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살아 있는, 스스로 자기조절이 가능한 생명체'
“‘가이아(Gaia)’를 찾는 노력은 곧 지구상에 생존하는 가장 커다란 생물체를 발견하려는 시도”다.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 가설은 일종의 거대담론이다. 그리고 1980년대 우리 사회 일각을 휩쓴 교조주의를 닮았다.
200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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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대가’들의 헛소리
요즘 대단한 과학발견을 하고 과학이론을 정립한 과학자들의 망발이 심심치 않다. 1962년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 구조를 발견한 미국의 분자생물학자 제임스 왓슨은 인종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왓슨은 2007년 10월 14일자 영국 《선데이타임스》 인터뷰에서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관적”이라며 “우리의 모든 사회정책은 흑인들의 지능이 백인들과 똑같다는 사실에 기초해 수립되지만 모든 연구결과는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또 그는 모든 인간이 똑같다고 여기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지만 “흑인 직원들을 다뤄 본 사람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며, “진화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갈라졌는데도 인간의 지능이 똑같이 진화했다고 기대할 어떤 명확한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한겨레》 2007년 10월 18일자)
공동연구자인 프랜시스 크릭을 비난할 때부터 드러난 왓슨의 괴팍한 심성은 이미 악명 높다. 그런데 이젠 거의 노망이라도 난 모양이다. 나는 백인이 주도하는 인류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암담하게 본다. 백인 직원들을 다뤄보기 전에, 흑인들이 백인들을 노예로 부려보고 나서 인간의 똑같음과 다름을 살피는 게 순서 아닐까?
그리고 어떤 집단이나 사회 구성원의 지능이 높으면 그 집단과 사회의 미래는 과연 밝기만 한 걸까?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사람의 지능을 비교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결과가 어떻건 문제다. 유대인의 높은 지능은 그들의 팔레스타인지역 강점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될 터이고, 팔레스타인사람의 높은 지능은(나는 이럴 가능성도 크다고 본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깨뜨리는 과학적 근거가 되리라. 사실 지능의 높낮이를 판단하는 잣대라는 게 우습긴 하다.
제발 지구에 남아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식민주의 본산인 영국 출신 과학자답게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태양계 밖의 다른 행성에 정착촌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호킹은 2006년 11월 30일 영국 BBC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단 하나의 행성에 한정돼 산다면, 장기적으로 인류의 생존은 위험에 처한다”며 “조만간 소행성 충돌이나 핵전쟁 같은 재난이 인류를 휩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다.
호킹은 “우주로 뻗어나가 다른 행성을 개척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안전하다”며, 하지만 우리의 태양계에는 지구 같은 행성이 없어 정착촌을 건설할 만한 곳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는 것이다.(《한겨레》 2006년 12월 2일자)
나는 어째서 인류가 영원불멸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텔레비전 SF 드라마 <스타트렉>에 나오는 ‘물질/반물질 소멸’과 같은 기술을 이용하면 빛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지 여부도 관심 없다. 다만, 나는 이 위대한 과학자께서 정말 부인에게 얻어맞고 사는지 여부가 궁금하다.
가이아 가설
“‘가이아(Gaia)’를 찾는 노력은 곧 지구상에 생존하는 가장 커다란 생물체를 발견하려는 시도”다.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 가설은 일종의 거대담론이다. 그리고 1980년대 우리 사회 일각을 휩쓴 교조주의를 닮았다. 『가이아-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홍욱희 옮김, 갈라파고스, 2004/범양사출판부, 1990)는 그런 기색이 뚜렷하다.
그는 역사를 존중한다. “유독 지구만이 갖는 독특한 대기 성분의 비밀은, 그것이 다름 아닌 지구의 생물들에 의해 하루하루 착실하게 만들어지는 데에 있다.” 아울러 상호작용에도 유념한다. “대기의 조성을 분석하여 생물체의 존재를 탐지한다.” 유기적인 사고를 하는 그는 대기권(atmosphere)을 생물권(biosphere)의 역동적인 연장체로 본다.
그에게 생물학적 구조물과 대기권은 합목적적이다. “마치 고양이의 털가죽, 새의 깃털, 벌집의 얇은 벽들과 같이 대기권도 생물계의 연장으로 주어진 환경을 유지시키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는 총체성을 강조한다. 가이아 가설은 총체적이다. “가이아는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화학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총합체라고 할 수 있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다. 러브록은 “살아 있는 지구를 표현하는 이름으로” 가이아를 갖다 붙이라는 소설가 친구 윌리엄 골딩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대지의 여신을 앞세우지 않았다면, 가이아 가설의 아우라는 별로였으리라.
확실히 “BUSTH(Biocybernetic Universal System Tendency Homeostasis)” 같은 조어는 심심하다. 『가이아-지구의 체온과 맥박을 체크하라(Gaia-The Practical Science of Planetary Medicine)』(김기협 옮김, 김영사, 1998)는 우리말로 번역된 러브록의 세 번째 저서로 가이아 가설을 쉽게 설명한 책이다.
한마디로 섞갈리는
외계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다는 전망은 영국의 대기화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먼저 내놨다. 러브록은 한마디로 섞갈린다. 그의 가이아 가설은 정령숭배, 영성주의, 물활론, 의인화 같은 게 혼재한다.
그의 주장은 앞뒤가 안 맞는다. 그는 “무지의 시대에는 기술적인 해결책이 신뢰를 얻는 법”이라고 하면서도 지구온난화에 다가서는 그의 자세는 다분히 기술 지향적이다. “생물체들을 포함하는 지상의 모든 만물이 자가조절적 실체”이며, 이게 바로 그가 말하는 가이아라면, 굳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능동적 조절에 의한 비교적 균일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을까?
또 그는 “가이아 가설은 자연을 반드시 우리가 정복해야만 하는 본원적 힘을 가진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제까지의 독선적 견해에 대한 대안이 될” 거라 하지만, 인간이 지구환경을 망가뜨리는 ‘암적 존재’라는 표현도 꺼려한다.
외국 저자의 번역서를 리뷰하면서 유럽과 북미의 작가와 학자들이 뻔한 얘기를 에둘러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예컨대 “시골 농부들에게 있어 가이아 가설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며, 그들은 항상 그렇게 간주해왔던 것이리라.” 땅과 접하고 사는 사람들은 굳이 가이아 가설 같은 걸 세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다. 러브록은 이런 점을 인정한다. 그의 미덕이다 “이 책에 표현된 내 견해와 의견들은 어찌할 수 없이 내가 살고 있는 서구사회, 특히 우리 사회의 수많은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바보멍청이들아, 핵 발전은 안전해
“제임스 러브록은 ‘원자력을 세계의 주요 에너지원으로 쓰는 것만이 기후변화가 문명을 파괴하는 것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한겨레》 2007년 5월 22일자)
여기서 핵발전소에서 배출한 뜨듯해진 냉각수가 외려 온난화를 부추긴다는 반론을 맞세우진 않겠다. 다만, 핵 발전과 방사능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러브록의 궁색한 논리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앞서 러브록이 어째서 핵 발전을 옹호하는지가 궁금하다.
“과학자들을 위한” 『가이아의 시대-살아 있는 우리 지구의 전기』(홍욱희 옮김, 범양사출판부, 1992)에서 러브록은 그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원자력이나 방사능 물질을 환경의 불가피한 한 부분이자 정상적인 일부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적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면서 “원자력은 산소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기회와 도전을 함께 제공한다”며, “우리들은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익혀야만 할 것”이라고 점잖게 충고한다. 그런데도 “나는 원자력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는 식으로 발뺌한다.
“이 글(7장 「가이아와 현대의 환경」 中 ‘방사선 노출의 위협’)이 원자력 산업을 옹호한다거나 또는 나 자신이 원자력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점을 시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의 관심사는 다만 원자력에 대한 옹호나 반대가 현재 너무나도 과장되게 전파되고 있어서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들과 세계의 나머지 생물권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실제적이면서도 심각한 문제를 호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다.”
무척 위험한 사고
하지만 내가 읽기론 그는 원자력에 호감이 있고, 그것의 유용성을 과도하게 편든다. 적어도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며, 핵폭탄의 위력을 과소평가한다. 그렇지 않다면 “방사능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생겨난 것은 그것이 처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잘못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쉽게 말하긴 어려울 거다.
핵폭탄 한 방에 수십만의 희생자가 나지 않았느냐 따지면, 러브록은 독일 드레스덴에는 재래식 폭탄을 비행기로 마구 쏟아 부어 그것에 버금가는 희생자가 났다고 반문할 것 같다. 그의 논리는 그런 식이다.
“너무 강한 방사능은 점진적인 독성 효과를 유발시킨다. 그러나 심지어 물(water)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많이 마시면 해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이게 말이 되는가? “우리 인류가 저지르는 환경 훼손에 의해서 가이아가 겪게 되는 고통은 우리가 암세포의 침입을 받아서 당하는 고통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한 것이리라.” 부적절한 비교이자 엉뚱한 비유다.
나는 “우리 자신이 아주 파격적인 존재(anomalous one)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탐구자들과 연구가들의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사고는 위험천만하다. 그 결과 “우리들은 태양계의 다른 혹성들을 개발하여 식민지로 삼고 은하계의 다른 행성계를 탐험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나는 그러는 게 당치않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다한들 무엇하리. 러브록은 현재의 상태를 긍정한다. 앞날에 대해서도 낙관적이다. 러브록의 현실긍정과 미래낙관은 무병장수의 영향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병력에 대해선 아는 바 없지만, 그는 오래 살고 있다. 제임스 러브록은 3.1운동이 일어난 해에 태어났다.
요즘 대단한 과학발견을 하고 과학이론을 정립한 과학자들의 망발이 심심치 않다. 1962년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 구조를 발견한 미국의 분자생물학자 제임스 왓슨은 인종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왓슨은 2007년 10월 14일자 영국 《선데이타임스》 인터뷰에서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관적”이라며 “우리의 모든 사회정책은 흑인들의 지능이 백인들과 똑같다는 사실에 기초해 수립되지만 모든 연구결과는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또 그는 모든 인간이 똑같다고 여기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지만 “흑인 직원들을 다뤄 본 사람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며, “진화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갈라졌는데도 인간의 지능이 똑같이 진화했다고 기대할 어떤 명확한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한겨레》 2007년 10월 18일자)
공동연구자인 프랜시스 크릭을 비난할 때부터 드러난 왓슨의 괴팍한 심성은 이미 악명 높다. 그런데 이젠 거의 노망이라도 난 모양이다. 나는 백인이 주도하는 인류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암담하게 본다. 백인 직원들을 다뤄보기 전에, 흑인들이 백인들을 노예로 부려보고 나서 인간의 똑같음과 다름을 살피는 게 순서 아닐까?
그리고 어떤 집단이나 사회 구성원의 지능이 높으면 그 집단과 사회의 미래는 과연 밝기만 한 걸까?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사람의 지능을 비교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결과가 어떻건 문제다. 유대인의 높은 지능은 그들의 팔레스타인지역 강점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될 터이고, 팔레스타인사람의 높은 지능은(나는 이럴 가능성도 크다고 본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깨뜨리는 과학적 근거가 되리라. 사실 지능의 높낮이를 판단하는 잣대라는 게 우습긴 하다.
제발 지구에 남아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식민주의 본산인 영국 출신 과학자답게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태양계 밖의 다른 행성에 정착촌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호킹은 2006년 11월 30일 영국 BBC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단 하나의 행성에 한정돼 산다면, 장기적으로 인류의 생존은 위험에 처한다”며 “조만간 소행성 충돌이나 핵전쟁 같은 재난이 인류를 휩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다.
호킹은 “우주로 뻗어나가 다른 행성을 개척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안전하다”며, 하지만 우리의 태양계에는 지구 같은 행성이 없어 정착촌을 건설할 만한 곳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는 것이다.(《한겨레》 2006년 12월 2일자)
나는 어째서 인류가 영원불멸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텔레비전 SF 드라마 <스타트렉>에 나오는 ‘물질/반물질 소멸’과 같은 기술을 이용하면 빛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지 여부도 관심 없다. 다만, 나는 이 위대한 과학자께서 정말 부인에게 얻어맞고 사는지 여부가 궁금하다.
가이아 가설
그는 역사를 존중한다. “유독 지구만이 갖는 독특한 대기 성분의 비밀은, 그것이 다름 아닌 지구의 생물들에 의해 하루하루 착실하게 만들어지는 데에 있다.” 아울러 상호작용에도 유념한다. “대기의 조성을 분석하여 생물체의 존재를 탐지한다.” 유기적인 사고를 하는 그는 대기권(atmosphere)을 생물권(biosphere)의 역동적인 연장체로 본다.
그에게 생물학적 구조물과 대기권은 합목적적이다. “마치 고양이의 털가죽, 새의 깃털, 벌집의 얇은 벽들과 같이 대기권도 생물계의 연장으로 주어진 환경을 유지시키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는 총체성을 강조한다. 가이아 가설은 총체적이다. “가이아는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화학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총합체라고 할 수 있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다. 러브록은 “살아 있는 지구를 표현하는 이름으로” 가이아를 갖다 붙이라는 소설가 친구 윌리엄 골딩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대지의 여신을 앞세우지 않았다면, 가이아 가설의 아우라는 별로였으리라.
확실히 “BUSTH(Biocybernetic Universal System Tendency Homeostasis)” 같은 조어는 심심하다. 『가이아-지구의 체온과 맥박을 체크하라(Gaia-The Practical Science of Planetary Medicine)』(김기협 옮김, 김영사, 1998)는 우리말로 번역된 러브록의 세 번째 저서로 가이아 가설을 쉽게 설명한 책이다.
한마디로 섞갈리는
외계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다는 전망은 영국의 대기화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먼저 내놨다. 러브록은 한마디로 섞갈린다. 그의 가이아 가설은 정령숭배, 영성주의, 물활론, 의인화 같은 게 혼재한다.
그의 주장은 앞뒤가 안 맞는다. 그는 “무지의 시대에는 기술적인 해결책이 신뢰를 얻는 법”이라고 하면서도 지구온난화에 다가서는 그의 자세는 다분히 기술 지향적이다. “생물체들을 포함하는 지상의 모든 만물이 자가조절적 실체”이며, 이게 바로 그가 말하는 가이아라면, 굳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능동적 조절에 의한 비교적 균일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을까?
또 그는 “가이아 가설은 자연을 반드시 우리가 정복해야만 하는 본원적 힘을 가진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제까지의 독선적 견해에 대한 대안이 될” 거라 하지만, 인간이 지구환경을 망가뜨리는 ‘암적 존재’라는 표현도 꺼려한다.
외국 저자의 번역서를 리뷰하면서 유럽과 북미의 작가와 학자들이 뻔한 얘기를 에둘러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예컨대 “시골 농부들에게 있어 가이아 가설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며, 그들은 항상 그렇게 간주해왔던 것이리라.” 땅과 접하고 사는 사람들은 굳이 가이아 가설 같은 걸 세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다. 러브록은 이런 점을 인정한다. 그의 미덕이다 “이 책에 표현된 내 견해와 의견들은 어찌할 수 없이 내가 살고 있는 서구사회, 특히 우리 사회의 수많은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바보멍청이들아, 핵 발전은 안전해
“제임스 러브록은 ‘원자력을 세계의 주요 에너지원으로 쓰는 것만이 기후변화가 문명을 파괴하는 것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한겨레》 2007년 5월 22일자)
여기서 핵발전소에서 배출한 뜨듯해진 냉각수가 외려 온난화를 부추긴다는 반론을 맞세우진 않겠다. 다만, 핵 발전과 방사능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러브록의 궁색한 논리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앞서 러브록이 어째서 핵 발전을 옹호하는지가 궁금하다.
“과학자들을 위한” 『가이아의 시대-살아 있는 우리 지구의 전기』(홍욱희 옮김, 범양사출판부, 1992)에서 러브록은 그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원자력이나 방사능 물질을 환경의 불가피한 한 부분이자 정상적인 일부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적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면서 “원자력은 산소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기회와 도전을 함께 제공한다”며, “우리들은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익혀야만 할 것”이라고 점잖게 충고한다. 그런데도 “나는 원자력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는 식으로 발뺌한다.
“이 글(7장 「가이아와 현대의 환경」 中 ‘방사선 노출의 위협’)이 원자력 산업을 옹호한다거나 또는 나 자신이 원자력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점을 시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의 관심사는 다만 원자력에 대한 옹호나 반대가 현재 너무나도 과장되게 전파되고 있어서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들과 세계의 나머지 생물권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실제적이면서도 심각한 문제를 호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있다.”
무척 위험한 사고
하지만 내가 읽기론 그는 원자력에 호감이 있고, 그것의 유용성을 과도하게 편든다. 적어도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며, 핵폭탄의 위력을 과소평가한다. 그렇지 않다면 “방사능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생겨난 것은 그것이 처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잘못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쉽게 말하긴 어려울 거다.
핵폭탄 한 방에 수십만의 희생자가 나지 않았느냐 따지면, 러브록은 독일 드레스덴에는 재래식 폭탄을 비행기로 마구 쏟아 부어 그것에 버금가는 희생자가 났다고 반문할 것 같다. 그의 논리는 그런 식이다.
“너무 강한 방사능은 점진적인 독성 효과를 유발시킨다. 그러나 심지어 물(water)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많이 마시면 해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이게 말이 되는가? “우리 인류가 저지르는 환경 훼손에 의해서 가이아가 겪게 되는 고통은 우리가 암세포의 침입을 받아서 당하는 고통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한 것이리라.” 부적절한 비교이자 엉뚱한 비유다.
나는 “우리 자신이 아주 파격적인 존재(anomalous one)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탐구자들과 연구가들의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사고는 위험천만하다. 그 결과 “우리들은 태양계의 다른 혹성들을 개발하여 식민지로 삼고 은하계의 다른 행성계를 탐험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나는 그러는 게 당치않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다한들 무엇하리. 러브록은 현재의 상태를 긍정한다. 앞날에 대해서도 낙관적이다. 러브록의 현실긍정과 미래낙관은 무병장수의 영향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병력에 대해선 아는 바 없지만, 그는 오래 살고 있다. 제임스 러브록은 3.1운동이 일어난 해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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