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TV 채널을 돌리다가 영국의 유명한 요리사 니겔라 로슨이 진행하는 요리 프로그램을 봤는데, 그녀가 창가에 있는 화분에서 바로 허브 잎을 따다가 음식에 뿌리는 장면 때문이었다. 요리하는 여자가 워낙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그 장면엔 뭔가 자연 친화적 삶에 대한 로망을 건드리는 특별한 요소가 있었던 것 같다.
유명인 따라잡는 일엔 관심이 없는 편인데, 웬일인지 나도 요리에 허브 잎을 넣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래봐야 양파 맛 베이글에 발라 먹을 크림치즈에 파슬리 가루를 뿌린다거나, 감자를 깍둑 썰어 올리브유와 소금을 넣고 볶다가 말린 바질을 뿌려 마무리하는 정도이다.
허브에 조금 익숙해지니, 예전에는 별로 즐기지 않던 실란트로 향도 괜스레 좋아졌다. 실란트로는 베트남 쌀국수에 넣어 먹는, 우리나라로 치면 깻잎 같기도 하고 서양으로 치면 민트 같기도 한 허브인데, 향이 강해서 우리나라 요리에는 그다지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그 향을 맡으면 뭐랄까, 날것 그대로의 자연을 흡입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매일 인위적인 맛에 절어 사는 사람들이라면 특히 자연을 한 방 얻어맞는 듯 신선한 충격을 받는 느낌이 들 것이다.
향이 진한 허브에는 약효가 있는 것이 많다. 나는 입이 개운해지는 민트 티를 좋아하는데, 민트 향은 집중력을 높여주고, 두통을 사라지게 해준다. 치유 효과가 거의 마술에 가까워서, 예로부터 마법사들이 구하러 다녔다고 하는 허브가 있는데, 바로 맨드레이크(mandrakes)라는 식물이다.
19세기에 이 식물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던 영국의 화가가 있다. 식물과 약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전업 화가라고 부르기엔 이름이 좀 생소한 로버트 베이트먼(Robert Bateman, 1842~1922)이다. 베이트먼은 맨드레이크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림으로 남겨 놓기까지 했다. 바로 「맨드레이크를 뽑는 세 여인 Three Women Plucking Mandrake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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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여자들이 직접 손을 대지 않고 멀찍이 줄을 당겨 맨드레이크를 뽑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식물은 잘못 건들면 뽑는 이가 죽게 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 그림 속 교수대 밑 맨드레이크는 사형수가 목을 매 죽기 직전에 쏟아 낸 정액이 땅에 떨어지면, 그 자리에 맨드레이크가 난다는 전설을 암시한다.
그 이야기가 진짜라면, 맨드레이크는 거의 존재 불가능한 식물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죽음 도중에 불가사의하게 생명력을 분출했으니, 그 순간에 태어난 식물이 죽은 사람도 살려 내는 특효가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거짓말 같은 식물이 다른 허브들과 나란히 리스트에 들어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자연의 향긋한 기적을 삶 속에 들여놓는 허브 요리 외에 또 한 가지 방법은, 포푸리(potpourri)를 곳곳에 담아 놓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 시대의 영국 분위기가 흠씬 풍기는 그림 한 점을 소개한다. 조지 레슬리(George Dunlop Leslie, 1835~1921)의 「포푸리 Potpourri」를 보면, 말린 꽃잎으로 포푸리를 만드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전원주택에서 지내는 잔잔한 일상의 느낌이 포푸리 향을 통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그것은 도시적 느낌의 ‘샤넬 No. 5’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온화하고 은은한 꽃향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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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푸리가 싸구려 향수 냄새 같은 줄로만 알았었는데,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선물 받은 괜찮은 포푸리 덕택에 제대로 그 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새콤달콤한 그 향기로 인해 어떤 때는 전채 요리를 먹은 듯 입맛이 도는 듯했고, 또 어떤 때는 후식을 먹은 듯 흡족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치 산소를 생산해 내는 듯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연에서 우러나오는 향기란, 굳이 맨드레이크 같은 괴기한 식물이 아닐지라도 생명의 에너지 그 자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사실 자연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그 사람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다. 상대방이 좋아지면, 그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냄새를 본능적으로 좋은 냄새로 기억한다. 후각은 이끌림에 대한 무조건적 혹은 조건적 반사를 일으키게 하는 아주 즉각적이고 솔직한 감각 기제다. ‘네 냄새가 역겨워.’는 네가 싫다는 말보다 몇 백 배 더 강한 표현이다. 냄새는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에 냄새를 부정하는 것은 그 사람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향기와 자기 존재감을 동일시했던 소설이 있다. 향기를 취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내용도, 소설가도 모두 독특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고 매스컴에 노출되기를 극구 피하는 독일의 은둔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 1949~)가 1985년에 발표한 『향수』다. 아마도 내용의 90%가 각양각색의 냄새에 대한 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향수』는 냄새라는 분야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18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벌써 시작부터가 쾨쾨한 냄새가 난다. 주인공은 음습하고 악취 나는 생선 좌판대 밑에서 매독에 걸린 젊은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나 생선 내장과 함께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지만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남는다. 개처럼 예민한 후각을 타고난 그는 어릴 적부터 냄새로 세상을 확인하고 냄새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어느 날, 이 사내는 아주 기분 좋은 향기에 이끌려 걷다가 곧 그 향기의 발원지인 한 처녀를 발견해 낸다. 그는 이상한 욕정에 사로잡히고, 그녀가 지닌 모든 향기를 자신의 것으로 빨아들이고자 결국 그녀를 목 졸라 죽이고 만다. 첫 번째 살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그는 세계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차례차례 시체로 발견되는 스물다섯 명의 소녀.
결국 그는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지만, 그의 처형을 보러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살인마를 우상으로 떠받든다. 그가 소녀들에게서 체취해낸 향수를 뿌려 사람들을 집단 광기에 빠지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보다는 허무함만을 느낀 그는, 어느 날 결심한 듯 온몸에 자신이 만든 향수 전부를 콸콸 쏟아 붓고 기다린다. 그러자 향에 취한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의 육신을 갈기갈기 뜯어 먹어 버리고 말았다.
작가는 무얼 이야기하려고 한 것일까. 모든 냄새를 맡을 수 있으나 정작 자신은 아무 체취도 뿜어내지 못하는 가엾은 사내. 자신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 지상 최고의 향기들을 찾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이끌린 것은 자신의 체취가 아니라, 그가 채집한 남들의 향기였다. 타인에게 아무런 호감도 없으면서, 사실은 인간을 혐오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흔적을 타인에게 남기고 싶었던 자. 그가 향기를 갖게 되는 길은 단 하나,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일 것이다. 사랑만이 자신의 향기를 누군가의 마음속에 새겨 놓는 유일한 길이 아니었을까.
오늘 우리는 어떤 냄새로 살고 있을까. 비누 냄새, 옷에 밴 음식 냄새, 시큼한 땀 냄새, 화장품 냄새, 커피 냄새, 혹은 담배 연기에 전 냄새…… 그 어떤 냄새도 대단하지 않고, 또 영원히 보존될 수도 없겠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그리운 냄새로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있다. 사랑하고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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