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은 지나치게 예의바른 영화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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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묘사한 평양 시민들의 삶이나 주인공 가족이 남한에서 겪는 이야기들이 과장되었거나 거짓이 섞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긴 제가 그걸 평가할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죠. 그 사람들은 열심히 조사를 했고 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의 남쪽>이 대상을 다루고 주인공을 선정하는 방식이 최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저쪽에서도 별 걱정 없이 지내던 평양 시민들이죠. 남한에 내려온 뒤에도 비교적 쉽게 적응한 운 좋은 소수고요. 모든 탈북자들을 대표하기엔 지나치게 편안한 위치에 있죠.

물론 그런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영화 역시 아주 전형적인 탈북자 이미지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려고 시도하고 있고요. 나른하고 편안한 평양 시내의 묘사나 거의 코미디처럼 밝고 경쾌하게 그려낸 탈출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국경의 남쪽>에서는 체제 비판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 영화의 드라마에선 분단이라는 상황이 두 연인을 억지로 갈라놓고 그렇게 좋지 않은 시간에 다시 재회시키는 고전적인 멜로드라마의 장벽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고요. 역사적, 정치적 조건을 다루는 방식이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솔직히 전 그래서 더 편하게 영화를 봤습니다. 전 엉뚱한 사람들이 불필요한 고생을 하는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잘 보는 편이 아니에요. 그런 건 현실 세계에서 얼마든지 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의 남쪽>은 여전히 좀 심심합니다. 이 영화는 작정하고 만든 멜로드라마인데, 그러기엔 감정과 설정이 너무 얌전한 거죠. 그렇다고 과장된 장르 설정을 지워버리고 설정을 깊이 판 사실적인 드라마냐,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국경의 남쪽>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표현은 ‘외교적 수사’입니다. 조금 심한 표현이고 여러분도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길 바라지만 그래도 그렇게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지요. <국경의 남쪽>은 사람들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영화입니다. 탈북자가 나오는 영화인데도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실제로 이 사람들은 북한에 가서 촬영할 생각까지 했답니다. 물론 그쪽에서는 탈북자 소재라는 걸 알고 거절했지만요. 북한에서도 상영하겠다고 허세를 떨었던 <웰컴 투 동막골> 때가 생각납니다. 물론 그때도 어림없는 일이었지만요.

이 역시 충분히 취할 수 있는 태도죠. (이런 말을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는 건지!) 지금이 반공 영화만 만들어야 했던 옛날도 아니고 이 영화의 목표는 체제가 아닌 인간을 다루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그냥 인간일 수 있겠어요. 다들 사회와 시스템의 일부지.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어떻게 예의바른 태도만 취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 해도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예의바르지 않은데. 세상이 그렇게 예절바르다면 탈북자라는 사람들이 존재할 리도 없겠고 그들의 남한 사회 적응이 그렇게 힘겹지도 않겠죠.

아무리 생각해도 <국경의 남쪽>의 가장 큰 단점은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치게 예의바르게 굴려다 그들이 마땅히 그렸어야 할 예의바르지 못한 세상까지 무시했던 거였어요. 이건 소위 ‘정치적 공정성’이라는 단어가 개입된 수많은 영화들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단점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예술가들은 예의를 차려선 안 돼요. 그건 외교관들이나 하는 짓이죠. 역시 비정치적이고 정치적 동물이 아닌 그냥 인간을 다룬 <국경의 남쪽> 연계 다큐멘터리인 <영옥이의 부재중 통화>가 <국경의 남쪽>보다 훨씬 울림이 큰 영화인 것도 그 때문이에요. 비슷한 영역을 다루고 있긴 했지만 <영옥이의 부재중 통화>는 남에 대한 예의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았어요.

우린 <국경의 남쪽>을 제2기에 속해 있는 영화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증오심에 차서, 또는 의무감에 밀려 수많은 반공영화들이 만들어지던 시기를 건너뛰어 의식적으로 정치적인 색채를 지워버린 예절바른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시기에 도달한 거죠. 첫 번째 시기가 그랬던 것처럼 두 번째 시기도 과도기입니다. 적어도 주류 영화에서는요. 어느 쪽이건 영화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건 마찬가지에요. 과도기라는 건 빨리 넘을수록 좋아요.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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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티코어

2006.05.06

훗, 역시 듀나사마. 과도기를 넘어 제3기에선 마침내 어느 사상이든 거침없이 배설해내는 인간 본성의 표출로 귀결되리라 진단하는군요. 종교, 범죄, 원조교제, 동성애 등 사회에서 거의 모든 금기의 영화적 표현을 용인하는 이 나라에서 아직까지 사상적 불순을 따진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언젠가는 일본이나 북한처럼 노골적으로 미국에 대한 적대의식을 표현하는 영화가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영화는 심지어 미국 자국내에서도 만들어지는데 말이죠. 또 반대로 적대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일본에 대해서도 다소 친근한 시선의 영화가 제작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나 조총련계 학생을 다룬 영화도 꽤 많이 제작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과거의 문제라는 이슈로 일본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이와 함께 또 다른 닫힌 벽인 나이의 금기를 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미 [제니주노]와 [죽어도 좋아]에서 필요 이상으로 이슈가 되었는데, 초등학생 나이뻘의 성관계도 1세기 전까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죠. 이런 터부가 깨어지며 비로소 표현의 용인이 완성되는 제3기에 진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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