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래를 준비하란다. 준비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단다. 노후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란다. 지금보다 시간이 덜 곰삭았던 한때, 이 말들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살았었다.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현재의 ‘자기 창조적 불안’을 품고, 그 방법의 하나로 적금을 붓고 펀드도 했다. 그래야만 나는 이 엄혹한 시대의 ‘당당한 지상의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을 거라는 ‘환상’을 가졌다. 불안에 쫓긴 나는 오지도 않은 공포에 무릎을 꿇었다. 저렴한 무릎으로 스스로를 하향 조정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도 ‘지구촌 불안 동지’였다. 쉽게 말해, 삽질을 했다는 얘기다. 불안은 마음의 ‘부란(腐爛)’이었다. 썩고 문드러진다는 그런 의미. 그러다가 가까스로 조금씩 더디지만 미래의 불안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다.
#2. 올여름 가장 주목받는 공포 영화 중의 한 편,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지난 10여 년간 만들어진 호러 영화 중 가장 괴로운, 두려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그러나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평도 있다.)의 감독 파스칼 로지에의 말. “공포 영화는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조건들이 얼마나 흉측하고 괴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거짓 없이 드러낸다. (…) 나는 세상이 너무나 X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분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내 자신을 배반하는 행위로 본다. 그건 정말 역겨운 일이다.” 오우~ 세상에 대한 명징하고 분명한 인식.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에 대한 이 말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오늘의 이 세상을 참을 수가 없다. 경제경영이 학문의 제왕 노릇을 하고, 시장이 권력의 자리를 점령하고, 베스트셀러 대다수는 자기계발 지침서이고, 재테크 요령이 일상적 관심사가 되고, 연예인 사생활이 국민적 화제로 들먹여지고, 서울대학교 축제에는 원더걸스가 초청되어 난장판 사고가 벌어지고, 교회에서는 헌금액이 적은 사람을 조롱하는 ‘천 원 송’이 불리고, 이라크, 이란, 북한 등의 나라를 ‘악’으로 규정한 미국 대통령의 주장을 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p.164)
뒷얘기는 시인이자 문화평론가 김갑수 선생의 말이다. 그의 저작 『지구 위의 작업실』에 나온. 핸드드립을 하고 있는 책 표지, ‘지구 위의 작업실’이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 평소 그의 글에 대한 호감, 끌렸다. 끌리면 가라! 마침 궁금이 증폭됐던 찰나였다. 앞서 만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의 저자 김정운 교수(채널예스 인터뷰 <감탄하지 않는 자, 그대는 유죄!>)는 ‘지구 위의 작업실’이 참 좋다며, 내 호기심에 바람을 불어넣었던 참이었다. 더구나 그곳에서 로스팅도 하고, 커피가 있다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할쏜가. 아싸라비야~
줄라이홀, 발 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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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몇몇 독자들과 김갑수 선생의 작업실을 찾았다. 이름 하여, 줄라이홀. 김갑수 선생은 마포의 한 건물 지하에 동굴을 파고 산다. 이곳은 정말 동굴이다. 햇빛과 소리와 날씨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실제 면적은 37평이라는데, 공간은 더 돼 보인다. 들어가는 순간 “우와~” 하는 탄성이 절로. 격하게 좋다.
‘줄라이홀’의 이름? 얼터너티브 록 음악의 원조격인 거물밴드 R.E.M.의 이름 짓기와 비슷했단다(R.E.M. 멤버들이 밴드 이름을 지으려고 사전을 휘리릭 펼쳐 가장 먼저 짚인 글자가 ‘급속안구운동’(Rapid Eye Movement)이었고, 그것을 밴드 이름으로 정했다). 친구가 한 무리를 이끌고 작업실을 찾아왔는데, 손님 가운데 줄라이라고 불리는 미모의 외국회사 임원이 있었고, 이름은 그렇게 정해졌다. “황당한 건가, 멋진 건가, 혹은 둘 다인가.”(p.44)
아울러 줄라이홀이 지하에 있는 이유. “작업실은 반드시 캄캄한 지하에 있어야 한다. 무슨 작업을 하든 마찬가지다. 국어사전적으로 ‘작업’이란 뭘 새로 만드는 일일 텐데, 그러자면 기존의 것들과 결별할 수 있어야 한다. 여자에게 작업 걸 때 상투적 언행으로는 씨알머리가 먹히지 않는 것처럼, 작업실이 작업스러우려면 뭔가 달라야 한다.”(p.32) 그렇게 작업실이 지하로 피신해 들어가야 할 이유에 대해 김 선생은 날씨, 소리, 햇살 등 대략 마흔아홉 가지쯤 된단다. 마흔아홉.
김 선생은 말하자면, 커피 긱(Geek)이고, 오디오파일(애호가)이며, 호모 히스테리쿠스. 줄라이홀은 “커피를 마시는 곳”이자, “오디오 놀음을 하는 곳”이며, “음악을 듣는 곳”이다. 김 선생과 줄라이홀은 이 삼각편대로 존재한다. 김 선생은 그러니까 줄라이홀(앞으로 김 선생을 ‘줄라이홀’로 칭한다).
마침 에스프레소 기계가 약간 애를 먹였지만, 막 고치고 커피 한 잔과 약간의 다과가 우리를 반긴다. 줄라이홀이 볶아서 추출한 커피. 직접 커피콩을 볶아서 내린 커피의 향미가 나를 안성기로 만든다. ‘음, 그래 이 맛이야.’ “7월 초에 아는 사람들을 모아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초상집이더라. 초상집이 그렇지 않나. 모여서 죽은 한 사람만 얘기하는. 그러니 편하게 놀다 가라. 음악도 준비돼 있고, 커피도 있다.”
이육사는 ‘내 고장 칠 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 했지만, 줄라이홀은 아마 ‘내 작업실 줄라이홀 칠 월은 커피와 음악이 익어가는 시절’이라 하지 않을까.
줄라이홀에 흠뻑 젖은 우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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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자기소개’를 통해 우리는 그렇게 줄라이홀과 한 몸이 된다. 보험사에 근무한다는, 아는 선배를 따라 줄라이홀에 발을 디딘 이는 다른 세계 같다는 말로 줄라이홀 방문 소회를 밝힌다. 마음속 열망이지만 쉽지 않음을 끄집어내면서. 이에 줄라이홀 왈. “이런 것 저질러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 이른바 일반적이 아닌 다른 길을 가도 괜찮다. 일단 저질러라. 죽는 사람 없다. 나도 예전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처참한 날이 많았다. 일단 (물건을) 들여다 놓고 시간을 보내니 해결이 되더라. (웃음) 그렇다고 도둑질한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다. 대신 수입을 연출하기 위해 기를 쓰게 되더라. 할 수 있는 게 원고 쓰는 것이었고, 방송 일도 했다. 김치의 역사를 쓴 적도 있다. (웃음)”
그는 이어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첼 카슨의 평전(주. 아마도 『레이첼 카슨 평전 : 시인의 마음으로 자연의 경이를 증언한 과학자』로 추정)을 읽은 얘기를 꺼냈다. “레이첼 카슨은 엄마, 사촌 등 줄줄이 먹여 살리면서 죽을 때까지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 대단한 책이 생계 때문에 씌어진 것이다. 덕분에 나도 위로를 받았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깊이가 있는 것 같아서 『지구 위의 작업실』을 입양했다는 누군가는 “정말 재밌게 읽었다. 하룻밤 새 낄낄대며 봤다. 많이 꿀꿀하게 지내던 때였는데, 책을 읽으며 유쾌해졌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강남으로 이사했는데, 정말 주변에서 돈 얘기 밖에 안 해서 혼란스럽고 꿀꿀했다는 얘기.
줄라이홀이 대화를 받아 준다. 삶의 통속성과 순수 사이의 줄타기에 대한 생각. “통속함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통속화 과정에 적응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더 통속적으로 나가는 것도 있다.”
이와 함께 세 가지 세상의 비속성에 대한 혐오. 하나, “부자 되세요.”라는 말. 돈에 대한 지나친 열광이 우웩. 둘, 건강과 장수. 건강한 것은 좋지만 좀비처럼 오래 살고,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것은 뜨악. 셋, 성공에 대한 과도한 펌프질이 컥. 그는 15년 동안 방송 일을 하면서 대부분 잘난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성공이 개인의 행복과 그다지 상관없음”을 알았단다. 되레 “더 나은 성공이 보여 괴로울 뿐이다. 성공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면 비참해지더라.” 그리고선 친구인 한비야의 사례를 든다. “두뇌 구조에 ‘성공해야지.’ 하는 게 없다. 그는 자기 열광 속에 빠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늙으면 죽어야 된다. 대화하자고 해 놓고선 연설하고 있잖나. (웃음)”
줄라이홀의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를 읽었고, 라디오방송이 무척 좋아서 사인을 받고 싶고, 사적 공간을 훔쳐보고 싶어서 찾아 왔다는 독자의 한마디에 팡 터졌다. “텔레비전보다 사진을 잘 안 받으시네요.”
“5~6년 전만 해도 가시처럼 말랐는데, 최근 1년여 동안 임신 5개월처럼 살이 붙었다. (웃음) 어릴 적에 굉장히 험한 곳에서 자랐지만 그게 나의 전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멸시를 당할 때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네가 알아?’라며 자존감과 이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자기 연민으로 세월을 견뎠다. 그런데 요즘은 좀 슬프다. 왜 이렇게 늙었나, 싶어서.”
우리의 자부심, 자존감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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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보험업에 종사하는 다른 이의 궁금함. “부인에게 안 쫓겨나고 사는지.” 줄라이홀의 대답. “처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줄라이홀 때문에) 비아냥을 좀 사기도 한다. (사는 형편이) 어렵지 않아서. 처가 의사다. 무지막지 어려운 시절도 있었는데, 젊을 때 연애를 한번 잘못해서 13~14년 망가진 적이 있다. 그때 47~48킬로그램 나갔는데, 병원에 갔다가 주치의와 결혼했다. (웃음)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은 꼬시기 쉽다. 그런데 함께 살다 보니 거치적거리는 게 있어서 (집을) 나왔다. 부부라고 해서 온 일상을 같이 흘러가야 하는 건 아니다. 포기할 건 포기하는 게 좋다는 게 처와 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처는 살림을 전혀 안 하는 사람이고, 나는 처한테 아무 것도, 보살핌을 받은 것도 없다. 이해받는 게 아니고, 필사적으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처와는 사이가 좋다. 매일 전화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난다.”
그러니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다시 되물어야 한다. 삶의 방식은 하나가 아니므로. “‘왜 부부는 언제나 붙어 지내야만 하나요?’ 이런 반문이 별 문제 없는 부부의 간헐적 동거, 선택적 별거에 대한 변이 될까? 되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는 직장에서 돌아온 시간의 전부를 책 읽는 데만 쓴다. 구경시켜 주고 싶을 만큼 전투적이다. (…) 결혼하고 3년쯤 별도 공간 없이 ‘가정’에서 음악을 들어 봤다. 그건, 피차간에, 그러니까, 고문이었다. 내 방식은 스위트홈에 어울리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을 꼭 해야만 하는 성정을 똑같이 보유한 부부. 타협책은 집 밖에 결혼 전과 비슷한 공간을 따로 장만하는 거였다. 서로 그리워하는 부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설의법적 명제. ‘왜 부부는 언제나 붙어 지내야만 하나요?’”(pp.194~195)
세계를 넓혀 가길 원하는 취업 1년차 프로그래머와 이곳에 와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는 여성들에게 줄라이홀은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준다. “젊을 때 일생을 관철할 관심사를 찾는 것이 좋다. 내일 김어준과 대담을 하는데, 『건투를 빈다』를 정말 재밌게 읽었다. 책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자존감’이더라. 자기가 자기를 존중하라는. 하고 싶은 것에 용기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 내 경우는 허허실실이었다. 경쟁을 해서 이겨본 적이 없다. 대학 들어간 것도 기적이다. 반에서 오십 몇 등을 했으니까. 남들과 겨루는 게 안 된다. (웃음) 그래서 비경쟁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된 건가. 좋아하는 건 경쟁하는 게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줄라이홀이 중학교 때부터 관심을 가진 세 가지. 문학, 음악, 여자. 물론 세 번째는 마음대로 안 된단다. 암, 그렇고 말고. “뭐라 설명하긴 어려운데, 하다 보면, 살다 보면 살아진다. ‘네가 세상에 맞출 수 없으면, 세상이 너를 맞추도록 해라.’는 말도 있잖나. 자기에 빠져서 살다 보면 살 길이 열린다. 거기서 중요한 것이 자존감이다. 자기 열망이 가 닿는 곳에 길이 있다. 길은 자기가 갔는데, 딱 뒤에 있는 거다. 자기 식대로 갔는데, 뒤돌아보니 자기 자취가 있는 곳이 길이다.”
무한 경쟁이 미덕처럼 오도되는 시대에 비경쟁형 인간으로 살아가기. 야망 없음을 자랑으로 여기기. 그럼에도 아무 것도 없음이 아닌 자신만의 것을 채우기.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떤 위치로 올라가거나 무엇을 획득할 수 있었다면 그 역시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악을 들어야 했다. 음악에 포개어진 삶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획득하거나 무엇에 올라서는 것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팔자려니 해야 했다. 그러나 깨달았다. 하루하루 음악을 듣는 일이 삶이 되면 되는 거잖아! 먹고사는 일이며 모든 관계를 도구나 방편으로 삼으면 되잖아! 그 무엇의 잣대를 ‘이쪽’이 아니라 ‘저쪽’ 세계의 것으로 바꾸면 되는 것을. 나는 아무 것도 못된 것이 아니었다. 못 획득한 것도 아니었고, 못 올라선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음악을 듣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조건들을 많이 가졌다. 뒤늦은 깨달음이다.”(p.196)
그렇다. 나도 아무 것도 못된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말하자면, 커피를 만드는 사람, 커피를 음미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 말에 격하게 동의. “에스프레소는 멋으로 맛을 만드는 일이다.”(p.81)
아울러 길의 묘사. “가 보지 못한 길이란 없다. 길이란 걸어가야 길인 것이니 길을 걷지 않은, 걸어 보지 못한 사람이 많은 따름이다. 이것저것 기웃거린 삶은 걸어간 것이 아니고 뱅뱅 제자리 맴돌이를 한 것뿐이다. 다만 도정의 변주는 있을 수 있다. 음악이 들리지 않을 때, 건하고 곤하고 피폐할 때 변주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음악에서는 오디오질이다.”(p.226)
진짜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생산성과 효용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불러온 지금의 엄혹한 세계. “자기 추구에 있어 자아와 끝없이 대면하는 상황이 필요하다. 세상에 휩쓸려 가면 편한 것도 있지만, 뒤돌아보면 뭐하는 건가 싶은 때가 있다. 사람들의 관계를 ‘인맥’으로 표현하는 것에 나는 분노한다. 필요에 의한 그런 것이잖나.”
역시나 향유형 인간다운 멘트. “인간의 종류를 생산형과 향유형으로 나눈다면, 컴퓨터 쪽과 바텐더 쪽으로 나눈다면 아, 나는 단연 향유형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 옷치장이며 얼굴 화장에 필요 이상으로 열중하는 여성들이 항변 삼아 하는 말이 있다. ‘남한테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만족 때문에 이러는 거라구요!’ 그 말에 공감을 표한다. 남 보기에 좋으라고 개인 작업실 안에 카페를 차리지는 못한다. 고적한 실내에서 바텐더가 된 기분을 맛보려고 일을 벌였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요즘은 컴퓨터 의자나 음악 감상용 소파보다는 바텐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p.132)
줄라이홀에게 건넨다, “You're So Ob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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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분위기는 익어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가 있고 교감이 있는 풍경. 나는 줄라이홀에서 세상, 대한민국 따위는 잊었다. 아니, 커피 향과 음악만으로 충분한 시간. 그 한때 ‘시인’이었으나 이젠 염치가 없어서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달지 못한다는 줄라이홀.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순정이 하나씩 있다면, 시가 자신의 순정이라고 말하는 줄라이홀. 검색을 하면 4명이 나오는 ‘김갑수’ 때문에 명함에 시인이자 문화평론가 타이틀을 단다는 줄라이홀. 언젠가 제주도 서귀포에 가서 살겠다고 말하는 줄라이홀. 그곳에선 어떤 작업실이 들어설까.
“지하 작업실 줄라이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대한민국은 사라진다. 그러기로 나는 결심한다. 그 안에는 차라리 떠돌이, 건달, 외돌토리, 허풍선이, 날라리…… 소속 없고 사사롭고 아직 콱 붙들리지 않은 영혼의 해방구가 열린다. 돌 틈에서 태어난 천고자의 서정이 연무를 피워 낸다. 그래, 그런 착각이라도 하련다.”(p.129)
브람스의 현악 6중주가 흐르고 하이든의 음악도 흘러간다. 최근 줄라이홀의 노래라는 미선이의 「Sam」과 이른바 ‘이명박 송’으로 일컬어지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아무 것도 없잖어」 등등도 함께다. 나는 그 노래(들)에 몸을 맡겼다. “잘 비워낸 한 생애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나희덕 「국밥 한 그릇」) 나도 줄라이홀을 꿈꾼다. 그것이 자기파괴적 욕망이라 할지라도. “모르핀, 코카인, 필로폰까지는 몰라도 알코올, 니코틴, 카페인의 자유쯤은 누리고 싶다. 건강과 장수라는 욕심 사나운 현대병에 맞서 우아하게 자기를 파괴하는 권리 추구이다. (…) 영혼의 상처 없이 문학은 가능하지 않다. 말하자면 커피는 한 잔의 문학이다.”(p.78)
당신도 작업실을 갖고 싶다고? 지하에서 생을 감식하고 싶다고? 그럼 이 동굴인 테스트에 응해 보라. 당신의 적성을 묻는다. “바슐라르의 쾌락과 바르트의 고뇌가 만나는 장소가 동굴 속이다. 동굴 속 동굴인의 기질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다. 동굴인에게 쾌락과 고뇌는 같은 종류의 호르몬으로 생성된다. (…) 동굴인이 나는 아프다, 라고 말할 때의 숨은 표정을 잘 관찰해 보라. 거기 서린 어떤 쾌감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도 동굴인의 하나일 수 있다.”(pp.31~32)
어쨌든 나는 줄라이홀 혹은 김갑수 선생 덕분에 사고 싶어 리스트에 넣어 놨던 『커피견문록』을 바로 질렀다. “세계 각지를 주유하며 ‘페송 페송’류의 문화 체험을 다채롭게 펼쳐 나가고 있을 따름. 하지만 그 같은 커피 체험 속에 문명과 역사와 인간학이 담긴다. 마시는 한잔 속에 그렇게 깊은 뜻이, 하는 가운데 맛 자체의 깊이와 넓이가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p.65)라고 설명했던 그 책. 드디어 내 품에 안겼다. 좋다. 흐흐.
나는 무엇보다 얼마 전 만난, 죽이 잘 맞을 것 같은 한 친구를 데리고 줄라이홀을 다시 찾고 싶다. 우리나라에선 그닥 알려지지 않은 멕시코 치아파스 커피 원두를 들고, 줄라이홀의 ‘파에마 S1’이나 이소막의 헥사곤이 추출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리하여, 줄라이홀에게 전하는 나의 이 메시지.
“You're so Obama!”(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검색해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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