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TV를 통해서도 우리와 다른 다양한 문명과 사회를 접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인류가 처음 자신의 행동반경을 넘어서서 타 문명과 접촉하던 시기에는 모든 것이 놀라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가죽 갑옷에 작은 활로 유럽을 평정한 몽골과의 조우가 유럽인에게 그러했을 것이고, 황금을 찾아온 스페인 탐험대를 마주했던 남아메리카 주민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 ‘다름’은 세계사에서 결국 ‘차별’로 변화하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아 왔습니다. 결국 ‘승리’한 서구 문명은 지구 전체의 보편화된 양식으로 자리 잡았고, ‘차이’는 선진과 미개를 낳았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미개함을 개화한다는 명분으로 식민지 정책을 추진했고, 유럽 확장기에 해외로 나간 이들은 주로 종교적인 목적을 중심으로 한 ‘계몽’ 차원의 의도를 강조했습니다.
그렇던 세계는 어느 샌가부터 서서히 서구 문명의 대척점에 있는 문명에 대한 시선을 바꿉니다. 분명 미개했고 계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문명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라다크인의 생활양식을 다루며 오히려 서구를 비판했던 『오래된 미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서적이었고, 공중파에서 접하는 많은 다큐멘터리들이 세계 문명 구석구석을 다루는 시각은 더 이상 동정과 신기함이 아닙니다.
그 시선의 변화가 시작하는 지점을 많은 이들이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로 꼽습니다. 한 인류학자의 자서전 같은 여행기 한 권은 여행기에 머무르지 않고 문명사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성찰과, 그로부터 끌어내는 문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현대의 사고에 큰 전환을 이룬 책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슬픈 열대』는 저자 레비 스트로스가 1937년부터 38년까지 브라질 내륙의 원주민 부족을 방문하여 보고 들은 점을 중심으로 풀어낸 민족지적 성격이 강한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단순히 민족지나 관찰기록에 머물지 않는데, 레비-스트로스의 회고와 항해일지, 2차대전 당시 유태계였던 저자의 피난담, 인류학자가 된 계기 등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싣고 있어, 자서전과 여행기, 수필, 민족지, 사회학서 등 다채로운 역할을 하는 멀티 플레이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재미있게도 이처럼 다채로운 주제들은 저자의 생각이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저자가 중심을 두는 하나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느낌을 줍니다. 여러모로 20세기의 격변기였던 1940년대를 살아가는 한 학자로서 그가 사조 전체에 걸쳐 사고하는 흐름들은 각각의 분야와 장소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근간이 동일하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조주의라는 뒷부분에 더 이야기할 주제에 앞서 바로 이 흐름, 즉 사조라는 부문에서 『슬픈 열대』는 사실상 교양 도서 필독 목록의 최상위에 위치해도 문제가 없을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의 흐름과 방식을 드러내는 데 있어 이만큼 완벽한 책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생각을 따라 살아갑니다. 산업혁명 시대는 단순히 경제양식에 머무르지 않고 효율과 단순화의 외부 효과로서 추상미술과 모더니즘 양식을 이끌어 냈고, 신 중심의 사고를 가졌던 이집트는 사람의 몸을 정면에서 보는 형태로만 인식했습니다. 모두 당대에 진리이자 법칙이었지만, 시대가 지나면 또 달라지는, 그러면서도 그 시대에는 모든 것에 통용되는 흐름들이 존재했습니다.
『슬픈 열대』가 보여주는 서술도 그와 동일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연구와 생활을 동떨어뜨려 놓지 않고, 수필 같은 흐름 속에서 연구와 사고, 동시대를 살아간 자신의 삶을 모두 같은 위상에 둡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른 저작물의 방식과 달리 저자의 삶 자체가 녹아들어 간 사고를 읽을 수 있으며, 그 덕에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 즉 책의 주제에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설 수 있는 맥락과 배경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해서 책이 던져주는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슬픈 열대』는 한 서구인, 그것도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닌 대학교수라는 연구직의 전문 지식인이 비서구, 그것도 특히 문명화의 세례를 거의 받지 못했다시피 한 브라질 내륙의 오지 부족 네 곳을 바라보면서 주장하는 시각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슬픈 열대』는 서구 문명이 절대 완성형의 진리가 아니며, 기존에 서구가, 그리고 서구화된 문명 집단이 이른바 미개 집단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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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구 문명과 부족민 문명의 이러한 위상 변화를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설명해 나갑니다. 구조주의란 하나의 사건이나 사물을 그 대상이 보유한 고유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관계 맺고 있는 타자, 주변, 환경 등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위치했는지가 대상을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접근하는 사조의 일종입니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부터 그 시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저 푸른 하늘을 가리켜 ‘하늘’이라는 두 음절의 언어로 호명하는 것이 목소리 ‘하늘’과 실제 ‘하늘’ 간의 필연성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cielo라고 하고, 누군가는 tien이라 하고, 누군가는 sky라고 하니까요. 다만 대상과 대상을 상징하는 음가는 특정 환경, 즉 문명이나 언어권에서만 유효하며, 그 연관성은 언어가 관련된 전체 사회와 체계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구조주의적 관점을 인류학으로 옮겨 오면서 인간 사회 인식의 새로운 입장을 보여 줍니다. 실제 그가 보여준 사유를 따라가 보면 좀 더 명확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 부족들을 관찰하면서 씨족 사회를 구성하는 근간을 만드는 한 제도를 발견합니다. 바로 ‘근친상간’입니다. 근친상간은 이미 그 풍속이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대단한 의미가 아니지만, 저자는 이 근친상간이라는 터부야말로 한 사회와 체계를 만드는 기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가족’을 규정짓기 때문입니다.
근친상간은 유전적으로 위태로운 후손을 만드는 요소이고, 이를 체감으로 확인한 부족은 존속을 위해 근친상간을 터부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 가족이 탄생합니다. 근친을 막기 위해서는 ‘어디까지가 근친인가?’를 규정해야 하고, 이 때 비로소 아버지, 어머니, 동생, 누나, 형, 외삼촌, 할머니가 탄생합니다. 하나의 터부를 통해 인류는 사회체계를 규정지은 것이며, 이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동일하게 발생하는 지점들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우리가 미개하다고 여기는 민족들이 보여주는 ‘미개한 행위’를 다시 한번 들여다봅니다. 단순히 그들이 미개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사회 체계 내에서 가장 납득할 수 있고 만족할 만한 방식이었을 뿐, 그것이 수준이 떨어지는 행위가 아님을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식인 풍습입니다. 식인 풍습이 없는 문명에서 식인은 경악 그 자체입니다. 죽은 자에 대한 매장, 화장이 문명의 보편의식이 된 우리 입장과 달리, 식인 풍습이 있는 민족은 조금 다른 장례 의식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죽은 이의 영혼이 무덤에서 편히 쉰다고 생각하는 체계에선 매장이 당연할 것이고, 육신을 태워 영혼을 승천시키는 문명에선 화장이 자연스럽겠습니다.
식인 풍습은 조상의 영혼을 자신의 몸 안에 넣음으로써 그 힘과 영혼을 물려받는다고 생각하는 환경에서, 또는 적이나 위험인물의 육체를 먹어치워 그 선악을 중화시키고자 행동하는 환경에서 발생합니다. 다만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 체계 내에서 자연스러운 행위가 관습이 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일관된 관점을 통해 브라질 부족사회를 유심히 관찰합니다. 그들의 가족양식, 전쟁, 축제와 교환 등에서 그는 체계가 가지고 있는 의미 안에서 완벽히 일치하는 새로운 문명의 양태를 ?게 되고, 그것이 서구 문명으로부터 비난받을 소지가 없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아니, 사실 어떤 의미에서라면 그들이 보는 서구 문명이란 어처구니없는 입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지은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둬 놓다니, 정의롭지도 못할뿐더러 악이 정화되지도 않잖습니까.
일요일 아침에 만나는 교육방송 세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처럼 『슬픈 열대』는 관찰자 입장에서 미지의 세계에 접근해 나가는 담담함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슬픈 열대』를 통해 저자는 이제는 대세가 된 서구 문명이 과연 완벽한 것인지를 되물으며, 각각의 닫힌 세계들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쌓아 온 노하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방인 문명인 서구와 서구화 사회는 새로운 변화의 방향을 모색합니다.
물론 아직도 구조주의 인류학에 대한 논쟁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유명한 사르트르?레비스트로스 논쟁은 구조주의가 가질 수 있는 함정을 잘 보여 주는데, 인류 역사가 진보한다는 명제 자체를 흔들어 놓는 점 등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문화와 문명 간이 가진 차이를 이해하는 것도, 인류가 끊임없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발전하고자 한다는 것도 어느 하나 쉽게 버리기 싫은 가치니까요.
얼마 전 레비-스트로스의 영면 소식을 들으면서 『슬픈 열대』를 이 코너에서 안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교양서적이라면 첫손에 꼽아야 할 책이 왜 이제야 눈에 들어왔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인류학자의 수필이라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주제인데, 그가 보여주는 관찰력과 문장력, 그리고 삶과 학문을 통째로 다루는 방식이야말로 인문학 고전에 처음 접근해 보고자 하는 이들, 특히 최근 수능이 끝나 딱히 읽을 게 없는 고3 여러분께는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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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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