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큰집에서는 추어탕을 끓인다
글: 채널예스
200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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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집에서 추어탕을 끓인 기억은 한 번도 없다. 왜냐, 우리 집은 딸만 셋이기 때문에. 아니, 딸만 있는 집이라고 어째서 추어탕을 못 끓여 먹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미꾸라지는 가시내들이 잡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하여간 그랬기 때문에. 미꾸라지 잡는다고 그 하얀 종아리 흙탕물에 넣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촌가시내들이라도 소녀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시내들은 머시매들이 흙탕물 범벅을 하고 미꾸라지 잡는 논둑에서 새침하게 구경만 한답니다. 우리가 구경하고 있으면 머시매들은 흙탕물 못 뒤집어써서 안달이랍니다. 우린 미꾸라지보다 흙탕물 못 뒤집어써 안달이 난 그 머시매들 구경이 더 재미났지요!). 각설하고, 아무리 맑은 웅덩이도 미꾸라지 한 마리만 떴다 하면 금방 흙탕물이 되고 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혹은 ‘미꾸라지 같은 한 놈 땜에’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추어탕을 안 끓여주면 미꾸라지도 불에 그슬려 먹을 놈들

미꾸라지는 손으로 잡으려면 아마 영원히 잡히지 않을 것이다. 미꾸라지는 손에 잡힐 만하면 진짜 미끄럽게 잘도 빠져나간다. 미꾸라지 잡는 머시매들을 보고 있으면 내 속이 다 답답하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먹을거리 중 대다수는 여자들, 혹은 우리같이 여자아이들 손에서 채취되어 밥상에 올랐다. 그런데 이제야 남자들 혹은 남자아이들에 의해 거두어진 먹을거리에 대해 쓰게 되었다. 그러나 또 그것을 요리하는 것은 엄마들이나 우리 여자들 몫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남자들, 더군다나 머시매들은 여자들 아니면 굶어죽게 생겼다.

그래도 머시매들은 어떡하든 안 굶어죽으려고 그랬는지 어쨌는지, 언젠가 보니까 뱀을 잡아서 신문지에 싸가지고 불에다 구워 먹더라니. 그러고 또 언젠가는 옛날 문둥이들이 살다 간 굴에서 연기가 나기에 들여다보니 머시매들이 나무에 토끼를 꿰어 바비큐를 해먹고 있더라니. 하긴, 즈이 엄마나 누나나 여동생이 추어탕을 안 끓여주면 미꾸라지도 그냥 불에다 그슬려 먹을 놈들이다,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종철이, 승택이, 준택이, 정택이…… 나는 너희들이 통명산 작은 정재나무 굴속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추어탕 없으면 가을은 없다

추어탕이라는 말도 있듯이 미꾸라지가 가장 맛있을 때는 가을철이다. 추수를 하려고 논에 물을 빼면 미꾸라지들이 논바닥에서 누렇게 파닥거렸다. 그걸 그냥 주워 담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미꾸라지는 워낙 미끄럽고 뻘 같은 논바닥 속으로 잽싸게 몸을 잘 피해 그러지는 못하고, 웅덩이를 파고 삼태기로 건져올렸다. 그걸 집에 가져와 소금으로 숨을 죽인 다음에 폭 고아서 얼개미에 내린 다음에 씰가리(*시래기.)를 넣고 된장기도 좀 하고 확독에다 쌀과 생고추와 마늘을 함께 갈아 붓고 거기에 젬피가루를 넣으면 걸쭉한 추어탕이 완성된다.

가을걷이 때가 되면 날은 으실으실 춥고 몸은 사방이 안 아픈 데 없이 아프고, 아침에 눈뜨면 손가락이 펴지지 않을 만큼 날마다 고되기만 하다. 그럴 때 추어탕 한 솥 끓여놓으면 가을걷이 일꾼들 먹을거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일꾼들은 멀건 된장국 먹고는 일을 못 한다. 고깃국은 못 줘도 추어탕 정도는 끓여줘야 한다. 그러고 보면 가을의 농부들이 몸을 의지하는 것은 추어탕이다. 추어탕을 안 먹고는 나락도 못 베고 콩도 못 거두고 고구마도 못 캔다. 추어탕 없으면 가을은 없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에 구수한 추어탕 한 그릇.

아, 몸과 마음에 꽉 찬 가을, 꽉 찬 행복! 그 정도는 먹어야 ‘아, 우리가 먹고 살려고 일을 하는구나.’ 실감이 난다. 적어도 햅쌀밥에 미꾸라지 살 톱톱한 추어탕 정도 먹으라고 우리가 그렇게 일을 하고 살았구나, 하고. 일꾼들에게 추어탕은 일 년 농사의 부상이다. 쌀은 본상이고 미꾸라지는 부상이다. 부상은 일종의 보너스다. 보너스는 많을수록 기분 좋다.

선옥아, 저녁에 추어탕 끓일 텡게 와서 불 좀 때도라

우리 집은 논이 없었다. 아버지는 논을 사기 위해 객지로 돈을 벌러 갔고, 아들이 없는 우리 집은 그래서 추어탕 먹기가 어려웠다. 논도 없고 아들도 없고 아버지도 없으니 추어탕을 끓일 만한 여건도 아니고, 추어탕 끓여놔도 누가 먹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미꾸라지는 주로 남자 아이들이 잡고 추어탕은 주로 남자 어른들이 먹었다. 그러니 나나 우리 가족들이 먹은 내 기억 속의 추어탕은 거의 우리 집에서 끓인 추어탕이 아니라 남의 집에서 끓인 것들이다. 딸이 없는 집들이 얻어먹은 돈부죽이랄지, 봄철 나물 반찬들이 거의 다른 집들에서 온 것이듯이.


그런데 남의 집에서 만들어 내게 온 음식이라도 우리 집 음식 같다. 나나, 우리 언니나, 내 동생이나, 혹은 우리 엄마도(그리고 다른 집의 딸들과 그 엄마들도) 가까운 이웃집에서 그날 특별한 음식을 한다 하면 그 집에서 가서 최소한 불을 때주고 한 끼를 해결하고 돌아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시절이었다. 우리가 안 가면 그 집에서 오라고 몇 번이나 발걸음을 하고, 그래도 안 가면(대부분 일이 바빠서 못 가면) 기어코 음식을 가지고 왔다. 그러니 그 집 음식이 우리 집 음식이요, 우리 집 음식이 또 그 집 음식이 되는 것이었다. 돈부죽을 끓여도 그러는데 추어탕은 말해 무엇 하랴. 그 집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꼭 내가 자기 딸인 것처럼, “선옥아, 저녁에 추어탕 끓일 텡게 와서 불 좀 때도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내가 그 집 딸인 것처럼 익숙하게 그 집 부엌에서 불을 때고 마늘을 까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이들은 동네 어른들이 공동으로 ‘쓰는’ 자식들이었다. 윗집 사는 셋째라는 머시매는(그 애 집은 딸은 없고 아들이 일곱인가 여덟인가 그랬다. 그래서 첫째 둘째는 기호, 기수인데 셋째부터는 그냥 셋째, 넷째 식으로 불렀다) 우리 엄마가 “아이 시째야, 우리 집 소가 말을 안 듣는다. 니가 와서 좀 소막에 들여넣어주라”고 하면 냉큼 와서 소를 외양간에 들여놓아주는 것은 물론 소여물까지 썰어주고 갔다. 나는 지금도 셋째를 고맙게 생각한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먹는 기분

맛있네 맛있네 해도 우리 큰집 추어탕만큼 맛있는 게 또 있을까. 나는 솔직히 우리 엄마가 한 음식보다 우리 큰엄마가 한 음식이 더 맛있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도 없고 딸만 셋이라 밥상이 그리 걸지도 못하고 늘 헌 반찬 위주라 윤기가 없었다. 그러다 큰집에 가면 할아버지, 큰아버지도 계시고 사촌들도 많아서 밥상이 걸고, 우리 큰엄마 음식 솜씨가 좋아 또 밥상에 윤기가 돌았다. 나는 내가 우리 큰아버지 딸로 안 태어나고 우리 아버지 딸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원통했던가. 내가 큰집 딸로 태어났으면 음식에 관한 이 글들도 훨씬 풍성했을 텐데. 적어도 추어탕을 다른 집에 갖다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썼으면 썼지, 얻어먹는 ‘안 쓰고 싶은 이야기’는 쓰지 않아도 됐을 터인데.

하지만 나는 써야 한다. 그리고 쓸 수밖에 없다. 그 가을에 논이 없었던 우리 엄마가 품을 팔러 간 집들에서 먹었던 추어탕에 대해서. 그때는 품앗이든 품팔이든 주인집에서 점심과 저녁을 주었다. 그러면 놉(일꾼)의 아이들까지 가서 밥을 먹었다. 그것은 얻어먹는 게 아니라 당연히 가서 먹는 것이다. 울 엄마 따라가서 먹었던 그 숱한 추어탕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추어탕을 먹을 때면 엄마 따라 가서 먹었던 집들의 추어탕들이 떠오른다. 아들 많고 논도 많고 식구들 많고 북적북적했던 집들, 마당에는 볏가리가 그득한 집들(그 집들은 대부분 큰집들이었다). 오래된 나무대문은 우람하고 시억시억한 상머슴에 말 잘 듣는 꼴머슴이 서늘한 저녁인데도 우물물을 퍼서 푸푸거리며 등목을 하는 집.

추어탕은 내게 가을의 풍성함과 함께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결핍감을 동시에 일깨우는 음식이 되었다. 추어탕을 먹을 때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먹는 기분이 든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토지를 물려받지 못한 가난한 할아버지의 작은아들의 딸이다, 작은집 애다. 작은집들은 추어탕을 별로 안 끓여 먹는다. 더구나 딸만 있는 작은집이니. 추어탕은 아들 많은 큰집들에서 끓인다. 가을 저녁이면 세상의 큰집들은 아들들이 잡아온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이느라고 부산하다.

큰어머이 기다려요, 선옥이가 가서 불 때드릴게요오!

※ 운영자가 알립니다.
『행복한 만찬』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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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슬이맘

2008.08.07

추어탕,,하면,아니 미꾸라지하면 저는 항상 울아버지를 생각합니다,,지금은 안계시지만, 결혼하여 전주로 내려오니 추어탕이 유명한 남원이 가깝더군요, 전주에도 유명한 남원추어탕집이 꽤있어 아버지가 생각나면 가끔가서 먹곤하죠,,비오는 날이면 아버지랑 저는 작은 소쿠리를 들고 논으로가서 조금 물고를 터 넘쳐나는 물을 빼면서 그 물고에 소쿠리를 대고 있죠,,그러면 운나쁜미꾸라지들이 소쿠리에 갇히게 되죠,,그럼 그 미꾸라지들을 갖고와서 아버지는 고추장넣고, 빠글빠글 조려서 술한잔하시고 난 옆에서 맛있게 먹었죠,,어렸을적 아버지가 저에게 비가오는날이면 해주시던 술안주가 몇개있었죠,,그래서 지금은 저도 비오는날이면 항상 아버지가 그리우면서 미꾸라지생각을 하곤했었는데..이책을 보니..참 반갑기도 하고,,너무나 그리운 아버지도 생각납니다,,근데 지금은 그맛이 안나죠,,그어릴적 아버지의 솜씨가 너무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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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gjini

2008.08.06

추어탕하니까 어릴적 기억이 떠오르네요. 서울에서도 지지리 못살던 동네 가리봉동(지금은 가산동)에 살았는데 그때 더 못살던 철산리(지금 광명시)까지 가서 남자애들이랑 추어탕 잡아오던 생각이 나네요. 지금 생각하면 그 먼거리를 어떻게 걸어가서 잡아왔나 싶습니다. 엄마가 맛있게 추어탕을 끓여주셨죠.
못사는 도시, 공단지역이지만 아직 다 개발이 안되어서 주변은 논두렁에 꼬랑에 아이들이 놀데가 많았습니다. 작가의 농촌 기억은 제겐 없지만 그당시 못살던 가리봉지역의 기억이 떠오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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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ne

2008.08.04

추어탕은 갈아서 파는 것만 먹어봤습니다. 예전에는 추어탕을 가을에 그런 식으로 먹을 수 있었군요. 추수하려고 논에서 물을 뺐을때 파닥거리는 미꾸라지들. 어쩌면 추수하느라 고생많다고 하늘에서 주신 보양식 바로 이 추어탕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봅니다. 가을의 풍성함이 배가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공선옥님에게는 추어탕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결핍의 기억으로 남는 음식이기도 하다니, 마음이 아려오네요. 음식을 통해 어린 시절 어떤 감정이 그렇게 다시 되살아 날 수 있구나 싶네요. '행복한 만찬' 속에는 이렇듯 인간의 다양한 감수성이 살아 숨쉬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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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1963년 전라남도 곡성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하고 1991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2년 여성신문학상, 1995년 제13회 신동엽창작기금수여, 2004년 제36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5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부문 올해의 예술상, 만해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의 모습과 가난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뤄온 작가 공선옥.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표현해 내는 소설가이다. "근대에 태어났지만 전근대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하는 작가의 음성은 유년시절 아버지는 밖으로 나돌고, 세 자매가 생존을 위해 뛰어야 했던 상황에서 둘째 딸의 책무를 지닌 채 "같은 연배 또래들이라고 해서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참외 파는 소녀이기도 했으며, 입학만 한 상태에서 무학점 학생으로 남아야 했고, 빚에 쫓겨 다니는 아버지,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병간호가 작가 공선옥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었다. 공장을 떠돌며 위장 취업자가 아닌, 대학생 출신 생계 취업자였으며, 나중에는 고속버스, 관광버스, 직행버스를 전전하며 안내양을 하던 어느 날 “나의 궁핍한 시절이 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소설가 공선옥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목마른 계절」 「우리 생애의 꽃」 등 개성있는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며 가진 자에게는 눈물의 슬픔을, 없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기쁨을 안겨 주는 작가이다. 화려한 정원에서 보호받고 주목받는 꽃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바람 부는 길가에서 피었다 지는 작은 꽃들에게 눈길을 보내온 작가는 작품 속에서 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의 삶,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2002년 『멋진 한세상』이후 5년만에 내놓은 소설집 『명랑한 밤길』역시 그녀의 작품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소설집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버둥거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국내 최초로 온라인 독자 커뮤니티 문학동네에 일일연재되어, 화제를 모았으며, 가장 아픈 시대를 가장 예쁘게 살아내야 했던 젊은이들의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스무 살 시기의, ‘사람들이 많이 죽어간 한 도시’에서의 쓸쓸함과 달콤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란』에서는 가족의 빈자리를 견디며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일궈낼 수 있는 삶의 행복한 순간을 유려하고 따뜻하게 그려냈으며, 『꽃 같은 시절』은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사람들, 철저하게 이 사회의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꽃 같은 싸움을 담고 있다.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장편소설 『유랑가족』,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영란』, 『꽃 같은 시절』,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