 과외를 해서 90점이라면, 정조는 막 크면서 85점을 주겠단다. 이 소장이 세종에 5점 더 준 이유는 훈민정음 때문.
“역사를 설명할 때,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 있다. 우리 같은 평범한 백성을 둔 왕들은 백성을 얼마나 위했느냐, 즉 위민(爲民)이 중요하다. 정조도 신분제를 흔들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했다. 어떤 ?별적 시스템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경쟁 체제에서 탈락하거나 낙오한 사람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더 중요한 것은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의 자식이 똑똑할 경우 국가의 공공시스템만으로 올라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에서 현재를 보고, 미래를 조망한다
역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해 중의 하나는 역사를 과거학으로만 여긴다는 점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는 과거에만 머무르는 과거학이 아니다.…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역사는 현재학이고, 이를 통해 미래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미래학이다. (p.7)
노론은 성리학 외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을 찍어 제거했다. 윤휴의 경우도 그랬다. 윤휴가, ‘천하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왜 모르겠냐. 주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내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공자는 동의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양명학자들이 강화도에 들어가 강화학파라는 지식그룹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양명학을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소론 계통이었다. 노론의 1당 독재는 정조가 죽은 뒤 세도정치로 흘렀다. 노론 독재 하에서 도 열 개 집안 정도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몇몇 집안이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이 소장은 이인직의 『혈의 누』이야기를 꺼냈다. “이인직은 1910년 나라가 망할 때, 이완용의 비서였다. 통감부 외사국장 집에 가서 망국에 대한 비밀협상을 한다. 혈의 누.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의’는 안 써도 된다. 일본어의 노(の)자인데, 이인직이 그걸 쓸 때(1906년)는 그렇게 쓰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다. 비꼬아 말하자면, 대단한 선각자는 선각자지. 내용도 청나라 군인이 조선 여인을 겁탈할 때 일본 사람이 구해줬다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지금 국어교과서에 그를 신소설의 선각자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이 소장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일본에서 후작, 백작 등 귀족작위와 은사금을 준 조선인 76명의 당파 분석을 해봤다. 그 가운데 당파를 알 수 있는 사람은 64명. 남인은 없었고, 북인 2명, 소론 6명이었는데, 나머지 56명이 노론이었단다. 그들은 이후에도 계속 후손을 통해 각 분야에서 국가 권력을 장악한다.
“노론은 시대착오적인 집단이다. 그들은 산업자본 전환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해방 이후에도 학문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정착됐다. 사학계에도 노론과 다른 얘기를 하면 학자도 아니라며 욕을 한다. 일제 식민사학과 노론사학이 뭐냐, 노론사학은 중국인의 시각으로 우릴 본 거고, 일제 식민사학은 일제의 시각으로 우리를 본다. 이게 우리 주류역사관이다.”
그는 단일민족론도 비판했다. 우리는 원래 다민족 국가였다는 것. 아울러 우리가 다른 나라를 한 번도 침략하지 않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수사도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구려 때부터 우리는 천자의 전통을 지키겠다는 사고를 갖고 있으면서 전쟁도 했고, 수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했다는 예를 들었다. 허나 식민사학은 이런 것을 감췄다는 것.
그렇다면 독립운동한 사대부는 없을까. 물론, 있었다. 전국 각지에 걸쳐서. 이들은 망명을 통해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었다. “서울엔 우당 이회영 일가, 강화에 양명학자(이건승)들, 충청 진천의 홍승헌, 안동의 이상영 일가 등이 대부분 온 가족을 이끌고 망명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매천 황현 등이 같은 그룹이다. 이들이 1910년부터 망명을 시작해 만주 횡도천이라는 마을에 모인다. 이 사실이 알려진 건 얼마 안 됐다.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이 작은 마을에 모인 것은 무슨 의미냐. 기획 망명이라는 거지.”
집권당 노론은 나라 팔아먹었고, 야당이나 재야는 횡도천에 모인 셈이었다. 1911년 4월, 수백 명이 추가가(鄒家街)라는 마을의 대보산에 모여서 노천군중대회를 열었고, 경학사라는 민간자치단체를 만들었다. 경학사는 신흥무관학교도 만드는 등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가 됐다.
“나라가 망했을 때, 망명했던 이 분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정통성의 뿌리다. 나는 노론, 소론 집안과 아무 관계가 없다. (웃음) 우리나라 왕실은 망할 때 비장미가 없다. 신라나 고려의 마지막 왕은 참 공손하게 양보했는데, 나라가 망할 땐 비장미가 있어야 한다. 명나라의 마지막 왕은 최후의 순간에, 딸에게 ‘네가 왜 내 집안에 태어났느냐’면서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왕가로 태어나는 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어야 한다. 조선도 망할 때 재야나 야당 인사들만 목숨을 끊었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에 독립운동가 집안이 1~2명밖에 없음을 꼬집었다. 40여년 일제에 의해 강점된 나라에서! 지금도 노론 일당독재의 기득권 체제가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나라가 망했을 때, 이회영 일가가 만주로 가져간 돈이 600원이다. 그 돈을 계산해봤더니, 지금 돈으로 600억원 가량이더라. 이게 타당하냐고 통계청에 물어봤더니, 타당하다더라. 급하게 팔았으니 싸게 팔았을 텐데도 말이다. 독립투사들이 한 번은 우당 이회영 집에 갔더니 굶어서 누워있었다더라. 옷가지도 없고. 그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떠났다. 대한민국 건국이 됐으면, 이런 뿌리에 정통성을 둬서 식민사관을 제거하고 이런 분들에게 정통성 줘서 역사를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다.”
Q&A
‘십만양병설’이 조작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찾아보니까 아니다.
“조작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십만양병설’이 최초로 나온, 율곡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쓸 때만 해도 연도를 확정하지 못했다. 우암 송시열이 비로소 임진왜란 10년 전 4월에 율곡이 경연(經筵)에서 말했다고 썼다. 뭣보다 율곡이 쓴 1차 사료나 율곡 생전의 행적에 나오느냐가 핵심이다. 이이가 <경연일기>를 썼는데, 거기엔 안 나온다. 핵심은 율곡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율곡이 병조판서일 때, 이판제가 난을 일으켰다. 율곡은 군사를 보충할 목적으로 자원근무를 하면 신분상승을 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을 한 개혁정치가였다. 율곡이 한 것만 갖고 평가해야지, 없는 것 갖고 평가하는 건 아니다.”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정병설 교수와 백승종 교수와 논쟁하고 있는데, 핵심이 무엇인가. 둘째, 영조, 정조 대왕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는데, 대왕을 쓰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셋째, 정조의 개혁을 놓고 논쟁을 벌였는데, 강단 사학자들 중에 지원해준 사람이 없다. 또 이병도 박사를 어떻게 봐야 하나.
“몇몇 논쟁이 있는데, 우선 『한중록』에 대해 나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입장을 옹호한 책이고, 사실도 있는 한편 과장도 있고, 사실도 아닌 것도 있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교과서엔 『한중록』만 나온다. 사도세자 건에 대해선 여러 기록이 있는데, 한중록과 180도 다르다. 사료 비판은 역사학의 기본이니, 한중록과 다른 관점도 (교과서에) 함께 실어줘야 한다. 나는 『한중록』만 실은 게 문제라고 얘기한 거다. 사료로서 검증하자는 것이 내 주장이다. 검증하자고 해서, 비판하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영조 38년(1762년)에 있었던 사도세자 살해 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하는데, 현재도 많은 이들이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홍씨의 『한중록恨中錄』이 과거 「국어교과서」에 실린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국어교과서」는 홍씨와 다른 시각의 사료는 배제시켰고,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뒤주의 비극’을 낳았다는 홍씨의 시각만 실어서 일방적으로 유통시켰다. (1권, p.298)
정조가 개혁군주냐 아니냐는, ‘For the people’을 얼마나 했나 봐야 한다. 정조가 왜 노비같이 안 했느냐고 하면 대화하기 어렵다. 국왕 입장에서 공고한 성리학, 주자학 체제에서 양명학도 용인한 ?은 개혁을 한 거 아니냐. 문체반정도 정조가 말하는 것은 유교를 죽이는 것보다 근본을 캐는 것이다. 천주교가 성행하는 것의 뿌리를 찾아보니 잘못된 문체를 쓰는데 있었던 거다. 그래서 이걸 바로 잡기 위해 문체반정이 발생한다. 시끄러웠지만, 피해 본 사람이 없다. 이옥의 과거시험 합격을 취소한 것 말고는. 그 시절로 들어가 사건이 발생하는 맥락을 바라봐야 한다.
정조가 문체반정의 당사자로 지목해 반성문을 요구한 이 상황, 김조순, 남공철 등은 모두 노론 인사였다. 문체반정은 상당히 떠들썩한 사건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부 노론 인사에게 반성문을 요구하고 반성문을 쓰면 관직을 회복시켜준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과거 시험마다 거듭해 패관 문체적 답안지를 제출한 이옥의 합격을 취소하고 잠시 동안 경상도 삼가현(합천군)의 군사로 충군시킨 것이 유일한 실형이라면 실형이었다.(2권, p.318)
대왕이라는 용어는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는 거다. 내가 안 쓰는 건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의 이야기는 장황한데, 하나만 말씀 드리겠다. 심환지와의 관계인데, 정조가 떠나자마자 남인 사냥이 시작된다. 1800~1801년, 많은 사람이 죽고 귀양을 간다. 2년 간 모든 옥사를 심환지가 주도했다. 다른 기록에는 심환지는 선왕이 떠나던 당일로, 선왕을 배신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다른 기록에선 심환지의 죄상이 많은데, 역적 의사를 어의로 만든 것이 가장 큰 죄라고 적혀있다. 정조가 죽자마자 모든 정책을 뒤엎은 많은 기록이 있다.
강단사학과 관련해서는, 영조와 정조 무렵에, ‘백학파’라는 파가 형성됐다. 지금의 파고다공원 부근에 박지원 등 서자들이 모여 학파를 이룬 건데, 강단이냐 아니냐는 역사학을 하는 입장에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양주시 초청강연을 갔을 때, 어머니들이 많기에 이런 얘기를 했다. 남양주가 낳은 최고의 인물이 다산 정약용인데, 그처럼 살라고 하면 동의할 사람 없을 거라고. 귀양 가고 그러잖나. 그런 게 역사의 음양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이병도 박사 개인에 대해선 감정이 없다. 단, 우리나라의 문제점이 있다. 뭐냐면 40여년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면 해방이 된 뒤 과거 일본 통치에 대해 재검토했어야 한다. 일본 통치가 남긴 국어학, 언어학, 역사학적인 문제를 재검토해서, 일본 사람이 한 것이 100% 다 나쁘진 않지만, 나쁜 것을 극복했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조선총독부는 사라졌지만,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사관과 역사이론이 살아남았다. 만약 노비가 아닌데, 노비의 자식이라고 했으면 바로 잡아야 하지 않느냐. 우리나라는 이걸 바로잡자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든 나라다.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오고. 핵심은 두 가지다. 왜 노론 비판하느냐. 왜 일제 식민사관 비판하느냐. 이병도 박사는 내가 생각하기로, 단 한 번도 일제 식민사관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은 분이다.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거다. 분명 이병도 박사의 학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학설을 말하면 넌 죽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내 학설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하면 누가 뭐라고 하나. 나도 어떻게 다 알겠나. 그런데 넌 왜 다른 학설을 말하느냐고 공격한다. 이건 도그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선 타협하긴 어렵다.”
이병도 박사 사관이 왜 하나의 사관이 아닌, 절대적 가치를 부여받았는지 궁금하다. 이병도 박사가 조선사편수회 활동을 한 것으로 아는데, 친일인명사전에 왜 없나.
“(친일인명사전에) 처음에 없었다가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병도 학설이 왜 도그마가 됐냐면, 해방이후 곧 분단이 되고 냉전체제가 수립되면서 사회경제 사학자들이 월북하거나 역사학자들이 잡혀갔다. 불가피하게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사람을 쓰게 됐는데, 그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했다. 그들이 교원양성소를 통해서 주요 대학의 역사학과에서 식민사관을 전파하면서 일본 식민사학의 구도가 전파된 거지. 예를 들어, 나와 비슷한 또래는 한사군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이순신, 을지문덕 등 긍정적인 부분부터 배우고 나이 들어서 비판적인 부분을 배워도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사군을 줄기차게 가르쳤다. 나는 이런 구조의 문제점에 대해 말한 거다.”
나는 평범한 시민인데, 송시열과 관련해 왜곡됐음이 다른 기록이나 가문에서 발견됨에도, 지난 세월을 고치려는 사학자가 덜 있는 게 실망스럽다. 이병도 박사가 옳든 아니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건 간에, 앞을 두고 나아가는 것이 사학의 근간인데, 그걸 못하는 것이 무슨 사학자냐.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가 앞으로 해야 할 과제 같은데.
“강연을 다녀보면 옛날과 많이 다르다. 3년 전과 비교해도 다르다. 또 한 편에선 교류가 없었는데도, 나와 같은 역사관을 지닌 분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을 발견하고 힘이 된다. 역사학과 외의 다른 과에서는 상당히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더라. 살아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여러분과 같은 분들이 있어서 제대로 된 역사학자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 혼자 할 것이 아니고 같이 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화냥녀라는 개념이, 평안도에서 청나라의 노략질로 끌려 간 여성들이 돌아오면 그리 불렀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지.
“우리나라 남자들이 나라를 못 지켜서 많은 여자들이 끌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는데, 상당히 사례가 많았다. 그 분들은 잘못이 없음에도 그렇게 매도당했다. 청나라 때도 궁녀로 가거나 청나라 섭정왕의 의녀로 가는 등 역사엔 다양한 사례가 있다. 그 주제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다시 말씀 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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