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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주로 깊은 밤에 책을 읽어요. 그러나 사실은 대중이 없죠(웃음). 화장실에서도 읽고,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도 읽고.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언제냐는 질문이 제게는 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책은 제게 그냥 공기나 밥 같은 거예요.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면서부터 활자로 된 모든 것을 읽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아침마다 나온 어린이 신문을 읽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자꾸 신문을 훔쳐보니까 어머니가 ‘글에 미친 송서방’이라면서 혼을 자주 내셨죠. 여느 부모님과 달리 저희 어머니는 제가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유전되는 심한 약시여서 (저희 어머니는 한쪽 눈의 시력이 거의 없으십니다), 걱정이 많으셨거든요. 그래서 이불 속에서 몰래 손전등으로 책을 읽다 들켜서 혼나기 일쑤였어요. 30대에 라식 수술을 하고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렸습니다. 지금은 마트에 가서도 이 반찬이 어떤 재료로 만들었나 궁금해서, 반찬거리 뒷면을 읽지요. 자몽 추출물, 아질산나트륨 뭐 이런 거 등등. 숨어 있는 글은 항상 재미있거든요. 약간의 활자 중독증 같은 것인데, 이게 버릇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시대와 풍물을 자세히 기록하는 한국 선비들의 책을 읽고 있고, 더 읽을 계획입니다. 김혈조 교수님이 번역한 『연암일기』는 올해 계속 읽고 있고, 『자저실기(自著實紀)』도 구입할 예정입니다. 저는 조선시대가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서 과거를 생각하는 방식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극이나 영화에 나오는 방식으로 보거나 그 시대가 뭔가 결핍이 있어서 사람들이 크게 불편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과거라는 돋보기 안에서도 현재의 삶과 동일한 원형성을 보고, 그곳에서 오히려 현재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상담을 전공하면서 사람들이 정말로 분노나 기쁨이나 즐거움조차도 그것이 극단이 되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해서 연암의 이러한 발언이 훌륭한 심리학적 통찰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정말 행복해집니다. 시간이란 뫼비우스 띠 때문에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살아 있는 글로 인해 만나게 되는 순간이니까요. 저에게 연암은 ‘별에서 온 그대’ 같은 사람인 것이지요.


나의 서재는 ‘유배된 자들의 놀이터’
읽지 않은 책은 두지 않는다


한때 제가 모은 책이나 DVD를 ‘황야의 후궁’이라고 별명 붙였습니다. 서재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 적도 있어요. 하지만, 어느새 서재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거든요. 책이든 말이든 글이든 오히려 수집을 해두었다고 하면, 긴장감이 떨어져서 한쪽 곁에 밀어두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서재는 수집된 곳이 아니라 언제든 찾아 읽고, 읽고 있는 책들이 가득한 ‘유배된 자의 놀이터’로 변모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읽지 않은 책은 두지 않습니다. 항상 읽은 책, 읽고 있는 책들이 집과 연구소를 들락날락합니다. 세상에서 뚝 떨어져서 글의 섬에 유배된 것처럼, 저의 서재는 제게 가장 좋은 학교이자 놀이터이니까요.

최근 『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라는 책을 썼습니다. 왠지 글을 내놓는다는 것은 약간은 수치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항상 제 글은 부족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이번 책은 그런 감정을 모두 밀어둔 채, 세상에 선물 하나 드리고 싶다는 심정으로 써보았습니다. 인생은 제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친절한 편이었거든요. 그런 인생을 가꾸어갈 수 있게 도움 주신 모든 분들께 드리는 선물. 그래서 독자들도 이 책을 어느 날 갑자기 받아 든 깜짝 선물처럼 즐기셨으면 합니다.

명사 소개

심영섭 (196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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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작가 : 인문/사회 저자

최신작 : 인문예술치료의 이해

영화 평론가이자 심리학자, 상담가. 심영섭 아트테라피 대표. ‘심영섭’이라는 이름은 영화 평론상 수상 당시 그녀가 스스로 지은 것으로서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최근까지 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가르쳤으며, 심리학, 영화, 예술, 인문학을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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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추천

안티프래질 Antifragile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저/안세민 역

최근 읽은 책 중에 베스트였습니다. 경영서가 아니라 철학서이자 심리학 서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이 책은 가변적인 삶, 깨어져도 다시 이어 붙이는 삶, 극단과 중용이 함께 하는 삶에 대한 몽상을 하게 만듭니다. 인문학적 개념과 통찰력을 삶의 전반에 적용시키는 도저한 직관력이 도드라지고, 깨어지지 않기보다, 깨어져도 다시 겹겹이 이어 붙이는 중층의 ‘태도’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자저실기

심노숭 저/안대회,김보성 등역

『자저실기』의 심노숭 역시 제사 음식을 잘못 다룬 여종을 개와 함께 묶어서, 그 개가 여종을 뜯어 먹었다는 사실까지 적었다고 하니, 그가 세필로 그려낸 조선이 어떤지 꼭 읽어볼 참입니다. 세상은 잔인하고 후덕하고 자상하고 불친절하고 불평등하고 정의로운 다양한 국면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조선도 현재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흘러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런 책들은 제 전공과는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읽어보고 싶네요.

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 저/민승남 역

우울증에 관한 가장 심도 깊고 폭넓은 연구서이자 에세이라고 할 만합니다. 인간 정신의 불가해성, 마음의 신비를 우울증이라는 키워드로 종횡무진 하는 저자의 식견과 필력은 마성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읽을 때마다 우울증 환자의 내면이 그대로 느껴져서 몹시 힘들기도 했지만, 진정성과 솔직함으로 뭉친 저자가 어머니의 자살 혹은 안락사 장면을 담담히 묘사할 때는 울컥하는 감동이 밀려들었습니다.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저/전양범 역

인간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심리학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서 중의 하나가 이 책이었습니다. ‘다 자인’으로서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에 이토록 깊이 천착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 부모도 조국도 성별도 사회적 지위도 선택하지 못한 우리가 세상에 던져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을 때, 등대가 되어준 책이죠.

눈앞에 없는 사람

심보선 저

심보선 시인의 2011년 시집 <눈 앞에 없는 사람>은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절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중을 긁적이며’, ‘새’, ‘이 별의 일’ 등은 술 취할 때마다 제가 지인들에게 낭송을 하는 애송시들이기도 합니다. 심보선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문디(mundi)라고 하던데, 그 정의할 수 없는 말해지지 않는 어떤 것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더 살 만하게 해주는 것은 아닌지 싶었습니다.

길 - 안소니퀸. 페데리코펠리니감독

제 인생의 영화는 언제나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입니다. 초등학교 때 본 영화였는데, 내용은 잘 이해가 안 갔지만, 백치 같은 젤소미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잠파노가 해변에 앉아 엉엉 울던 그 장면이 화인으로 가슴에 남아 있지요. 이때부터 어렴풋이나마 개념도 잘 모른 채, 사람에 대한 연민이 무엇인지 많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따뜻한 색,블루

압델라티프 케시시

최근 본 영화 중에서 인상 깊은 작품을 꼽으라면, 압델라프 케시시 감독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과 지아장커 감독의 <천주정>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은 성차, 여성의 몸에 깃든 관능과 시선의 문제, 계급의 문제가 한 소녀의 사랑의 감정선과 그대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두 레즈비언 커플의 수년간에 걸친 사랑의 감정의 가변차선을 따라가면서, 피할 수 없는 사랑의 생로병사의 아픔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아델 역의 아델 엑사코플로스의 연기는 탁월하고요. 물론, 이 세계에서 네모는 가장 둥글고, 파랑은 가장 따뜻한 색이죠.

천주정

지아 장 커

<천주정>은 부산 영화제에서 처음 보았는데, 기존의 롱샷에서 벗어나 스테디 캠을 써서 새로운 영상 미학을 보여주는 지아장커의 변신에 일단 놀랐습니다. 무협물과 사회 부조리를 병치시킨다거나, 스릴러물적인 반전을 꾀한다거나 하는 장르적인 속성도 더 진해진 것 같고요.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든 지아장커의 부조리한 중국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서늘한 시선과 눈을 떼기 힘든 영상은 여전합니다. ‘A touch of Sin’이라는 영화의 영어 원제처럼, 이토록 강렬하면서도 서늘한 죄의 맛, 죄의 색깔, 죄의 감촉은 중국 영화 역사상 전례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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