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국인을 성찰하다 - 강준만 교수
강준만 교수는 사건에 내재한 옳고 그름, 장점과 단점, 빛과 그늘을 모두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편이 없다. 그에게 “당신은 어느 쪽이냐?”라고 물으면 그는 “이쪽도 완전히 옳지 않고, 저쪽도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라고 응수한다.
200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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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是非)를 가리다”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이 말을 “옳고 그름을 가리다, 따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이 두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핵심적인 논쟁에 몸을 사리지 않고 끊임없이 뛰어들었다.
강준만 교수는 사건에 내재한 옳고 그름, 장점과 단점, 빛과 그늘을 모두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편이 없다. 그에게 “당신은 어느 쪽이냐?”라고 물으면 그는 “이쪽도 완전히 옳지 않고, 저쪽도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라고 응수한다. 황희 정승 식의 “그래, 네 말도 옳다”가 아니다. 어느 쪽의 입장에도 기울지 않은 평형을 유지하며, 각각의 명암을 가려낸다.
그를 ‘회색론자’나 안 좋은 의미의 ‘절충주의자’로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그런 단어들은 자신의 주장에 결코 책임지지 않는, 어영부영하는 이들에게나 붙일 라벨이지, 그처럼 치열하게 자료를 읽고, 책을 쓰고, 기꺼이 논쟁에 뛰어드는 사람에게 쓸 말은 아니다.
『한국인 코드』를 낸 강준만 교수를 이메일로 만났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답게 그의 답변은 상세하고도 친절했다.
『한국인 코드』는 기존에 집필하셨던 책들과는 다소 색깔이 달라 보입니다. 새로운 시도로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을 종합하려는 시도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지만, 제겐 일관된 작업입니다. 그간 제가 주로 문제 삼았던 연고?학벌?차별 등의 주제는 『한국인 코드』와 무관치 않지요. 다른 점이 있다면 구성 방식의 차이겠지요. 그간 ‘각론’에 치중해 왔던 걸 ‘총론화’하는 의미라고나 할까요?
한국인에 대해 책을 쓰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그간 늘 해왔던 일입니다. 특별한 동기라거나 문제의식은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신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말인데다 실감이 워낙 뛰어나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1986년에 안식년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인류학자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들이 금요일 저녁에 하는 작은 규모의 토론회에 참석했었다. 그런데 세미나 내용을 담은 책들이 다음해에 출간되어 학회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전 세계의 대학에서 주교재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아차!’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몇 명이 벌이던 열띤 토론, 곧 자신의 사회가 나아갈 길과 개인적 고민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소서사’가 순식간에 ‘보편적 진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메이드 인 서양’ 사회과학 이론과 의제들을 접하고 공부하면서 우리 현실과의 괴리를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이 한국인 탐구로 나아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국인 바로 알기’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뿌리를 찾는 과정, 잊고 있었던 전통적인 것을 바로 알고 새롭게 계승하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 ‘한국인 바로 알기’ 작업은 어떤 것입니까?
맞습니다. 제 문제의식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간 ‘한국인 바로 알기’는 문화인류학, 민속학, 국문학, 심리학 전공자들이 많이 해오셨는데, 이분들의 연구는 사회분석과는 선을 그었지요. 저는 그게 그분들의 겸양 때문이라고 봅니다. 반면 현재의 공공 이슈들을 다루는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은 그런 연구 성과를 활용하지 않지요. 제게 있어서 ‘한국인 바로 알기’ 작업은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가 현실적인 사회분석과는 따로 놀고 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걸 통합해보는 일도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겁니다.
앞 질문과 이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러한 인식이 가지는 ‘의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런 의의에 대해선 이미 여러분들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지금 제가 하는 『한국인 코드』와 같은 작업엔 동의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의식의 뿌리는 같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번 질문엔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김정근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신해볼까 합니다.
“왜 현실은 엄연한 한국의 현실인데 강단의 언어는 외국어인가? 이것은 12년 반 동안이나 내가 익히 알고 지내던 바로 그 외국어가 아닌가? 형식만 한국어를 뒤집어썼지 내용은 외국 내용 그대로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언어의 전제가 되는 현실이 없지 아니한가? 여기가 어디 미국의 51번째 주라도 된단 말인가? 그때 나의 눈앞에는 너무나도 한국적인 도서관 현장이 처연하게 땅 위에 누워 있는데 강단의 언어와 처방은 외국어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병은 보통의 한국병인데 처방은 턱없이 고급이었다. 그것은 첨단의 수입 외제 처방이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 혼돈스럽고 괴로웠다.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우리가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책에서 논한 단일성과 밀집성이라는 두 조건과 획일성, 집중성, 극단성, 조급성, 역동성이라는 한국인의 다섯 가지 속성을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길 원하십니까?
그 두 조건과 다섯 가지 속성은 한림대 김영명 교수가 지적하신 것입니다. 물론 저도 동의하고요. 그걸 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없다 하더라도 저는 자의식은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매우 독선적인 사람이 그 독선이라는 ‘병’은 완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그런 ‘병’이 있다는 걸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건 자신의 독선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거지요. 자신의 장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엔 의외로 자신의 장점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장점을 계발을 못하게 되지요.
우리나라에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탐구가 빈약한 것은 우리의 지식 풍토가 과도하게 서구 지향적이며 과도하게 분업 지향적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비판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가 현실적인 사회분석과는 따로 놀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갖는 걸 전제로 하여 그렇다는 거지요. 서구지향성에 대한 답은 위에 인용한 조한혜정 교수와 김정근 교수의 말씀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분업 지향성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컨대, 지난해 2월 인문사회연구회 연구진은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으로 구분 짓는 이른바 ‘과학의 3분리 모델’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세 분야가 서로 높은 담을 쌓고 지내는 바람에 ‘수많은 정보들만 바다를 이뤄 흘러갈 뿐 지식으로 재가공 되지 못한 채 폐기되고, 구체적 현실분석에서 출발하지 않은 탓에 사회적 복잡성의 증대에 대처능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왜 극복이 어려운가? 대학을 잘 들여다보십시오. ‘칸막이 이기주의’가 매우 심하지요. 특히 대학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교수들에 대한 논문 압력이 심해지면서 교수들은 ‘서바이벌 게임’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논문은 ‘좁고 깊이 있게’ 다루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학자 개인 차원에선 ‘전문주의의 축복’일 수 있지만, 사회 차원에선 ‘전문주의의 재앙’일 수 있지요.
특히 ‘대학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하에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걸 우대하는 건 좋은 점도 있지만 좀 웃기는 면도 있습니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가 경제학 분야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미국의 A급 저널에 논문을 싣기 위해서는 미국 경제학계의 논의의 맥락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은 국내 학술지에 게재할 논문을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연구 방향, 이론적 지향, 문체, 자료 수집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경제학자가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다는 것은 좁은 국민적 맥락을 넘어서 보편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국민적 맥락 속에 깊이 발을 담그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에 대한 사회적 우대는 세계체제의 위계적 질서가 학문 세계 안에서 관철되는 한 양상이다.”
저는 전문주의로 가는 학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가로지르기’를 하는 사람도 소수나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하게 공존하는 게 필요하다는 거지요.
최근, 민족성이나 국가성이 ‘허구’이거나 ‘조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족이나 민족의식이 근대가 만들어낸 일종의 ‘신화’에 가깝다는 것인데요,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그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동의하는 편에 가깝습니다. 많은 분들이 민족주의?국가주의 비판과 ‘한국인 탐구’는 상충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법도 합니다만, 제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민족주의?국가주의 비판은 ‘당위’를 역설하는 것일 뿐 현실 분석은 아닙니다. 당위를 역설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분석을 병행하는 게 필요하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위론이 공중에 붕 뜨게 됩니다. 속된 말로 당위론을 역설하는 사람만 고고하게 되는 꼴밖엔 안 된다는 거지요.
이번 황우석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황우석 지지자들과는 다른 생각?입장을 갖고 있지만 그들을 ‘파시즘’, ‘사교집단’, ‘광신도’, ‘스톡홀름 신드롬’ 등의 단어로 비난하는 것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현실 분석이 결여된 당위론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언급된 한국인의 특성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대집단으로서의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집단이 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화학반응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거친 질문이 되기도 하겠지만, 책에 언급된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은 한국인들은 ‘한국인’이 아닌 걸까요? (무례한 질문인 듯해 죄송합니다.)
‘화학반응’은 한국인들의 타인지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집단이 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상들을 가리킨 겁니다. ‘쏠림’과 ‘소용돌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사회에 난무하는 각종 ‘신드롬’과 ‘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개인에게 물어보면 지역감정 가진 사람 거의 없지만, 집단이 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요.
두 번째 질문은 거칠지도 않고 무례하지도 않습니다. ‘범주의 폭력’ 가능성에 대한 당연한 짜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주의 폭력’, 그거 정말 짜증 나지요. 남자는 어떻고 여자는 어떻다느니, 경상도 사람은 어떻고 전라도 사람은 어떻다느니, 서울대 학생들은 어떻고 고대 학생들은 어떻다느니, 한국인은 어떻고 일본인은 어떻다느니 등등 우리는 매일 일상적으로 그런 말들을 하고 살지요. 그렇지만 그 집단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 중엔 그 집단의 대표적 특성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인 바, 그들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지요.
그런데 비극은 그런 범주화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 한 피해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한 범주화냐가 중요하지요. 저는 성찰을 위한 ‘한국인 코드’를 이야기 한 겁니다.
외국인이 쓴 한국인 연구에 대한 책도 이번 책을 집필하시면서 많이 읽으셨나요? 읽으시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요?
제가 미처 몰라서 빠뜨린 것도 있겠지만, 거의 다 읽었고 지금도 그런 책은 나올 때마다 악착같이 사서 읽습니다. 외국인은 ‘낯설게 보기’가 가능한 분들이라 그분들의 한국사회 관찰에서 얻을 게 많습니다. 물론 역사적?정치경제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부족해 피상적인 관찰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그건 굳이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피상적 관찰’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인 바, 그것만으로도 큰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선생님 책에는 ‘인용’이 참 많이 나오는데요. 글을 쓰면서 인용을 즐겨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맞습니다. 늘 그것 때문에 욕을 먹고 많은 비아냥 선물을 받기도 하지요. 제 팬을 자처하는 어떤 분은 그런 비아냥이 억울하니 인용을 좀 줄이면 안 되겠느냐고 조언까지 하더군요. 그렇지만 제게도 이유가 있거든요. 크게 보아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제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경험 중심의 실감나는 말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제 말로 바꿔 써선 실감이 살지 않습니다. 많은 인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저자의 위상을 높게 평가하는 ‘작가주의’ 취향의 독자들인데, 저는 ‘작가주의’를 거부하는 실용파거든요. 저 자신의 위상이나 이름보다는 독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식 소매상’ 노릇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거지요.
둘째, 제가 생각을 얻은 원문을 제 말로 바꿔 쓰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결벽증 때문입니다. 신문 기사 하나라도 그걸 어떤 기자가 썼는지 그걸 꼭 밝히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는 제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라도 나중에 그와 비슷한 글을 발견하게 되면 그 글을 인용하는 걸로 대체할 정도로 ‘자기 비하’(?)가 심하지요.
셋째, 저자 과대평가에 대한 거부감 때문입니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감정이입적 연극에 반대하면서 관객이 줄거리를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저는 그 원리를 변형시켜 책의 저자에게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시대의 저자들이 어떤 글쓰기 스타일을 구사하건 사실상 ‘사전 편집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죽음’론을 상당 부분 수용해야 한다는 거지요. 저는 디지털 시대에 책이라는 매체는 연극이나 영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나쁘게 말하면 책을 우습게 아는 것이고, 굳이 좋게 말하자면 겸손하고 정직한 거지요. 제 글쓰기 방식에 대한 비판도 저를 과대평가하는 기반 위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어찌 생각하면 고마울 따름이지요.
사람들 중에서는 학계에 몸담은 사람이 현실 사회에 대해 지나치게 논쟁적인 발언을 하거나, 그러한 현실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학문의 순수성을 해친다고 하여 꺼리거나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수의 현실 참여엔 세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오직 말과 글로만 참여한다.
둘째, 말과 글은 아끼면서 몸으로 참여한다. (직접 정관계 진출을 하거나 각종 공적 위원회에 참여한다.)
셋째, 말과 글은 물론 몸으로도 참여한다.
저는 첫 번째 유형입니다만,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소중한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 가지 유형 모두에 다 부작용은 있지요. 최근 서강대 사회학과 김경만 교수는 한국 교수들을 향해 “제발 상아탑에 갇혀 지내라”라고 촉구했지요. 교육학계 원로인 장범모 한림대 석좌교수도 그런 취지의 말씀을 하셨지요. 저는 이분들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앞서 한 말에 비추어 모순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교수들이 죽어라 하고 상아탑만 지켜도 그로 인한 부작용과 문제는 나타나지요. 위 두 분의 말씀은 지금 교수들의 참여 양상에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을 지적한 거라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해법은 ‘각론’ 비판입니다. ‘실명비판’을 하면 더욱 좋고요. 물론 총론 비판도 좋습니다. 적어도 방부제의 가치는 있습니다. ‘주고받는 비판 속에 명랑사회 싹 튼다’라는 게 제 생활신조지요.
선생님은 정력적인 집필가로도 명성이 높으십니다. 바쁜 일상 중에 수많은 집필을 가능하게 한 비결이 궁금합니다. 끊임없이 많은 책을 쓰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시는지요.
리눅스의 아버지라 할 리누스 토발즈의 『리눅스*그냥 재미로』라는 책을 읽다가 제가 공감이 가서 밑줄 그었던 부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어쨌든 나는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나는 오픈 소스를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재미’였다. 재미를 즐기는 방편으로서 오픈 소스를 생각했으니, 분명 이상주의적인 견해는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항상 이상주의자들을 재미있지만 다소 따분하고, 가끔은 무서운 사람들로 생각했다.”
토발즈는 자신이 쓴 책의 제목을 ‘그냥 재미로’라고 붙인 이유에 대해 “적어도 우리가 충분히 진보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게 된다”라고 했더군요. 사실 즐거움 없는 ‘진보를 위한 노력’은 많은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지요. 제가 책을 쓰는 원동력은 ‘그냥 재미로’ 정신입니다.
지금까지 ‘학문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성역 없는 글쓰기 작업을 계속 해오셨습니다. 그런 글쓰기를 하시면서 느끼는 애로는 없으신가요?
한국사회의 ‘고정관념’이 가장 큰 애로지요. 그러나 원래 ‘선구자’(죄송!)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욕먹는 것도 당연하고요. 다 말로만 욕하는 거지, 직접 찾아와서 때리진 않거든요. 우리나라 정말 좋은 나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명암론(明暗論)적인 태도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오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그리고 명암론이 가지는 한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런 오해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는 또 다른 유형의 비판으로 귀결되는데, 전 비판을 하는 자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알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겨레 김효순 편집인이 쓴 칼럼 중에서 아주 감명 깊은 대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지요.
“평소 눈여겨보던 한 중견 기자가 사직을 하고 기업으로 옮겨갔다. 소속 언론사에서 눈에 띄는 자리로만 옮겨다니던 그가 이직을 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는데, 당사자에게 직접 사연을 들어보니 예상하지 않았던 답이 나왔다. 기자로서 남을 비판하는 일의 부담이 버거워졌다는 것이다.”
전 그 기자가 정말 양심적인 기자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비판하면 그 비판은 늘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오지요. 그런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그 이치를 외면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에 대한 비판엔 너그럽지 못한 경우가 많지요. 저도 한동안 그랬었지요. 제 불만은 비판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정확하지 않은 비판이라도 다 그럴 만한 최소한의 근거는 있기에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지요. 그래서 ‘그런 오해들’을 늘 고맙게 생각하면서 제 작업에 반영하려고 애를 쓰지요.
명암론의 한계는 ‘운동’이나 ‘세력화’가 어렵다는 점이지요. 예컨대, 저는 보수언론에 대해서도 3?7제나 4?6제를 주장하거든요. 제가 보수언론에 반대해도 그 반대는 7이나 6에 대한 것이지 3이나 4의 몫은 흔쾌히 인정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반대가 ‘운동’이나 ‘세력화’의 단계로 접어들면 0?10제가 되고 맙니다. 정치도 그런 식이지요. 전 그게 영 불편합니다.
한국 교수 사회에서는 전공에 대해 벽이 높은 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신 후, 사회과학이나 역사 쪽의 연구를 하고 계신데요. 힘들지 않으신가요?
앞서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한국사회엔 ‘가로지르기’의 풍토가 참 척박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칸막이 문화’가 발달한 탓일까요? 그러나 현실을 보십시다.
정치학과나 사회학과에 역사 연구만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예컨대, 서울대 사회학과에 계시다가 한양대 석좌교수로 가신 신용하 교수님은 평생 역사연구만 하신 분인데 그 분은 역사학자일까요 사회학자일까요? 한국전쟁에 대한 탁월한 저서를 쓴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정치학 전공자인데 정치학자일까요 역사학자일까요? 한국언론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는 언론학자일까요 역사학자일까요?
역사학자가 따로 있긴 합니다만, 어느 분야에서건 역사는 연구해야지요. 예컨대, 출판학자 중 누군가는 인터넷 서점의 발달사를 꼭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인 코드』의 ‘머리말’에서 밝혔습니다만, 제가 쓴 『한국 현대사 산책』은 ‘정통’ 역사학자가 쓴다면 결코 건드리지 않을, 건드리기 어려운 주제들을 담고 있지요. 저는 언론사?커뮤니케이션사?문화사?집단의식사에 무게를 두고 그 배경을 밝히는 차원에서 ‘현대사’를 건드리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아닌 만큼 그게 힘들긴 하지만, 또 그만큼 재미와 보람이 큰 점도 있습니다. 그게 명암이 되겠네요.
『한국인 코드』 이후 집필 계획이 궁금합니다.
저는 지금 1990년대의 현대사를 쓰고 있는 중이며, 이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역사까지 쓰려고 합니다. 언론사?커뮤니케이션사?문화사?집단의식사에 무게를 둘 것이니, 주제넘다고 흉보는 분들이 적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국인 코드』의 연작도 계속 낼 생각이고요.
선생님은 연구하고 계신 주제에 대한 자료를 가능한 한 모두 섭렵하시는 것으로 유명하십니다. 특별히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독서를 하시는지, 그럴 때에는 어떤 분야의 책을 주로 읽으시는지요?
저의 모든 독서는 다 즐거움을 위한 겁니다. 그래서 제 기준으론 제가 편식을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연구주제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겠다 싶으면 무조건 책을 사들이고 보지요. 예컨대, 최근 한연주 씨가 쓴 『나는 취하지 않는다 : 강남 일급 룸살롱 대마담의 전략적 세상살이』라는 책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거기서 한국의 접대문화에 대해 많은 걸 건질 수 있었지요. 즐거움은 즐거움인데 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즐거움이라고나 할까요?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특별히 권해주시고 싶은 책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세요.
『한국 현대사 산책』을 권하면 안 될까요? 15권이라 부담이 될까요? 그래도 그만한 보상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저도 어지간히 뻔뻔한 인간이네요. 인터뷰 전반에 걸쳐 저의 뻔뻔함이 드러난 걸 너그럽게 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원래 ‘그냥 재미로’ 사는 인간들의 공통된 특성이 아닌가 합니다.
강준만 교수는 사건에 내재한 옳고 그름, 장점과 단점, 빛과 그늘을 모두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편이 없다. 그에게 “당신은 어느 쪽이냐?”라고 물으면 그는 “이쪽도 완전히 옳지 않고, 저쪽도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라고 응수한다. 황희 정승 식의 “그래, 네 말도 옳다”가 아니다. 어느 쪽의 입장에도 기울지 않은 평형을 유지하며, 각각의 명암을 가려낸다.
그를 ‘회색론자’나 안 좋은 의미의 ‘절충주의자’로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그런 단어들은 자신의 주장에 결코 책임지지 않는, 어영부영하는 이들에게나 붙일 라벨이지, 그처럼 치열하게 자료를 읽고, 책을 쓰고, 기꺼이 논쟁에 뛰어드는 사람에게 쓸 말은 아니다.
『한국인 코드』를 낸 강준만 교수를 이메일로 만났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답게 그의 답변은 상세하고도 친절했다.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지만, 제겐 일관된 작업입니다. 그간 제가 주로 문제 삼았던 연고?학벌?차별 등의 주제는 『한국인 코드』와 무관치 않지요. 다른 점이 있다면 구성 방식의 차이겠지요. 그간 ‘각론’에 치중해 왔던 걸 ‘총론화’하는 의미라고나 할까요?
한국인에 대해 책을 쓰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그간 늘 해왔던 일입니다. 특별한 동기라거나 문제의식은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신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말인데다 실감이 워낙 뛰어나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1986년에 안식년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인류학자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들이 금요일 저녁에 하는 작은 규모의 토론회에 참석했었다. 그런데 세미나 내용을 담은 책들이 다음해에 출간되어 학회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전 세계의 대학에서 주교재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아차!’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몇 명이 벌이던 열띤 토론, 곧 자신의 사회가 나아갈 길과 개인적 고민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소서사’가 순식간에 ‘보편적 진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메이드 인 서양’ 사회과학 이론과 의제들을 접하고 공부하면서 우리 현실과의 괴리를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이 한국인 탐구로 나아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국인 바로 알기’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뿌리를 찾는 과정, 잊고 있었던 전통적인 것을 바로 알고 새롭게 계승하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 ‘한국인 바로 알기’ 작업은 어떤 것입니까?
맞습니다. 제 문제의식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간 ‘한국인 바로 알기’는 문화인류학, 민속학, 국문학, 심리학 전공자들이 많이 해오셨는데, 이분들의 연구는 사회분석과는 선을 그었지요. 저는 그게 그분들의 겸양 때문이라고 봅니다. 반면 현재의 공공 이슈들을 다루는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은 그런 연구 성과를 활용하지 않지요. 제게 있어서 ‘한국인 바로 알기’ 작업은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가 현실적인 사회분석과는 따로 놀고 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걸 통합해보는 일도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겁니다.
그런 의의에 대해선 이미 여러분들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지금 제가 하는 『한국인 코드』와 같은 작업엔 동의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의식의 뿌리는 같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번 질문엔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김정근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신해볼까 합니다.
“왜 현실은 엄연한 한국의 현실인데 강단의 언어는 외국어인가? 이것은 12년 반 동안이나 내가 익히 알고 지내던 바로 그 외국어가 아닌가? 형식만 한국어를 뒤집어썼지 내용은 외국 내용 그대로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언어의 전제가 되는 현실이 없지 아니한가? 여기가 어디 미국의 51번째 주라도 된단 말인가? 그때 나의 눈앞에는 너무나도 한국적인 도서관 현장이 처연하게 땅 위에 누워 있는데 강단의 언어와 처방은 외국어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병은 보통의 한국병인데 처방은 턱없이 고급이었다. 그것은 첨단의 수입 외제 처방이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 혼돈스럽고 괴로웠다.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우리가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책에서 논한 단일성과 밀집성이라는 두 조건과 획일성, 집중성, 극단성, 조급성, 역동성이라는 한국인의 다섯 가지 속성을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길 원하십니까?
그 두 조건과 다섯 가지 속성은 한림대 김영명 교수가 지적하신 것입니다. 물론 저도 동의하고요. 그걸 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없다 하더라도 저는 자의식은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매우 독선적인 사람이 그 독선이라는 ‘병’은 완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그런 ‘병’이 있다는 걸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건 자신의 독선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거지요. 자신의 장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엔 의외로 자신의 장점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장점을 계발을 못하게 되지요.
우리나라에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탐구가 빈약한 것은 우리의 지식 풍토가 과도하게 서구 지향적이며 과도하게 분업 지향적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비판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가 현실적인 사회분석과는 따로 놀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갖는 걸 전제로 하여 그렇다는 거지요. 서구지향성에 대한 답은 위에 인용한 조한혜정 교수와 김정근 교수의 말씀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분업 지향성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컨대, 지난해 2월 인문사회연구회 연구진은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으로 구분 짓는 이른바 ‘과학의 3분리 모델’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세 분야가 서로 높은 담을 쌓고 지내는 바람에 ‘수많은 정보들만 바다를 이뤄 흘러갈 뿐 지식으로 재가공 되지 못한 채 폐기되고, 구체적 현실분석에서 출발하지 않은 탓에 사회적 복잡성의 증대에 대처능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왜 극복이 어려운가? 대학을 잘 들여다보십시오. ‘칸막이 이기주의’가 매우 심하지요. 특히 대학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교수들에 대한 논문 압력이 심해지면서 교수들은 ‘서바이벌 게임’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논문은 ‘좁고 깊이 있게’ 다루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학자 개인 차원에선 ‘전문주의의 축복’일 수 있지만, 사회 차원에선 ‘전문주의의 재앙’일 수 있지요.
특히 ‘대학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하에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걸 우대하는 건 좋은 점도 있지만 좀 웃기는 면도 있습니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가 경제학 분야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미국의 A급 저널에 논문을 싣기 위해서는 미국 경제학계의 논의의 맥락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은 국내 학술지에 게재할 논문을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연구 방향, 이론적 지향, 문체, 자료 수집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경제학자가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다는 것은 좁은 국민적 맥락을 넘어서 보편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국민적 맥락 속에 깊이 발을 담그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에 대한 사회적 우대는 세계체제의 위계적 질서가 학문 세계 안에서 관철되는 한 양상이다.”
저는 전문주의로 가는 학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가로지르기’를 하는 사람도 소수나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하게 공존하는 게 필요하다는 거지요.
최근, 민족성이나 국가성이 ‘허구’이거나 ‘조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족이나 민족의식이 근대가 만들어낸 일종의 ‘신화’에 가깝다는 것인데요,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그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동의하는 편에 가깝습니다. 많은 분들이 민족주의?국가주의 비판과 ‘한국인 탐구’는 상충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법도 합니다만, 제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민족주의?국가주의 비판은 ‘당위’를 역설하는 것일 뿐 현실 분석은 아닙니다. 당위를 역설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분석을 병행하는 게 필요하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위론이 공중에 붕 뜨게 됩니다. 속된 말로 당위론을 역설하는 사람만 고고하게 되는 꼴밖엔 안 된다는 거지요.
이번 황우석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황우석 지지자들과는 다른 생각?입장을 갖고 있지만 그들을 ‘파시즘’, ‘사교집단’, ‘광신도’, ‘스톡홀름 신드롬’ 등의 단어로 비난하는 것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현실 분석이 결여된 당위론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언급된 한국인의 특성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대집단으로서의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집단이 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화학반응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거친 질문이 되기도 하겠지만, 책에 언급된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은 한국인들은 ‘한국인’이 아닌 걸까요? (무례한 질문인 듯해 죄송합니다.)
‘화학반응’은 한국인들의 타인지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집단이 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상들을 가리킨 겁니다. ‘쏠림’과 ‘소용돌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사회에 난무하는 각종 ‘신드롬’과 ‘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개인에게 물어보면 지역감정 가진 사람 거의 없지만, 집단이 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요.
두 번째 질문은 거칠지도 않고 무례하지도 않습니다. ‘범주의 폭력’ 가능성에 대한 당연한 짜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주의 폭력’, 그거 정말 짜증 나지요. 남자는 어떻고 여자는 어떻다느니, 경상도 사람은 어떻고 전라도 사람은 어떻다느니, 서울대 학생들은 어떻고 고대 학생들은 어떻다느니, 한국인은 어떻고 일본인은 어떻다느니 등등 우리는 매일 일상적으로 그런 말들을 하고 살지요. 그렇지만 그 집단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 중엔 그 집단의 대표적 특성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인 바, 그들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지요.
그런데 비극은 그런 범주화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 한 피해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한 범주화냐가 중요하지요. 저는 성찰을 위한 ‘한국인 코드’를 이야기 한 겁니다.
외국인이 쓴 한국인 연구에 대한 책도 이번 책을 집필하시면서 많이 읽으셨나요? 읽으시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요?
제가 미처 몰라서 빠뜨린 것도 있겠지만, 거의 다 읽었고 지금도 그런 책은 나올 때마다 악착같이 사서 읽습니다. 외국인은 ‘낯설게 보기’가 가능한 분들이라 그분들의 한국사회 관찰에서 얻을 게 많습니다. 물론 역사적?정치경제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부족해 피상적인 관찰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그건 굳이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피상적 관찰’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인 바, 그것만으로도 큰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맞습니다. 늘 그것 때문에 욕을 먹고 많은 비아냥 선물을 받기도 하지요. 제 팬을 자처하는 어떤 분은 그런 비아냥이 억울하니 인용을 좀 줄이면 안 되겠느냐고 조언까지 하더군요. 그렇지만 제게도 이유가 있거든요. 크게 보아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제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경험 중심의 실감나는 말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제 말로 바꿔 써선 실감이 살지 않습니다. 많은 인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저자의 위상을 높게 평가하는 ‘작가주의’ 취향의 독자들인데, 저는 ‘작가주의’를 거부하는 실용파거든요. 저 자신의 위상이나 이름보다는 독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식 소매상’ 노릇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거지요.
둘째, 제가 생각을 얻은 원문을 제 말로 바꿔 쓰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결벽증 때문입니다. 신문 기사 하나라도 그걸 어떤 기자가 썼는지 그걸 꼭 밝히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는 제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라도 나중에 그와 비슷한 글을 발견하게 되면 그 글을 인용하는 걸로 대체할 정도로 ‘자기 비하’(?)가 심하지요.
셋째, 저자 과대평가에 대한 거부감 때문입니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감정이입적 연극에 반대하면서 관객이 줄거리를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저는 그 원리를 변형시켜 책의 저자에게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시대의 저자들이 어떤 글쓰기 스타일을 구사하건 사실상 ‘사전 편집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죽음’론을 상당 부분 수용해야 한다는 거지요. 저는 디지털 시대에 책이라는 매체는 연극이나 영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나쁘게 말하면 책을 우습게 아는 것이고, 굳이 좋게 말하자면 겸손하고 정직한 거지요. 제 글쓰기 방식에 대한 비판도 저를 과대평가하는 기반 위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어찌 생각하면 고마울 따름이지요.
사람들 중에서는 학계에 몸담은 사람이 현실 사회에 대해 지나치게 논쟁적인 발언을 하거나, 그러한 현실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학문의 순수성을 해친다고 하여 꺼리거나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수의 현실 참여엔 세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오직 말과 글로만 참여한다.
둘째, 말과 글은 아끼면서 몸으로 참여한다. (직접 정관계 진출을 하거나 각종 공적 위원회에 참여한다.)
셋째, 말과 글은 물론 몸으로도 참여한다.
저는 첫 번째 유형입니다만,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소중한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 가지 유형 모두에 다 부작용은 있지요. 최근 서강대 사회학과 김경만 교수는 한국 교수들을 향해 “제발 상아탑에 갇혀 지내라”라고 촉구했지요. 교육학계 원로인 장범모 한림대 석좌교수도 그런 취지의 말씀을 하셨지요. 저는 이분들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앞서 한 말에 비추어 모순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교수들이 죽어라 하고 상아탑만 지켜도 그로 인한 부작용과 문제는 나타나지요. 위 두 분의 말씀은 지금 교수들의 참여 양상에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을 지적한 거라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해법은 ‘각론’ 비판입니다. ‘실명비판’을 하면 더욱 좋고요. 물론 총론 비판도 좋습니다. 적어도 방부제의 가치는 있습니다. ‘주고받는 비판 속에 명랑사회 싹 튼다’라는 게 제 생활신조지요.
선생님은 정력적인 집필가로도 명성이 높으십니다. 바쁜 일상 중에 수많은 집필을 가능하게 한 비결이 궁금합니다. 끊임없이 많은 책을 쓰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시는지요.
리눅스의 아버지라 할 리누스 토발즈의 『리눅스*그냥 재미로』라는 책을 읽다가 제가 공감이 가서 밑줄 그었던 부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어쨌든 나는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나는 오픈 소스를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재미’였다. 재미를 즐기는 방편으로서 오픈 소스를 생각했으니, 분명 이상주의적인 견해는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항상 이상주의자들을 재미있지만 다소 따분하고, 가끔은 무서운 사람들로 생각했다.”
토발즈는 자신이 쓴 책의 제목을 ‘그냥 재미로’라고 붙인 이유에 대해 “적어도 우리가 충분히 진보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게 된다”라고 했더군요. 사실 즐거움 없는 ‘진보를 위한 노력’은 많은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지요. 제가 책을 쓰는 원동력은 ‘그냥 재미로’ 정신입니다.
지금까지 ‘학문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성역 없는 글쓰기 작업을 계속 해오셨습니다. 그런 글쓰기를 하시면서 느끼는 애로는 없으신가요?
한국사회의 ‘고정관념’이 가장 큰 애로지요. 그러나 원래 ‘선구자’(죄송!)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욕먹는 것도 당연하고요. 다 말로만 욕하는 거지, 직접 찾아와서 때리진 않거든요. 우리나라 정말 좋은 나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명암론(明暗論)적인 태도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오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그리고 명암론이 가지는 한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런 오해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는 또 다른 유형의 비판으로 귀결되는데, 전 비판을 하는 자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알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겨레 김효순 편집인이 쓴 칼럼 중에서 아주 감명 깊은 대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지요.
“평소 눈여겨보던 한 중견 기자가 사직을 하고 기업으로 옮겨갔다. 소속 언론사에서 눈에 띄는 자리로만 옮겨다니던 그가 이직을 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는데, 당사자에게 직접 사연을 들어보니 예상하지 않았던 답이 나왔다. 기자로서 남을 비판하는 일의 부담이 버거워졌다는 것이다.”
전 그 기자가 정말 양심적인 기자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비판하면 그 비판은 늘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오지요. 그런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그 이치를 외면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에 대한 비판엔 너그럽지 못한 경우가 많지요. 저도 한동안 그랬었지요. 제 불만은 비판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정확하지 않은 비판이라도 다 그럴 만한 최소한의 근거는 있기에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지요. 그래서 ‘그런 오해들’을 늘 고맙게 생각하면서 제 작업에 반영하려고 애를 쓰지요.
명암론의 한계는 ‘운동’이나 ‘세력화’가 어렵다는 점이지요. 예컨대, 저는 보수언론에 대해서도 3?7제나 4?6제를 주장하거든요. 제가 보수언론에 반대해도 그 반대는 7이나 6에 대한 것이지 3이나 4의 몫은 흔쾌히 인정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반대가 ‘운동’이나 ‘세력화’의 단계로 접어들면 0?10제가 되고 맙니다. 정치도 그런 식이지요. 전 그게 영 불편합니다.
한국 교수 사회에서는 전공에 대해 벽이 높은 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신 후, 사회과학이나 역사 쪽의 연구를 하고 계신데요. 힘들지 않으신가요?
앞서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한국사회엔 ‘가로지르기’의 풍토가 참 척박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칸막이 문화’가 발달한 탓일까요? 그러나 현실을 보십시다.
정치학과나 사회학과에 역사 연구만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예컨대, 서울대 사회학과에 계시다가 한양대 석좌교수로 가신 신용하 교수님은 평생 역사연구만 하신 분인데 그 분은 역사학자일까요 사회학자일까요? 한국전쟁에 대한 탁월한 저서를 쓴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정치학 전공자인데 정치학자일까요 역사학자일까요? 한국언론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는 언론학자일까요 역사학자일까요?
역사학자가 따로 있긴 합니다만, 어느 분야에서건 역사는 연구해야지요. 예컨대, 출판학자 중 누군가는 인터넷 서점의 발달사를 꼭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인 코드』의 ‘머리말’에서 밝혔습니다만, 제가 쓴 『한국 현대사 산책』은 ‘정통’ 역사학자가 쓴다면 결코 건드리지 않을, 건드리기 어려운 주제들을 담고 있지요. 저는 언론사?커뮤니케이션사?문화사?집단의식사에 무게를 두고 그 배경을 밝히는 차원에서 ‘현대사’를 건드리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아닌 만큼 그게 힘들긴 하지만, 또 그만큼 재미와 보람이 큰 점도 있습니다. 그게 명암이 되겠네요.
『한국인 코드』 이후 집필 계획이 궁금합니다.
저는 지금 1990년대의 현대사를 쓰고 있는 중이며, 이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역사까지 쓰려고 합니다. 언론사?커뮤니케이션사?문화사?집단의식사에 무게를 둘 것이니, 주제넘다고 흉보는 분들이 적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국인 코드』의 연작도 계속 낼 생각이고요.
선생님은 연구하고 계신 주제에 대한 자료를 가능한 한 모두 섭렵하시는 것으로 유명하십니다. 특별히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독서를 하시는지, 그럴 때에는 어떤 분야의 책을 주로 읽으시는지요?
저의 모든 독서는 다 즐거움을 위한 겁니다. 그래서 제 기준으론 제가 편식을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연구주제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겠다 싶으면 무조건 책을 사들이고 보지요. 예컨대, 최근 한연주 씨가 쓴 『나는 취하지 않는다 : 강남 일급 룸살롱 대마담의 전략적 세상살이』라는 책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거기서 한국의 접대문화에 대해 많은 걸 건질 수 있었지요. 즐거움은 즐거움인데 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즐거움이라고나 할까요?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특별히 권해주시고 싶은 책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세요.
『한국 현대사 산책』을 권하면 안 될까요? 15권이라 부담이 될까요? 그래도 그만한 보상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저도 어지간히 뻔뻔한 인간이네요. 인터뷰 전반에 걸쳐 저의 뻔뻔함이 드러난 걸 너그럽게 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원래 ‘그냥 재미로’ 사는 인간들의 공통된 특성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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