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를 사랑한 천재 화가들 - 빈센트 반 고흐
프랑스 남부를 넓게 차지하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연의 혜택을 보란 듯이 뽐내는 곳. 그러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가슴이 채워지지 않아 자신의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무늬를 그리고 영혼을 넣으며 이 아름다운 땅을 그림으로 담아낸 예술가들이 있었다.
200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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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Provence)에 닿는 순간 그림을 닮은 자연, 자연을 닮은 그림이 떠올려진다. 태양은 눈이 부시도록 내 얼굴을 뜨겁게 달구고, 나무들은 자유자재로 흔들리며 가슴속을 뒤흔들어 놓는다. 하늘은 너무나 파랗고 맑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유혹적이고, 은빛 지중해는 세상의 희로애락을 모두 감싸듯 깊고 풍만하다. 신(神)이 내린 그 땅. 프랑스 남부를 넓게 차지하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연의 혜택을 보란 듯이 뽐내는 곳. 그러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가슴이 채워지지 않아 자신의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무늬를 그리고 영혼을 넣으며 이 아름다운 땅을 그림으로 담아낸 예술가들이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천재 화가들이 머물고 사랑하며 아꼈던 프로방스로의 여행, 그것은 살아 있는 그림 속 산책과도 같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아를(Arles), 생 레미(Saint Remy)
아를에 도착하고 나서도 이틀 동안 반 고흐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찾아 나서지 못했다. 9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이곳에 들이닥친 미스트랄(Mistral: 프로방스의 론 강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에 걸쳐 불어대는 바람. 살을 도려낼 듯 찬 기운과 살인적인 강풍이 특징이다)과 먹구름 덕분에 제대로 숨조차 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삼 일째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프로방스 특유의 스카이 블루 하늘이 등장했고, 그것은 마치 전쟁 중의 구호물자처럼 희망의 손길을 보냈다. 그제야 반 고흐라는 인물이 뼈를 깍듯 절절하게 사랑했던 이 도시가 궁금해졌다.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길 옆으로 촘촘히 들어선 잿빛 벽돌 건물들. 한번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제멋대로 발길이 돌려지는 거미줄 같은 미로(迷路). 부서진 성곽과 낡은 담벼락 사이로 예상을 뒤엎는 원색의 창문 덮개와 나무문이 보이고 광장 중앙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내리꽂힌다. 공중에 떠 있는 심연(深淵)처럼 깊고 푸른색의 하늘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칠 대로 지친 파리에서의 생활을 미련 없이 버리고 프랑스 남부행 기차를 잡아탄 서른다섯 살의 반 고흐. 그가 아를 기차역에서 만난 첫 장면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바로 그날에도 태양과 하늘은 저토록 아름다운 자태로 그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자란 그가 화상(畵商)을 하는 동생 테오(Theo)를 찾아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 머물게 되었지만 반 고흐의 감성은 자연적 본성을 따라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인상파에 빠져들고, 최고의 예술적 토론자이자 애증의 친구가 된 폴 고갱을 만났으며, 또 2백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완성한 곳이 바로 파리지만, 프로방스가 반 고흐 마지막 인생에 미친 영향은 그것과 견줄 수도 없다.
1888년, 아를에서의 첫 거주지가 된 ‘옐로 하우스(Yellow House: 집 외관이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어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에 머물며 반 고흐는 좀 더 밝아진 빛과 좀 더 화려해진 색채로 프로방스의 풍경과 자신의 삶을 그려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자그마한 침실 하나, 동네 카페 하나도 그에게는 ‘그리고 싶은 대상’이었고 ‘몰두하고 싶은 연인’이었다. 자신이 살던 「옐로 하우스」 역시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림 속의 ‘노란 집’을 아를에서 직접 볼 수 있는 특혜는 주어지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은 후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반 고흐가 아틀리에로 썼던 ‘빈센트의 방(La Chambre de Vincent)’을 보는 것으로 그에 대한 연민을 채워볼 수는 있다. 허름하고 부서진 벽돌담, 틈새가 벌어진 돌계단, 긴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창문틀. 담벼락 앞에 놓인 이젤 위의 작은 자화상. 지나가는 관광객들이면 누구나 다 그 앞에서 그 포즈를 취하고 기념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나마 요절한 천재 화가의 열정과 삶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렇듯 구원의 안식처로 찾은 아를에서 반 고흐는 눈이 아리도록 부신 태양과 빨려 들어갈 듯 강렬한 하늘을 보며 자신의 감성에 충실한 풍경화와 정물화에 몰두했다. 「해바라기」와 「붉은 포도밭」이 완성됐고 「밤의 카페테라스」(이 그림 속 카페는 ‘카페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아직 아를 시내에 그대로 있다)와 「반 고흐의 침실」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허무했고 더없이 고독했다. 그가 바깥 세상과 소통한 것은 파리의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가 유일했다.
“때때로 너무나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스스로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작업할 때가 있어… 마치 말할 때나 편지 쓸 때 단어들이 거침없이 줄줄 튀어나오듯 붓놀림이 이뤄지고 있는 거지….”
“그게 전부야. 이 밀폐된 방 속에는 닫힌 문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가구를 굵은 선으로 만들어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휴식을 표현해야 하거든. 벽에는 초상화 하나가 걸려 있고 거울 한 개와 수건 그리고 옷 몇 벌뿐이야….”
아를에 온 지 1년도 안 되어 결국 삶의 평화를 찾지 못한 반 고흐는 점점 극도의 신경쇠약과 광기(狂氣) 어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는 1888년 12월 23일, 친구의 초대를 받아 어렵게 아를을 방문한 고갱과 예술적 언쟁을 벌이다가 면도칼을 집어 들어 그를 위협한 후 자신의 왼쪽 귀 아랫부분을 베어내고 만다(화가 난 고갱은 이후 죽는 날까지 다시는 반 고흐를 보지 않았다). 피해망상과 환각 증세까지 보인 반 고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머리카락이 붉은 미친 사람(The Redheaded Madman)’으로 불리며 동네 주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드디어 청원서가 제출되고 경찰은 그의 ‘옐로 하우스’를 폐쇄시키기에 이른다. 수십 년 후 반 고흐라는 이름 하나로 역사적 명소가 된 아를이지만 그 당시에는 ‘천재의 정신적 방황’보다는 ‘미친 사람의 광기’ 쪽에 손을 들어준 셈이다.
깊은 방황에 시달리던 반 고흐가 아를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생 레미의 정신병원인 ‘생 폴 드 모솔레(St-Paul de Mausole)’로 완전히 거취를 옮긴 것은 1889년 5월. 병원 뒤쪽에 넓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가 있고 건물 옆쪽에 긴 산책로가 있는 이곳에서도 반 고흐는 붓을 놓지 않았다. 생 레미의 중심 광장에서 약 1시간쯤 남쪽으로 걸어가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얌전하게 자리 잡은 낡은 회색 빛 벽돌 건물. 대문에 들어설 때부터 마음이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지는 이유를 굳이 반 고흐라는 인물과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아담한 숲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평화로워진다. 굳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소의 ‘정신적 문제 혹은 혼돈 상태’가 있게 마련일 테니. 그렇게 느린 산책 끝에는 낡고 오래된 고딕식 건물이 등장하고 그 속에는 온갖 꽃들이 핀 중앙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ㄷ자형 복도가 펼쳐져 있다. 귀 한쪽이 뭉개져 버린 반 고흐가 어느 가을날 이 복도 벤치 어딘가에 앉아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침나절 해가 솟아오를 때면 포도밭과 삼나무 옆 돌계단에 앉아 또 어떤 영감을 떠올렸을까. 혹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컴컴한 숲 속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외로움에 시달렸을까.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이라는, 세계 미술사에 영원히 남을 걸작은 바로 이곳, 외진 시골의 한 정신병원에서, 소용돌이치는 그의 감성을 대변이라도 하듯 몽환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색감으로 완성되었다. 돈 맥클린이 불러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노래 <빈센트(Vincent)>의 가사는 그 첫머리를 이 작품의 제목으로 시작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Starry starry night). 당신의 팔레트를 파란색과 회색으로 칠하세요. 어느 여름날, 내 영혼의 어둠을 알아차린 두 눈으로 밖을 바라다보세요. 언덕 위에 진 그림자. 나무와 수선화를 스케치하세요. 산들바람과 겨울의 차가운 기운을 느껴 보세요. 그리고 눈처럼 부드러운 대지 위에 색을 입히세요. … 이제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고, 또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얘기를 듣지 않았고 또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마도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겁니다.”
1년 만에 정신병원을 떠나 파리 근교로 옮긴 반 고흐는 1890년 7월, 권총 자살을 한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삶은 10년. 그 짧은 기간 동안 드로잉과 스케치를 포함해 약 2천 점 가량의 그림을 남겼으며 후세에 걸작으로 손꼽히는 대부분의 작품이 아를과 생 레미에서의 2년간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팔린 작품은 단 한 개. 반 고흐는 죽는 날까지 부와 명성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37년의 삶은 음울한 터널일 뿐이었다. 그 터널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환한 빛은 끝내 그의 인생을 비껴갔지만 후세 사람들은 다행히도 이 불운한 화가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의 그림 속 세상은 어둠보다는 밝음이, 우울함보다는 경쾌함이, 절망보다는 희망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아를과 생 레미의 하늘을 힘차게 수놓은 태양과 영롱한 별들처럼….
“인생은, 영원히, 끝도 없이 공허하다…. 그러나 아무리 허무하고 부질없다 하여도, 아무리 죽어 있는 삶일지라도, 온기와 힘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으로부터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빈센트 반 고흐, 1884년 10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아를(Arles), 생 레미(Saint R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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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에 도착하고 나서도 이틀 동안 반 고흐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찾아 나서지 못했다. 9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이곳에 들이닥친 미스트랄(Mistral: 프로방스의 론 강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에 걸쳐 불어대는 바람. 살을 도려낼 듯 찬 기운과 살인적인 강풍이 특징이다)과 먹구름 덕분에 제대로 숨조차 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삼 일째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프로방스 특유의 스카이 블루 하늘이 등장했고, 그것은 마치 전쟁 중의 구호물자처럼 희망의 손길을 보냈다. 그제야 반 고흐라는 인물이 뼈를 깍듯 절절하게 사랑했던 이 도시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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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울퉁불퉁한 골목길 옆으로 촘촘히 들어선 잿빛 벽돌 건물들. 한번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제멋대로 발길이 돌려지는 거미줄 같은 미로(迷路). 부서진 성곽과 낡은 담벼락 사이로 예상을 뒤엎는 원색의 창문 덮개와 나무문이 보이고 광장 중앙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내리꽂힌다. 공중에 떠 있는 심연(深淵)처럼 깊고 푸른색의 하늘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칠 대로 지친 파리에서의 생활을 미련 없이 버리고 프랑스 남부행 기차를 잡아탄 서른다섯 살의 반 고흐. 그가 아를 기차역에서 만난 첫 장면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바로 그날에도 태양과 하늘은 저토록 아름다운 자태로 그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자란 그가 화상(畵商)을 하는 동생 테오(Theo)를 찾아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 머물게 되었지만 반 고흐의 감성은 자연적 본성을 따라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인상파에 빠져들고, 최고의 예술적 토론자이자 애증의 친구가 된 폴 고갱을 만났으며, 또 2백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완성한 곳이 바로 파리지만, 프로방스가 반 고흐 마지막 인생에 미친 영향은 그것과 견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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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아를에서의 첫 거주지가 된 ‘옐로 하우스(Yellow House: 집 외관이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어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에 머물며 반 고흐는 좀 더 밝아진 빛과 좀 더 화려해진 색채로 프로방스의 풍경과 자신의 삶을 그려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자그마한 침실 하나, 동네 카페 하나도 그에게는 ‘그리고 싶은 대상’이었고 ‘몰두하고 싶은 연인’이었다. 자신이 살던 「옐로 하우스」 역시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림 속의 ‘노란 집’을 아를에서 직접 볼 수 있는 특혜는 주어지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은 후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반 고흐가 아틀리에로 썼던 ‘빈센트의 방(La Chambre de Vincent)’을 보는 것으로 그에 대한 연민을 채워볼 수는 있다. 허름하고 부서진 벽돌담, 틈새가 벌어진 돌계단, 긴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창문틀. 담벼락 앞에 놓인 이젤 위의 작은 자화상. 지나가는 관광객들이면 누구나 다 그 앞에서 그 포즈를 취하고 기념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나마 요절한 천재 화가의 열정과 삶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렇듯 구원의 안식처로 찾은 아를에서 반 고흐는 눈이 아리도록 부신 태양과 빨려 들어갈 듯 강렬한 하늘을 보며 자신의 감성에 충실한 풍경화와 정물화에 몰두했다. 「해바라기」와 「붉은 포도밭」이 완성됐고 「밤의 카페테라스」(이 그림 속 카페는 ‘카페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아직 아를 시내에 그대로 있다)와 「반 고흐의 침실」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허무했고 더없이 고독했다. 그가 바깥 세상과 소통한 것은 파리의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가 유일했다.
“때때로 너무나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스스로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작업할 때가 있어… 마치 말할 때나 편지 쓸 때 단어들이 거침없이 줄줄 튀어나오듯 붓놀림이 이뤄지고 있는 거지….”
“그게 전부야. 이 밀폐된 방 속에는 닫힌 문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가구를 굵은 선으로 만들어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휴식을 표현해야 하거든. 벽에는 초상화 하나가 걸려 있고 거울 한 개와 수건 그리고 옷 몇 벌뿐이야….”
아를에 온 지 1년도 안 되어 결국 삶의 평화를 찾지 못한 반 고흐는 점점 극도의 신경쇠약과 광기(狂氣) 어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는 1888년 12월 23일, 친구의 초대를 받아 어렵게 아를을 방문한 고갱과 예술적 언쟁을 벌이다가 면도칼을 집어 들어 그를 위협한 후 자신의 왼쪽 귀 아랫부분을 베어내고 만다(화가 난 고갱은 이후 죽는 날까지 다시는 반 고흐를 보지 않았다). 피해망상과 환각 증세까지 보인 반 고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머리카락이 붉은 미친 사람(The Redheaded Madman)’으로 불리며 동네 주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드디어 청원서가 제출되고 경찰은 그의 ‘옐로 하우스’를 폐쇄시키기에 이른다. 수십 년 후 반 고흐라는 이름 하나로 역사적 명소가 된 아를이지만 그 당시에는 ‘천재의 정신적 방황’보다는 ‘미친 사람의 광기’ 쪽에 손을 들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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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방황에 시달리던 반 고흐가 아를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생 레미의 정신병원인 ‘생 폴 드 모솔레(St-Paul de Mausole)’로 완전히 거취를 옮긴 것은 1889년 5월. 병원 뒤쪽에 넓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가 있고 건물 옆쪽에 긴 산책로가 있는 이곳에서도 반 고흐는 붓을 놓지 않았다. 생 레미의 중심 광장에서 약 1시간쯤 남쪽으로 걸어가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얌전하게 자리 잡은 낡은 회색 빛 벽돌 건물. 대문에 들어설 때부터 마음이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지는 이유를 굳이 반 고흐라는 인물과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아담한 숲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평화로워진다. 굳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소의 ‘정신적 문제 혹은 혼돈 상태’가 있게 마련일 테니. 그렇게 느린 산책 끝에는 낡고 오래된 고딕식 건물이 등장하고 그 속에는 온갖 꽃들이 핀 중앙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ㄷ자형 복도가 펼쳐져 있다. 귀 한쪽이 뭉개져 버린 반 고흐가 어느 가을날 이 복도 벤치 어딘가에 앉아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침나절 해가 솟아오를 때면 포도밭과 삼나무 옆 돌계단에 앉아 또 어떤 영감을 떠올렸을까. 혹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컴컴한 숲 속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외로움에 시달렸을까.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이라는, 세계 미술사에 영원히 남을 걸작은 바로 이곳, 외진 시골의 한 정신병원에서, 소용돌이치는 그의 감성을 대변이라도 하듯 몽환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색감으로 완성되었다. 돈 맥클린이 불러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노래 <빈센트(Vincent)>의 가사는 그 첫머리를 이 작품의 제목으로 시작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Starry starry night). 당신의 팔레트를 파란색과 회색으로 칠하세요. 어느 여름날, 내 영혼의 어둠을 알아차린 두 눈으로 밖을 바라다보세요. 언덕 위에 진 그림자. 나무와 수선화를 스케치하세요. 산들바람과 겨울의 차가운 기운을 느껴 보세요. 그리고 눈처럼 부드러운 대지 위에 색을 입히세요. … 이제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고, 또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얘기를 듣지 않았고 또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마도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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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정신병원을 떠나 파리 근교로 옮긴 반 고흐는 1890년 7월, 권총 자살을 한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삶은 10년. 그 짧은 기간 동안 드로잉과 스케치를 포함해 약 2천 점 가량의 그림을 남겼으며 후세에 걸작으로 손꼽히는 대부분의 작품이 아를과 생 레미에서의 2년간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팔린 작품은 단 한 개. 반 고흐는 죽는 날까지 부와 명성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37년의 삶은 음울한 터널일 뿐이었다. 그 터널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환한 빛은 끝내 그의 인생을 비껴갔지만 후세 사람들은 다행히도 이 불운한 화가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의 그림 속 세상은 어둠보다는 밝음이, 우울함보다는 경쾌함이, 절망보다는 희망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아를과 생 레미의 하늘을 힘차게 수놓은 태양과 영롱한 별들처럼….
“인생은, 영원히, 끝도 없이 공허하다…. 그러나 아무리 허무하고 부질없다 하여도, 아무리 죽어 있는 삶일지라도, 온기와 힘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으로부터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빈센트 반 고흐, 1884년 10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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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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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ee78
2013.05.30
prognose
2012.05.01
mind3na
2010.04.18
'여든 살이 되도록 이 세상에 남아 있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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