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B.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읽다
진도는 나가지 않은 채 죽어라 복습만 시키는 한국 사회가 바로 짜증의 정체이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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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8. 존 B.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바오출판사, 2005)를 읽다.

1914년 영국에서 출간된 존 B.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바오출판사, 2005)가 우리나라에 초역된 것은 1958년(신양사 교양신서)이고, 같은 역본이 재간된 것은 1975년(박영사 박영문고)이다. 그런데 이 책을 다작?다역으로 소문난, 존경하는 아나키스트 법학자 한 분이 다시 번역했다. 뭣 하러 역자는 출간된 지 한 세기나 되어 가는 이 케케묵은 책을 새로 번역한단 말인가?

‘6?25는 통일 전쟁’이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갖고 온 나라가 ‘개그콘서트’장같이 되어 버린 요 며칠간, 상기한 책과 복습 삼을 요량으로 조국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책세상, 2001)를 찾아 놓고 나서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서구에서 벌어진 길고 험난했던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는 베리의 책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대한 관용책을 쓰고(313)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이성이 속박되고 사상이 노예화되며 지식이 전혀 진보하지 못한 천 년”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서양인의 고투는 절대성과 배타성에 기반한 기독교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이 책의 요지이다.

기독교가 서구 사회를 장악하기 이전의 그리스?로마 시대는 인류 최초의 계몽 시대였다. 그들에게는 성서聖書나 성직 제도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누린 자유의 표시이자 중요한 조건으로, 그리스와 로마 양兩 시대는 온갖 종교에 관용적이었다. 두 나라의 눈부신 학문과 철학은 종교적 관용을 바탕으로 이성과 토론의 자유가 마음껏 발휘된 경우였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종교적 관용 사회였던 로마에서 박해를 받았다. “황제들이 기독교의 경우에 한해 자신들의 관용 정책에 예외를 두었다면, 그 목적은 관용을 수호하는 것이었다”라는 간명한 설명은, 기독교가 사이좋게 공존해 온 제국 내의 다른 종교에 대해 ‘인류의 적’이라는 공격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흥미로운 것은, 양심의 자유라는 원칙이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보다 우선했기에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던 기독교가 로마를 접수하고 나서는, 곧바로 이교異敎는 물론이고 같은 기독교 교파에 대해서마저 불관용했다는 것이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중세의 암흑을 걷어 내고 종교적인 자유와 개인적 판단의 권리를 확립하게 해 준 일대 사건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다. 루터와 칼뱅을 위시한 숱한 종교개혁가들은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들어 교황과 통치자들에게 저항하고 탄원했지만, 개혁의 주류가 득세한 곳에서 숱한 프로테스탄트 분파의 자유는 문자 그대로 ‘불태워’지기 일쑤였다. 종교개혁의 주체들은 자기 교파의 진리만 중요시했지,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그리고 관용이라는 사회적 문제들을 한 번도 보편 의제로 고찰하지 않았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 안에서는 자유를 요구하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은 곳에서는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곧 자신의 의무가 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공박은, 고문과 화형을 무기로 1천 년 넘게 다양한 ‘이성의 진보와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아 온 서구의 기독교계에 대한 단죄이면서, 한국의 자유 민주주의자들이 가진 이중성마저 폭로해 준다.

4?19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은 온 국민의 합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자유’는 소위 ‘자유 민주주의’의 정체를 지킨다는 중도적 보수 세력의 전유물이다. 이 땅의 루터나 칼뱅 같은 개혁가들은, ‘학문?표현?양심’의 자유가 민주 사회의 보루이며, 국가보안법이 언어도단의 법이라고 절실히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강정구 같은 사람을 ‘민주화 세력을 분열시키고, 보수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철없는 사람’으로 매도하기 일쑤이다. 베리가 묻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이 멈춰 선 곳에 우리가 똑같이 멈춰 서야 한단 말인가?” 진도는 나가지 않은 채 죽어라 복습만 시키는 한국 사회가 바로 짜증의 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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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7
장정일 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07월
‘독서일기’라는 제목으로 1993년부터 꾸준히 출간되어온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일곱 번째 권. 이번에는 2003년 4월부터 2007년 3월까지 87편의 독서일기를 추려 담았다. 일곱 번째 독서일기에서 장정일은 에세이를 포함한 문학 분야 40권과, 사회 비평을 비롯해 예술과 동서양의 역사,정치,인물을 포함한 인문 분 44권, 과학과 실용 분야로 분류되는 3권 등 총 87권의 도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랜덤하우스 코리아와의 제휴에 의해 연재되는 것이며, 매주 수요일 총 2개월 간(총 8편) 연재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존베리 #사상의자유의역사 #장정일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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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5.15

어떤 종교든 혹은 사상이든 일반적으로 넓게 받아들이게 되면 오히려 관용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같아요. 우리나라 기독교를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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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배그넬 베리

존 배그넬 베리((1861~1927)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저명한 역사학자, 고전학자, 고전문헌학자이다. 그는 1861년 아일랜드 모나핸에서 태어나 포일 대학과 트리니티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으며, 1893년에 트리니티 칼리지의 근대사 교수를 시작으로 1902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근대사 흠정교수로 임명받아 1927년 로마에서 운명할 때까지 그리스 로마사를 비롯하여 비잔틴사와 19세기 현대사 분야에 방대한 연구성과를 남겼다. 고전학과 문헌학을 고도로 수련한 그는 1880년대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발달시키기 시작하여 고대 그리스부터 19세기 교황제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에 관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다. 1896~1900년에는 새롭게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주석과 부록을 덧붙인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The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의 새로운 편집본을 완성했고, 그 후 지성사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 연구로 관심을 확대한 그는 『사상자유의 역사』(1914),『진보이념』(1920)을 집필했다. 그가 죽은 후에 출판된 2권의 강의록 중 한권이 『바바리안의 유럽침략』(1928)이다. 베리는 역사를 일종의 방법론적 과학으로 간주했다. 이처럼 회의주의적인 일면도 지녔던 그는, 전체적으로 보면, 이성의 성장을 궁극적으로 믿고 유럽의 과거를 조명하면서 현재를 이해할 능력을 구비한 빅토리아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케임브리지 흠정교수 취임강연에서 피력한 "역사는 더도 덜도 아닌 과학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그의 역사관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진보적인 역사학자답게 자신의 폭넓은 연구 성과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소개함으로써 대중 계몽에도 크게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저서로는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from Arcadius to Irene, History of Greece to the Death of Alexander the Great, Idea of Progres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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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어린 시절의 꿈은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여 다섯 시면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는 것'이었다 한다. 책읽기는 그가 그토록 무서워하고 미워했던 아버지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학교를 싫어했던 그는 삼중당문고를 교과서 삼아 열심히 외국 소설을 독파했고, 군입대와 교련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핑계로 드디어 1977년 성서중학을 끝으로 학교와의 인연을 끊는다. 그러나 1979년 폭력범으로 소년원에 수감되면서 그는 학교와 군대의 나쁜 점만 모아놓은, 세상에서 가장 몹쓸 지옥인 교도소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하얀몸」을 비롯한 그의 시의 바탕이 된다. 오랜 정신적 방황을 겪은 그는 박기영을 스승으로 삼아 시를 배우기 시작하여 마침내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시운동』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였고, 1987년에는 희곡 「실내극」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극작활동도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해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고 연이어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발표하면서, 지금껏 문단에서 경험해본 적이 없던 '장정일'이라는 '불온한 문학'이 드디어 '중앙'에 입성했음을 알린다. 1988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 「펠리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를 겸업하기 시작한 그는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1990), 장편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2),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를 연이어 발표하고 이 소설들이 모두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며 '장정일'은 드디어 우리 문화의 뚜렷한 코드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1996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발간한 후 그가 파리에 있는 그의 아내인 소설가 신이현을 만나러 출국한 사이, 한국에서는 외설시비가 일어나고 자신의 소설이 작품성과는 상관없이 포르노로 규정받고 있던 그해의 마지막날, 장정일은 파리에서 자진 귀국하여 당당히 자신의 작품에 대해 변론한다. 그러나 영화 <거짓말>이 무죄판결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법원의 최종판결은 유죄. 그리고 또 한번의 구속으로 이어진다. 당시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강금실은 후에,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라는 책에서 당시의 장정일과 재판에 대한 글 <장정일을 위한 변명>을 썼다. 그 사이 한국에서의 평가와는 달리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일본에서 발간되는 등 해외에서 더 호평을 받고, 그는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는 『중국에서 온 편지』(1999)와 자전적 소설 『보트하우스』(2000)를 펴낸다. 그의 '독자 후기'를 모은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5권까지 펴내며 그는 지금 대구에서 평생 소원인 책읽기와 재즈듣기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머리같이 쓸데 없는 데서는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노모가 바리깡으로 직접 깎아주는 빡빡 머리와 헐렁한 골덴 바지 그리고 청색 면 티 차림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