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보이 사카에 저/김난주 역
쓰보이 사카에의 『스물 네 개의 눈동자』도 빼놓을 수 없는 책이죠. 이 책은 아쉽게도 절판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일본을 배경으로 섬마을 선생님과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전쟁의 아픔과 희생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반전 동화입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네 집에서 읽고, 대학교 때 김난주 선생 번역으로 다시 출간된 걸 읽었어요. 제게 ‘나쁜 나라 일본’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치도록 해준 책이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저/김용준 역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는 제가 드물게 읽은 자연과학 계통의 책입니다. 대학교 때 인터넷 게시판에서 사람들이 추천하는 걸 보고 겁 없이 사 읽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자이지만, 내용 자체는 ‘학문’이란 무엇인가, ‘공부’한다는 건 어떤 것인가를 치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소위 비전 없는 인문학도로서 진로를 고민하면서, 대체 인문학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던 제게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준 책이라고나 할까요.
E.H.곰브리치 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도 빼놓을 수 없겠죠. 저는 ‘고고미술사학과’라는 학과를 나왔는데, 고고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과입니다. 대학 시험 면접을 보러 올라와서 모 사립대학 기숙사에 묵었었어요.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땐 지방 학생들을 위해 비어 있는 기숙사를 빌려줬거든요. 그 대학 논술 면접 다음에 제가 졸업한 학교 면접이 있었죠. 무료해서 방 안을 살펴보다가, 그 방 주인의 책장에서 발견한 책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심심풀이로 집어 들었는데 그날 밤 다 읽었죠. 코레조의 ‘성탄’ 그림이 뿜어내는 따스한 빛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 책을 읽은 덕분에 며칠 후 대학 입시 면접에서 대답을 잘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대학에 합격했으니 잊을 수 없는 책이랄까요. 그런 경험 없이도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입문서로 쉽게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르만 헤세 저/전영애 역
좀 식상하지만 헤세의 『데미안』 역시 인상 깊게 읽었던 책입니다. 고등학교 때 의무적으로 읽었던 이 책의 의미를 다시 깨우친 건 대학교 때였어요. 『데미안』은 고등학생보다는 대학생이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 현실에서. 자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도 대학교 때고… ‘밝은 나’와 ‘어두운 나’, 밝은 ‘부모의 세계’와 어두운 ‘나의 세계’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 저뿐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준 책이죠.
루머 고든 글/조안나 자미에슨 외 그림/햇살과 나무꾼 역
사촌오빠네에 있었던 에이브 전집 중, 루머 고든의 『부엌의 마리아님』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이 전집은 지금 절판되었는데, 이 책은 비룡소에서 『부엌의 성모님』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어요. 『인형의 집』과 함께 묶여 있죠. 자폐적인 어린아이가, 가정부 아주머니를 위해 동유럽 국가에서 집에 모셔놓는 성상(聖像)을 만들어준다는 설정이 좋았어요. 저 역시 주인공 그레고리처럼 어른들이 “쟤는 애 같지 않다”며 손가락질하는 아이였으니까요. 이 책을 통해 ‘이콘’(동유럽의 성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 책상 위엔 룩셈부르크 출장을 갔다가 벼룩시장에서 사 온 라트비아산 ‘이콘’이 있는데요. 시장에서 발견하곤 그레고리 생각이 나서 당장 사들였습니다.
엔도 슈사쿠 저/공문혜 역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20대 후반쯤에 읽었습니다. 저는 이모가 수녀님인데,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는 반감이 많았어요. 교조주의가 싫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성화를 찢은 적도 있으니까요. 종교란 무엇인가, 고통의 순간에 신(神)은 어디 있는가,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일본에 천주교를 전파하러 온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신부의 고뇌를 그린 이 책이 거기에 대해 답을 많이 주었죠. “배교하면 다른 신도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일본 관리 앞에서, 젊은 신부가 망설이다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닭이 울고, 신이 말합니다.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내가 알고 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전율했어요.
박경리 저
박경리의 『토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옆에 있었던 책이죠. 20년 넘게 작가가 집필했고, 마침 제 고향 진주가 『토지』의 배경인 하동 옆이고, 『토지』에도 진주 이야기가 자주 나와서 더 친근했던 책. 수백 명의 인물 묘사가 생동감이 있고, 주인공 서희의 도도한 매력에 흠뻑 빠져서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고 또 읽었던 책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저/송태욱 역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이와나미 소년문고 중 50권을 추천하는 책이에요. 『어릴 적 그 책』 원고를 모두 넘긴 직후 이 책을 읽었는데, '동화를 읽는 어른'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동화를 읽는 어른'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 내게 위로를 주었어요. 사실 '어른이 동화를 읽는다'고 하면, 어쩐지 철없고 유치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는 법이니까요. 책을 읽어가다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 읽은 계몽사, 금성출판사 문고의 책 셀렉션이 상당 부분 일본의 소년문고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아여. 미야자키가 권하는 어린이 책은 우리가 어린 시절 읽은 책과 신기하게도 많이 겹쳐요. 『사랑의 요정』이 그렇고, 『장미와 반지』가 그렇죠. 제가 아껴가며 읽은 책들을, 70대인 미야자키 역시 아껴가며 읽었다는 사실에서, 모든 어른은 한 때 '어린이'였다는 점을 깨닫게 되어 뭉클해졌어요.
에단 호크 / 줄리 델피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제 돈을 내고 본 영화가 이 영화입니다. 이야기가 굉장히 로맨틱하면서도 지적이잖아요. 유럽 기차여행과 빈의 풍경도 아름답고요. 이 시리즈를 좋아해서 최근에 나온 <비포 미드나잇>까지 봤는데,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영화인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영화라고 하면 첫 번째가 <사운드 오브 뮤직>.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 친구 댁에서 비디오로 봤는데 뮤지컬 영화를 본 게 처음이라 충격적이었어요. 자막이 없는 원어 비디오였는데 그럼에도 내용에 이끌려서 정신 없이 봤죠. 어른이 돼서 다시 봐도 즐거운 영화로 ‘My Favorite Thing’같은 곡은 정말 명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줄거리는 일종의 신데렐라 스토리지만요.
이 영화는 극장에서 세 번, TV에서도 봤어요. 아픔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에 대한 질문을 제게 던져준 영화입니다. 장애인 소녀를 사랑한 남자가, 결국 그 소녀를 버리고 마는 그런 이야기. 여주인공의 청순한 눈매와 담백한 연기가 좋았어요.