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감상적인 수학의 세계 - 〈Numb3rs〉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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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 수억 달러를 들여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고도 망하는 블록버스터가 안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재미있게 만들고도 칭찬 받기가 쉽지 않고, 못하면 단단히 망신살만 뻗치는 것이 이 경우입니다. 반면에 아이디어와 구성의 탄탄함이 제작비보다 훨씬 더 눈에 띄고 이슈가 되는 작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런 소재로 어떻게 얘기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싶어서 위험천만해 보이면서도 보기 좋게 본때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지요. 과학 수사물의 변주에 이제 하다하다 못해 수학까지 끌어들이다니요. CBS의 〈Numb3rs〉는 과학 수사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 네트워크가 단단한 자기 과신에 빠져들었으며, 잘 팔리는 재료에 양념 구성만 약간 바꾸어 쉽게 팔아먹겠다는 매너리즘에 극도로 빠져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일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완전히 넘겨짚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학을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Numb3rs〉
“에어디쉬 번호 ∞”, 즉 수학과는 담 쌓고 지내는 시청자들까지 빨아들이는 〈Numb3rs〉의 흡입력은 놀랍고도 놀랍습니다. 오프닝 크레디트에 나오는 “우리는 매일 수학을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날씨를 예측하고 시간을 알아보고 돈을 다루기 위해서”라는 독백이야 수긍하지 못할 점이 전혀 없지만, 인간의 행동과 인간 사이의 일을 숫자로 해석하고 나타낸다는 것이 언뜻 와 닿지 않는 괴리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닙니까. 하지만 또 G. H. 하디가 말했다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름다운 시의 정의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름다운 시를 읽었을 때 그 아름다움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는데, 그 아름다움에 대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다고 해서 아름답다고 느끼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그런 시적인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Numb3rs〉에 있습니다. 단순히 공식과 방정식이 아닌 논리와 이성이라는 수학의 세계, 종종 마주치곤 하는 인문학적 궤변의 세계에서 벗어나 정신을 이용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가장 큰 신비에 침잠해 보는 그 안도감이라니요. 드라마에서 나오는 정수론과 방정식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Numb3rs〉는 숫자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드라마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과 반대되는 이론이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시청자들마저 있습니다.

‘넘버스’라고 읽어요. 숫자 3은 영어 대문자 E를 180도 회전시킨 것이랍니다.
뭐, 모르는 게 약인 경우에 해당된다는 주장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가 수학적으로 허투루 하고 있다거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칠판 위에 가득 휘갈겨져 있는 방정식은 그럴듯한 소품이 아니라 진짜이며, 에피소드에 나오는 사건에 분명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FBI 요원인 형 돈 엡스와 수학 신동에서 세계적인 명망을 얻는 천재로 거듭난 동생 찰리 엡스가 인간의 행위, 특히 범죄 행위를 수학을 통해 통역하려고 합니다. 이 드라마는 잘되는 드라마의 특징 가운데 하나, 바로 캐릭터의 완성도도 갖추고 있습니다. 형제의 아버지까지 포함한 엡스 가족은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고 애틋하고 정감 있는 가족애를 보여주고 있지요. 〈앨리 맥빌〉의 괴짜 변호사 존 케이지를 맡았던 피터 맥니콜은 물리학자이자 찰리의 동료 래리 플라인하르트로 나오는데, 존 케이지에서 그다지 변모하지 않았음에도 기이할 만큼 질리지 않는 연기를 선보입니다.

수사 드라마이기는 하지만, 중심인물들이 엡스 가족이기 때문에 돈 엡스의 FBI 동료들은 존재감이 그다지 강하게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도시계획자 출신이자 최근에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살며 1960년~1970년대의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 앨런 엡스와 “정부의 앞잡이” 큰 아들 돈 엡스, (거의) 오로지 숫자만을 사랑하는 막내 찰리 엡스, 이렇게 3부자가 1900년대 초반에 유행했다던가 하는 크래프츠먼 스타일의 멋진 집에서 알콩달콩 하는 모습이 흐뭇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배우 살인미소 1위가 〈앨리어스〉의 제니퍼 가너라면, 남자배우 1위에 등극하고도 남을 돈 엡스의 가히 판타스틱한 미소와 더불어,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이라는 영화감독 형제가 제작하는 이 드라마에서 그리는 형제간의 관계도 어느 것 하나 과장하는 것 없이 참으로 섬세합니다.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 형제가 형제에 대한 드라마를 만들었답니다.
과학 영재로 자라서 열세 살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 이래로 질시와 부러움, 견제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있지만, 형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에 더없는 의미를 두는 수학 천재 찰리는 연필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수학의 세계와 속세 중에서도 인간의 가장 지저분한 치부를 망설임 없이 들여다보는 FBI에서의 일의 세계 사이를 오고 갑니다. 필즈 메달 수상을 거부하고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다는 러시아 수학자 페렐만, 완벽한 수학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켜버린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쉬, 수학의 발전을 위해 어떤 수학자보다도 공동연구를 많이 하며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집도 절도 없이 살았던 수학계의 구루 폴 에어디쉬, 여러모로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임을 증명해 보였던 폴 에어디쉬의 모습이 찰리의 모습에 불현듯 겹쳐질 때가 있습니다. 몹시 평범한 사람 같지만, 발명이 아니라 이미 우주에 널려 있는 수학적 진실의 발견을 업으로 삼고 사는 수학자의 고독과 괴짜 기질이 언뜻언뜻 드러나지요.

크리에이터인 니콜라스 팔라치와 셔릴 휴튼은 첫 작품인 이 드라마로 과학에 대한 공공의 이해를 증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칼 세이건 상을 수상했습니다. 미국 일선 수학교사들은 이 드라마를 교재 삼아 학생들의 흥미를 돋운다고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참 교육적이고 건전한 드라마인 셈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하느님의 책”에 드는 발견을 하며 수학적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은 확실히 맛을 보여주니까요. 이런 드라마가 가능한 것이 물론 전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미국의 풍요로운 제작 여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풍요로운 제작 여건만큼이나 처절한 경쟁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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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ckingmage

2006.10.08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이었나...? 거기서 저기 수학과 관련된거 봐준다고 어디에 나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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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da5

2006.09.13

처음 시작할땐 몰랐지요. 돈엡스의 미소...ㅎㅎ 1시즌 거의 끝낼 무렵엔 그의 미소에 떨리더라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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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2006.09.04

자막이 늦게 올라와서 덜덜거리가 놓아버린 넘버스지만 이렇게 글을 읽고나니 다시 또 봐야 할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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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실

홍익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어렸을 때의 꿈은 건축가였지만,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를 본 후부터는 무언가 집요하게 조사하고 탐구하며 결실을 맺는 직업, 예컨대 평전 작가 같은 것에 대한 갈망이 생겼고, 그 소망은 가슴 한켠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를 참 좋아해서 한때 다큐멘터리 작가가 되겠다고 캠코더를 메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한국과 미국 보스턴에 머물며 10여 년간 출판기획과 취재를 하면서 대중 문화 자유기고가와 영미권 도서 번역가로 활동해왔다. 미국 드라마 시리즈에 대해서 그녀만큼 깊이 있으면서 재미있게 쓰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미국 드라마 평론가이기도 하다.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일본의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 골프채는 잡아본 적도 없지만 18홀 라운딩을 함께 하고픈 사람을 한 명 고르라면 단연코 메이저리그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즈다. 향후 배워보고 싶은 것으로는 "브라더 미싱으로 예쁜 원피스 만들기" "매킨토시로 그림 그리기" "나이스한 강아지 그루밍 기술" 등이 있으며,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으로는 "야구장의 몇 만 관중 앞에서 시구하기" "험머 타고 북미 대륙횡단하기" "플레이 스테이션 위닝 일레븐 게임에서 오버헤드킥 성공시키기" 등이 있다. 국내 리그는 물론 메이저리그 야구 마니아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혈 팬이다. 특히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좋아해서, 그의 플레이를 보려고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전 시즌을 관전하기도 했다. 직접 쓴 책으로는 『미드 100배 즐기기 시즌 1』, 『위트 상식사전 프라임』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야구 교과서』, 『첼시』, 『리버풀』, 『유쾌한 깨달음』, 『자연과학 상식사전』, 『디자인이 만든 세상』, 『하버드가 지배한다』, 『마이 히어로』,『훈육의 심리학』, 『나 누주드, 열 살 이혼녀』, 『마테크』, 『그 여자의 살인법』, 『냉동 인간』, 『수비의 기술』, 『외지인의 죽음』 『매춘부의 죽음』, 『대식가의 죽음』, 『잔소리꾼의 죽음』, 『돌런갱어 시리즈』(전5권), 『몸을 긋는 소녀』, 『언더베리의 마녀들』, 『뼈 모으는 소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