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ER〉 시대의 메디컬 드라마 - 〈그레이 아나토미〉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6.02.21
작게
크게
한국이건 미국이건, 예나 지금이나 드라마의 소재로서 끊임없이 반김을 받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의사들의 삶”입니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의사들의 삶”을 극화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사란 직업은 가장 돈을 잘 버는 전문직 종사자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여지가 가장 풍부한 직업군의 하나입니다.

일반인들이 병원에서 의사를 대하는 심리는 전적인 기대감과 일방적인 신뢰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찌 보면 현대의 직업군 중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직업을 찾으라 하면 의사가 그 상위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하는 추측은 아주 온당한 편견입니다. 게다가 윤리와 정의의 문제를 표현하기에도 의사라는 직업만큼이나 수월한 구조를 지닌 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생과 사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사명은 치정극의 윤리의식의 수위를 넘어서는 대단한 재미를 안겨주며, 실낱같은 삶에 대한 희망을 현실에서 실현시켜 주는 전문기술은 오히려 법정 드라마의 유려한 설레발보다 때로 더 감동적인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미국 메디컬 드라마의 수준을 전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은 단연코 1994년에 시작된 〈ER〉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과 스티븐 스필버그가 손을 잡고 만든 이 출중한 드라마는 메디컬 드라마의 체계와 골격을 완성했다는 평뿐 아니라, 드라마의 완성도에 필요한 눈높이 자체를 몇 단계 더 승격시켰다는 총평을 받고 있습니다. 응급실의 긴박한 숨소리와 땀 한 방울까지도 놓치지 않는 생생한 현장감에, 현장을 지키는 의사들의 철저한 직업의식, 거기에 시즌 초반부터 두드러졌던 효과적인 캐릭터 창출이 융합되어, 메디컬 드라마 〈ER〉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롱런을 하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ER〉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조지 클루니가 재계약을 거부하고 빠진 시점에서부터 〈ER〉 또한 예의 그 폭풍 같은 환호를 뒤로 한 채 조금씩 누수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포스트 〈ER〉 시대’의 메디컬 드라마의 판도는 예상보다 빠르고 탄탄하게, 게다가 아주 만족스럽게 진행되었습니다. FOX의 〈하우스〉와 ABC의 〈그레이 아나토미〉가 그 선두주자들인데, 그 둘 중에서도 ‘포스트 〈ER〉 시대’의 적자를 자처할 수 있는 드라마가 바로 〈그레이 아나토미〉입니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이제 막 의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인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사회 초년병들, 그 중에서도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방법”에 대한 의사들의 해결책이 “인턴 시키면 된다”라는 말이 있듯, 의사로서의 생애에서 가장 얄궂고 지난한 시기를 맞이하게 된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의 인턴 다섯 명의 생활을 그린 작품이지요. 메디컬 드라마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캐릭터를 인턴, 즉 전문의가 아닌 수련의로 설정한 〈그레이 아나토미〉는 기존의 메디컬 드라마보다 좀 더 젊은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그 기반을 효과적으로 풀어내듯 〈그레이 아나토미〉는 오프닝 인트로에서부터 아주 감각적인 영상과 매혹적인 음악이 사용됩니다. 뿐만 아니라 극중 분위기에 잘 들어맞는 최신 팝음악은 감각적인 영상미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캐릭터 라인은 다섯 명의 인턴과 그들의 선배 의사들입니다. 의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외과의로 추앙받는 엄마를 둔 메레디스 그레이는 전체 에피소드에서 대부분의 내레이션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거기에 네 명의 주연이자 조연인 햇병아리 인턴 1년차 캐릭터가 있습니다. 약간 어수룩해 보여서 쉽게 농담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힘들고 외로울 때면 신생아실에서 아기들을 보며 미소 짓는 조지 오말리, 대학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속옷 모델을 하기도 했던 귀여운 이미지의 이지, 한국계 캐나다 배우로서 최고를 놓치지 않기 위해 때로는 심술과 시기마저 서슴지 않는 크리스티나 양, 미국 유수 대학에 유학 온 전형적인 러시아 갑부의 아들처럼 행동하는 알렉스 카이브가 그들입니다.

다섯 명의 1년차 인턴들은 선배 의사들에게 인정받아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앞길이 그리 순탄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을 담당하는 바로 위 레지던트는 과장 의사들에게도 소신을 굴하지 않을 정도로 뚝심이 있고, 인턴들에게는 나치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미란다 베일리입니다. 게다가 메레디스는 인턴 출근 바로 전 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원 나잇 스탠드를 즐겼는데, 그 남자가 다름 아닌 병원의 외과과장인 데릭 셰퍼드였답니다. 너무 어리고 착해 보이는 인상에 힘이 좀 약해 보였지만, 의외로 멋있게 늙어가고 있는 배우 패트릭 뎀시가 분하고 있지요.

이 드라마도 보통의 메디컬 드라마처럼 단막극 형태로 그때그때의 에피소드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좀 더 강한 중독성을 안겨주는 면모가 있답니다. 〈ER〉도 의사들의 삶을 실감나고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고 캐릭터와 구성 등이 이보다 더 탄탄할 수는 없어서, 그보다 더 재미있는 메디컬 드라마는 나오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감탄을 자아냈던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그레이 아나토미〉는 그런 지존 같은 존재가 있는 상태에서도 그에 필적할 만한 드라마를 만났다는 의외의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우선 젊어진 의사들의 이야기는 자극적이고, 덜 익은 풋풋함이 주는 신선함이 있지요. 여기에 정치판을 방불케 하는 인턴들의 생존경쟁도 강력한 양념이 됩니다.

능력을 인정받는 유능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암투에, 일선에서 처음으로 직접 접하게 된 환자들의 고통에 대응하는 모습에서, 유능함에 인간성을 더하는 의사가 되려는 과정에서, 각각의 개성과 드라마가 가미되어 저 높은 전문 직업 의사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한껏 충족시켜 줍니다. 유능한 냉혈한은 보통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업계보다 생과 사를 다루는 의료계는 실수가 용인 받을 수 있는 여지가 훨씬 팍팍하지요.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풋내기 인턴들이 그 첨예한 긴장감 속에서 의사로서, 찌르면 피 나오는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좌충우돌이 겹겹의 매력을 선사합니다. 칼잠만으로 1년을 나야 하는 인턴들이지만, 젊은 혈기로 벌이는 애정행각도 당연히 조미료가 되어주고요.

〈그레이 아나토미〉의 파일럿 에피소드의 시작은 르네 젤위거의 비음과 인상을 절묘하게 닮은 메레디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됩니다.

“게임이라는 건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가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의 엄마는 최고 중 하나였다. 그에 비해 난 완전 꽝이다.” 그리고 마지막 즈음 역시 메레디스의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향후 전체적인 드라마의 방향을 지시해 줍니다. “내가 외과의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단 한 가지도 생각해 낼 수 없다. 하지만 그만둬야 하는 이유는 수천 가지나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나 보다. 우리 손에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다. 게임이라고 하기엔 너무한 순간도 있다. 그럴 땐 받아들이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거나, 돌아서서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 그만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이 게임이 좋다.”

메레디스의 독백에서 읽을 수 있듯 〈그레이 아나토미〉는 자신들이 선택한 의사라는 게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풋내기 인턴들의 일과 사랑의 세레나데입니다. 그것도 아주 달콤하고 매혹적인 유혹의 세레나데 말이에요.

관련 상품 보기

『E.R 이알 시즌 1 박스 세트』 조지 클루니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5년 05월 에미상 최우수 드라마 시리즈 부문을 수상한 E.R.은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에 비평가들의 갈채를 받기도 한 보기드문 TV시리즈이다. <쥬라기 공원>, <트위스터>, <코마>등의 베스트셀러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원작과 기획을 통해 탄생한 이 작품은 시카고의 한 병원 응급실의 젊은 의사들에 초점을 맞춘 본격 메디컬 드라마!

『E.R 이알 시즌 2 박스 세트』 조지 클루니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5년 05월 에미상 수상에 빛나는 감동의 메디컬 드라마. 94년 이후, 현재까지 미국에서 최고의 시청률 기록, 국내 방영 이후, 두터운 마니아를 모아온 본격 메디컬 드라마!!


『E.R 이알 시즌 3 박스 세트』 조지 클루니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5년 05월 Ep.1 - Dr.Carter, I Presume 일리노이 주 시카고 쿡 카운티 종합 병원. 오늘은 존 카터가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외과 인턴으로서 첫 근무를 시작하는 날이다. 이제 정식으로 의사가 됐다는 생각에 카터의 마음은 기대로 가득차지만, 첫날부터 독사 같은 벤튼의 다그침에 앞날은 어둡기만 한데...

215의 댓글
User Avatar

dulla1004

2019.07.30

*****
마감시간내에 작성하여 바로 아래에 제출하였으나
팟빵아이디를 누락하여 동일한 내용에 팟빵아이디를 추가하여 다시 신청합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

늘 뵙고 싶던 유시민 작가님과의 시간을 간절히 바랍니다
28년전 대학생때 유럽 교환학생 1년의 시기를 거치며, 당시 어린나이에 직접 유럽의 문화를 체험하며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작가님과의 소중한 만남으로
지금의 제 생각과 경험을 통한 관점으로 유시민 작가님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빡빡하고 건조한 제 삶에 잠시나마 생각의 여유를 갖게 되는 시간이 제게 주어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팟빵 아이디: dulla1004@yahoo.co.kr
답글
0
0
User Avatar

dulla1004

2019.07.29

늘 뵙고 싶던 유시민 작가님과의 시간을 간절히 바랍니다
28년전 대학생때 유럽 교환학생 1년의 시기를 거치며, 당시 어린나이에 직접 유럽의 문화를 체험하며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작가님과의 소중한 만남으로
지금의 제 생각과 경험을 통한 관점으로 유시민 작가님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빡빡하고 건조한 제 삶에 잠시나마 생각의 여유를 갖게 되는 시간이 제게 주어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From Heri Hwang
답글 (1)
0
0
User Avatar

tmdgns4ever

2019.07.29

경쟁률이 치열해서 다음 기회를 기다릴까하다가 마감이 몇 분 안 남은 이 시간에 용기내 신청해봅니다.
작가로서의 유시민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가까이에서 들어보고싶은 마음에요. 무엇보다 여행기여서 더욱 더 친근합니다. 생각하는 것을 말로 너무나 아름답고 명료하게 표현하시는 선생님. 유시민의 글쓰기 때부터 팬이었어요. 부디 만나뵐 구 있기를 바래봅니다. 인생의 순간의 힘을 믿어보러구요^^

팟빵아이디:shyn486@naver.com
답글
0
0

더 보기

arrow down
Writer Avatar

채널예스

채널예스는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책, 영화, 공연, 음악, 미술, 대중문화, 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Writer Avatar

문은실

홍익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어렸을 때의 꿈은 건축가였지만,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를 본 후부터는 무언가 집요하게 조사하고 탐구하며 결실을 맺는 직업, 예컨대 평전 작가 같은 것에 대한 갈망이 생겼고, 그 소망은 가슴 한켠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를 참 좋아해서 한때 다큐멘터리 작가가 되겠다고 캠코더를 메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한국과 미국 보스턴에 머물며 10여 년간 출판기획과 취재를 하면서 대중 문화 자유기고가와 영미권 도서 번역가로 활동해왔다. 미국 드라마 시리즈에 대해서 그녀만큼 깊이 있으면서 재미있게 쓰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미국 드라마 평론가이기도 하다.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일본의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 골프채는 잡아본 적도 없지만 18홀 라운딩을 함께 하고픈 사람을 한 명 고르라면 단연코 메이저리그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즈다. 향후 배워보고 싶은 것으로는 "브라더 미싱으로 예쁜 원피스 만들기" "매킨토시로 그림 그리기" "나이스한 강아지 그루밍 기술" 등이 있으며,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으로는 "야구장의 몇 만 관중 앞에서 시구하기" "험머 타고 북미 대륙횡단하기" "플레이 스테이션 위닝 일레븐 게임에서 오버헤드킥 성공시키기" 등이 있다. 국내 리그는 물론 메이저리그 야구 마니아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혈 팬이다. 특히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좋아해서, 그의 플레이를 보려고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전 시즌을 관전하기도 했다. 직접 쓴 책으로는 『미드 100배 즐기기 시즌 1』, 『위트 상식사전 프라임』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야구 교과서』, 『첼시』, 『리버풀』, 『유쾌한 깨달음』, 『자연과학 상식사전』, 『디자인이 만든 세상』, 『하버드가 지배한다』, 『마이 히어로』,『훈육의 심리학』, 『나 누주드, 열 살 이혼녀』, 『마테크』, 『그 여자의 살인법』, 『냉동 인간』, 『수비의 기술』, 『외지인의 죽음』 『매춘부의 죽음』, 『대식가의 죽음』, 『잔소리꾼의 죽음』, 『돌런갱어 시리즈』(전5권), 『몸을 긋는 소녀』, 『언더베리의 마녀들』, 『뼈 모으는 소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