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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1996년 11월부터였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세기’부터 저는 책에 관심이 있었던 거죠. 스물두 살 때였고, 군복무 중이었어요. 일병이었죠. 제가 있던 부대에서, 그 전까지는 상병, 병장만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어인 일인지 제가 일병이 되던 달에 ‘갑자기’ 일병들도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줬어요. 그 때부터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내무반 구석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정말 마구 마구 읽었어요. 군복 건빵 주머니에도 늘 작은 문고판 책을 넣고 다녔어요. 그냥 짬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어요. 다른 전우들이 담배를 피울 때 그 옆에 서서, 보초 근무를 나가기 전 대기 시간에, 화장실에서도, 탈수기 속에서 빨래가 돌아가는 시간에도.

 

책의 종류나 내용도 가리지 않았고, 사실 가릴 처지도 아니었어요. 그냥 내무실 책장에 꽂힌 순서대로 읽었죠. 어차피 저기 있는 책을 다 읽게 될 테니, 뭐 그런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어요. 굴삭기 운전 기능사 시험 수험서도 있었고, 팝송 대백과도 있었어요. 참, 수학 정석 문제집도 있었고, 영영사전도 있었어요. 그렇게 기준 없이 글로 된 것들은 다 읽고 또 읽었어요. 이해가 안 돼서 또 읽고, 재미있어서 또 읽고. 읽을 게 없어서 또 읽고.

 

그 때 읽었던 책들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권이 아직도 제가 좋아하는 저자들, 작가들이기도 해요. 당시에는 나름 신간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밤의 원숭이』, 장정일의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지그문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었어요.

 

아마, 그때 깨달은 것 같아요. 책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현실세계가 힘들 때, 그 세계가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아니 그 이상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세계를 싸돌아다니는 것이 무지하게 ‘재미’있다는 것을. 

 

독서는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냐고요? 우선, 이런 질문을 해볼게요. “(도대체) 자전거는 왜 중요하죠?” 자동차에 비하자면, 교통수단이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고, 특히 요즘에는 가격도 꽤 비싼 편이고, 레저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전거말고도 레저 대체재는 많지 않나요? 그럼에도, 자전거는 170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부침이 있었겠지만) 누군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전거에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죠. 자전거는 친환경적이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자동차에 비해 경제적이고 주차도 간편하다고. 그래서 감히 우리는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죠. 교통수단의 역할로만 보자면, 최고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자전거도 꽤 중요하다!” 혹은 “자전거도 의미 있는 물건(?)이다!”

 

책도, 독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책을 정보 전달의 매체로 본다면 최고라고는 할 수 없겠죠? 여흥거리라고 생각하면 역시 또 으뜸이라고 말하긴 힘들겠죠. 그럼에도, 자전거처럼 어떤 역할이 있지 않을까요?

 

자전거로 자주 출퇴근을 하는데, 가장 멋진 것은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원을 달리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멈춰서 감상할 수 있어요. 늘 가는 길이지만,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줍니다. 독서도 그렇지 않나요? 책을 읽다가 아름다운 문장 앞에 서서 감상에 빠질 수 있죠. 같은 책이지만 읽는 곳, 시간, 마음, (때로는) 번역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잖아요. 어떤 사람들이 요즘 책값이 비싸다고 툴툴거리면서 사지 않죠. 물론 읽지도 않고.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독서’를 취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더 멋진 취미들이, 더 멋져 보이는 취미들이 많이 생긴 탓이죠. 또 어떤 이들은 독서에서 재미를 찾지 못합니다. 게임, 영화, 드라마, 뮤지컬, 더 스펙터클, 다이내믹한 ‘꺼리’들이 많은 세상이니까요.

 

책이 태어났을 때의 역할만을 강조할 순 없죠. 자전거처럼, 책에 대한 관점도 바뀌어야 하고, 그러면 다른 역할이 생길 것 같아요. 그것도 아주 중요한 역할이. 인간을 멈춰서 생각하게 만드는, 멈춰서 감상할 수 있게 행위는 많지 않습니다.

 

독서는 늘 멈춤과 생각을 제공합니다. 그러니 멈출 수 없는, 생각할 시간도 없는 이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행위, 중요한 역할일 겁니다. 점점 빠른 탈것만 찾는 시대에 자전거가 다시 주목을 받는 것처럼, 독서도 그럴 겁니다. 자전거가 IT와 만나 진화하는 것처럼, 독서도 그렇게 될 겁니다.

 

자동차만 다니던 길에 ‘배려’의 차원에서 자전거 이용자들을 위한 전용도로가 생긴 것처럼, 어쩌면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해 특별한 ‘배려’가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제가 과한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 역시 독서가 준 상상력 덕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 다시 독서가 중요해지네요. 상상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고, 상상은 멈춰서 생각할 때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독서는 상상력을 자극하죠. 다른 매체들은 상상력을 눈앞에서 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지만 책은 그 반대입니다. ‘재현’을 독자의 몫으로 돌리죠. 마치 자전거가 동력을 라이더의 몫으로 돌리는 것처럼.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중요하다고 우길 수 있을 것 같네요!

 

‘사랑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이런 사랑 이야기를 꼭 쓰고 싶어요. 시간을, 정신을, 생명을 초월한 그럼에도 뭔가 ‘찌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런 사랑 이야기. “나도 저 지경이 되면 저런 식으로 사랑을 할 것 같은데...”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이야기요. 방금 가브리엘 수잔 바르보 드 빌레느의 『미녀와 야수』를 읽었는데, 빠른 시일 내에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루크 데이비스(Luke Davies)의 『캔디 Candy』, 타란티노의 『트루 로맨스』 (영화 대본)을 다시 읽고 싶어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임에도 다시 그 사랑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심’이 ‘쿵’하네요! 

 

최근에 소설집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를 냈어요. 제 소설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Special Thanks to ‘사서’ 읽어주신 분들! 그리고 제 책을 사시지도, 읽으시지도 않은 분들께는, 또 앞으로도 제 소설은 피하실 예정인 분들께는 요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한국소설을 읽어주세요! 그리고 또 이런 말씀도 드리고 싶어요. 한국소설 절대 후지지 않습니다. 한국음식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어떤 외국인이 배추김치 한 젓갈을 먹은 후,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음식은 너무 짜고 맵고 맛이 하나도 없네!” 이 말은 맞는 말일까요? 정말 한국음식은 너무 짜고 맵고 맛이 없을까요? 그럼, 떡국은? 김밥은? 잡채는? 갈비는? 냉면은?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한국소설은 한국음식만큼 다채롭다고. 그런데, 한국소설이 어떤 맛이 있는지조차 모르시겠다고요? 그럼, 소설가 장강명 씨에게 물어보세요. 장강명의 『한국 소설이 좋아서』가 있잖아요! “세상에 별과 같은 사람들이 있죠. 세상에 별과 같은 책들이 있죠.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 모든 책들을 다 읽고 이해할 수 없겠죠. 사람도, 책도 가까운 데서부터 사랑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내 옆 사람을 사랑하고, 내 옆에 놓인 책부터 읽을 생각입니다.”

명사의 추천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저/공경희 역

대학교 때, 민음사의 세계문학시리즈를 읽다가 이상한 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표지 그림이 없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한 것이죠.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어요. 그 전에 이름을 들어본 적인 있는 작품이었지만, 전혀 관심을 갖지 못했던 작품이죠. 그런데 제목을 곱씹어 보니 정말 이상하더라고요.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제목에 ‘호밀밭’이 나오고, ‘파수꾼’까지 나오지? 책 겉면에 제목이나 내용에 관한 마땅한 설명도 없었어요. 심훈의 『상록수』 같은 소설이 아닐까, 혼자 상상을 하며 읽기 시작했어요. 물론, 홀든 콜필드는 박동혁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어요. 홀든은 아직도 어딘가에는 살아 있을 것 같았어요. 뉴욕 어딘가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투덜거리면서 순수함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 같았죠. 나중에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홀든을 만날 수 있었죠. <공각기동대>, <사우스파크> 같은 곳에서요. 그리고 언젠가 필력이 넘쳐흐르면 멋진 성장소설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차마,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이라고는 못하겠네요. 순수하고 찌질한 외톨이 이야기, 그리고 제목으로 도무지 내용을 알아차릴 수 없는 그런 작품. 그렇게 태어난 작품이 『알루미늄 오이』입니다. 말하고 나니 몹시 부끄럽지만.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저/이진우 역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의 어머니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렌트에게는 죄송한 일이지만요) 아렌트는 ‘비타 악티바’라는 활동적인 삶을 위해서는 ‘돈을 버는 노동(labour)’, ‘돈과는 상관없는 창조적인 작업(work)’, ‘소통을 통해 이뤄지는 행위(action)'를 조화롭게 해야 한다고 했고, 저 역시 이에 동의해 ‘비타 악비바’적인 삶에 대해 늘 고민해왔습니다. 그것이 물질적, 정신적, 관계적으로 무난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자면, ‘자괴감’ 없이 ‘자존감’ 높게 사는 방법이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다른 방식으로 나름의 ‘비타 악티바’의 삶을 사는 존재, 즉 제 소설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노동(labour), 작업(work), 행위(action) 모두 ‘재물’만을 위해 실천하는 삶, ‘비타 악티바’를 행하는 사람이요. 그래서 그런 인간(혹은 동물)에 대해 써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통해 ‘제 자신’이라는 인간과 제 소설 속 ‘주인공’인 특별한 인간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해 준 책입니다. 삶 안팎으로, 제 문학 안팎으로 큰 영감을 준 소설입니다.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송병선 역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간 적이 있어요. 보고 즐길 것이 많았던 그 곳에서 제일 먼저, 가장 오래한 일은 보르헤스의 흔적 위에 서있는 것이었어요. 그가 살았던 곳, 일했던 곳, 걸었던 곳, 차를 마셨던 곳, 그의 이름이 남아 있는 곳, 그의 사진이 붙어 있는 곳들을 찾아다녔어요. 그야말로 환상적으로 행복했던 시간이었죠. 한 명의 죽은 작가를 살려, 심지어 그의 모국어로 완벽하게 구사할 대화할 기회를 준다면 저는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를 부활시켜 아르헨티나말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대화까지는 바라지 않을게요. 그저 그의 말을 직접 듣고 싶어요. 그의 단편들을 사랑합니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알렙』, 『칼잡이들의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기억』, 『픽션들』은 멈추고 생각하고, 다시 읽게 만드는 그래서 다시 멈추고 생각하고 '공부'하게 만드는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상상동물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보르헤스를 처음 만났던 20대 때, 철모르고 무식하고도 용감하게 '제 방식대로' 보르헤스 따라 하기를 해본 것들의 결과물이 『상상인간 이야기』였습니다. (제목에서부터 느낌이 오시죠?) 지금 생각하면, 사실 그 때에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시도였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감추고 싶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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